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2)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32화(32/135)
정적에 빠진 궁에는 스산한 바람만 불었다.
이렇게 행패에 가까운 일을 벌이는 건 평소 같으면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플랫슈즈 때를 떠올렸다.
어차피 몇 번이나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퀘스트를 깨게 될 테니.
내심 믿는 구석에 의지해 일을 저질렀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늙은 신하가 당황한 듯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뭘 통촉하라는 것이냐고?”
“그, 그건 이미 전하께 따로 상소문을….”
“이보시게.”
내 말에 점점 땅을 짚고 있는 늙은 신하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이오?”
“예?”
신하가 알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답해보시오. 내 나이가 몇이오.”
사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기도 했다.
“전하께서 세상의 빛을 본 지 올해로 스물다섯 해가 지났….”
“그렇다면 내 나이, 충분히 많지 않소…?”
내 등 뒤로 충격받은 상선이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근데 그렇잖아.
“스물다섯 먹은 주군이 수렴청정에 국정을 맡기면 백성들이 짐을 뭐라 생각하겠소?”
그러자 이번에는 뒤쪽에서부터 울부짖는 듯한 대사들이 들려왔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아니 그러니까, 나더러 뭘 더….”
그때 빠르게 달려와 날 제지하는 상선의 손길이 느껴졌다.
상선이 손을 떨며 내 옆에서 작게 말했다.
“전하, 우선 자리를 피하시는 게….”
그러자 호위무사 열댓 명이 내 앞을 막아서서 시야를 차단해버렸다.
이, 이게 아닌가?
“길을 안내하겠나이다.”
날 이끄는 상선을 따라 신하들이 꿇어앉은 앞마당을 피해 샛문으로 빠져나왔다.
이렇게 꼴사납게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왕이라니.
왕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왕 시늉이 잘못됐나?
뒷부분 드라마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시놉시스로만 읽은 뒷부분을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한참을 걷다, 답답한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상선을 불러세웠다.
“상선, 내가 잘못한 것이오?”
상선이 내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전하.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 그 누구보다 이 늙은 상선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후책 없이 감정대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옵니다.”
상선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잘못했다는 소리였다.
아니, 드라마 결말은 어리숙한 왕이 대비 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왕권을 되찾는 거였는데.
이게 아니라고?
“지금은 한 수 한 수, 철저히 계산해서 놓아도 모자란 때입니다, 전하.”
상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 말과 함께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전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의 관복을 입은 곱상한 여인이 서 있었다.
머리를 굴려볼 것도 없이, 송순임이었다.
“와….”
순임의 얼굴을 보자마자,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페이드아웃 됐다.
그리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나랑 닮았잖아….
넋을 놓고 순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말 묘하게 나랑 닮았어.
순임은 나보다 좀 더 고운 선들이 도드라진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청초한데 궁 사람들은 눈이 삐었나.
어떻게 여자인 걸 모르지?
그때,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보상 : 캐스팅]’
혹시…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 시퀀스를 완성하고 나면.
내가 저 아이의 배역을 따낸다는 건가?
저 배역이 나의 것…….
혹시,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순임을 관찰해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인 걸까.
그때부터 넋 나간 채로 순임의 매무새와 행동, 목소리, 걸음걸이, 손짓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순임이 걱정스레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왕 노릇을 했다.
“어, 송 부수찬 왔는가.”
입 밖으로 나가는 태평한 말과는 다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전례 없던 크기의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난 이전보다, 아니 이전과 비교할 바 없이 순임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다.
그때 순임이 손을 뻗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었다.
“왜 그러시어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순임의 반응에 당황해 상선을 쳐다보니, 상선은 이미 우리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뭐야, 이미 여자인 걸 밝힌 다음인가?
맞잡은 순임의 손을 내려다보는데, 순임이 다시 입을 뗐다.
“소신, 궁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전하께도 송구스러운 마음이옵니다.”
“무엇을 말이냐?”
순임의 어두워진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순임이 당황스런 눈길로 날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대비가 오래전 제 가족에게 반역죄라는 누명을 덮어씌운 증거말이옵니다.”
“아, 그렇지.”
순임의 사연이 퍼뜩 떠올랐다.
순임은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사연을 안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하여 궁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순임을 연기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마음에 새기고 있던 과거사였다.
그걸 이야기의 후반부에서까지 여태 못 찾고 있었구나….
순임의 표정에는 서글픔이 깃들어있었다.
그 서글픔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내가 연기해야 할 감정들이 고스란히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나.
잠시 동안 순임의 눈치를 살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 반응이 없자, 순임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안색을 살폈다.
나를 바라보는 순임의 두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충심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순임은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터였다.
순임이 슬픔을 감추고 빙그레 웃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소인, 감히 전하와 함께하는 꿈을 꾸고 있사옵니다.”
나도 다른 의미로, 순임의 뜻과 같았다.
“나 역시 너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순임에게 대답했다.
* * *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끔뻑이면서… 천장을 한참 바라봤다.
비단 이불을 걷어내자 한 궁녀가 들어와 물 한 잔을 올렸다.
그 그릇을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생각했다.
‘나 왜… 자고 일어났냐?’
곧 시간이 되돌아가면, 몇 시간 못 자고 피곤할 줄 알았는데…?
무언가 잘못됐다는 예감이 서늘하게 목덜미 뒤로 다가왔다.
“상선.”
내 목소리에 상선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예, 전하. 평안한 밤 보내셨사옵니까.”
“어제… 궁 앞에서 신하들이 통촉해달라면서 그랬었지?”
“예? 예….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상선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다.”
떨리는 손으로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큰일 났다.
내가 알고 있던 대본 속 세상의 룰이 달라졌다.
지난번 플랫슈즈 때는 분명 하루마다 리셋됐는데.
이번엔 아닌가. 리셋 기능이 아예 사라졌나?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관리자 누구야.
그릇을 탁, 내려두자 궁녀들과 상선이 내 눈치를 살폈다.
“전하, 어제의 일로 심기가 불편하시옵니까.”
상선이 걱정 담아 건네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어제 온종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궁을 들쑤시고 다녔던 것 하나하나, 모조리 떠올랐다.
그니까, 왕의 체통을 잃고 막 행동했던 거나, 나이 많은 신하에게 내 나이가 몇이냐 물었던 거나, 중요한 국정에 막 제멋대로 군 거랑…
“어제 일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거잖아.”
혼자 중얼거렸다.
혹시, 리셋 버튼을 찾아야 되나?
그런 건가, 이거 리셋 챌린지인가.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고 상을 뒤집어가며 버튼을 찾아대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병풍을 밀어대며 벽을 살펴댔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나… 세상이란 잔혹한 곳.
그런 친절이 있을 리가.
그 무엇 하나 도드라진 구석 없는 맨질한 벽이 나를 반겼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실소를 터뜨렸다.
결국, 날 지켜보던 상선이 무릎을 꿇었다.
“전하, 어제 소신이 주제넘게 전하를 막아섰던 게 문제였던 것이라면… 이놈을 죽여주시옵소서.”
멍하니 상선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선의 등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님 혹시…….
이번엔 장기적으로 겪으면서, 사극 연기를 배워 보라는 배려인 건가?
“오… 그럴듯한데?”
대박.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스스로 멘탈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막으려는 자기 합리화를 해냈다.
상선이 넋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 * *
“와.”
궁의 한쪽에 자리한 서책 보관소 안.
책이 빼곡하게 놓인 책장 옆 창밖으로 작은 연못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순임이 서 있었다.
상선이 궁인들 몰래 아주 잠시 둘만의 공간을 내어주었다.
대본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내게 가장 유익한 순간이랄까.
또다시 순임을 요목조목 뜯어봤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눈길에 순임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발그레한 두 뺨과 동그란 두 눈이 여자인 내가 봐도 미치도록 귀여웠다.
그때, 순임이 미소를 띠고 날 지긋이 바라봤다.
거짓됨 없이 순수한 믿음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심 당황스러웠다.
그런 순임이 잠깐 창밖의 연못을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그날을 기억하시옵니까.”
순임이 눈을 내리깔며 살짝 웃었다.
순임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이 궁에 들어온 지 햇수로 오 년이 다 되도록 가족에 대한 단서 하나 찾아볼 수 없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 관복을 벗고 고향에 내려가려고 했을 때….”
뒷부분 대본을 보지 못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때 전하께서 소신을 붙잡아주셨지요.”
순임의 깊은 두 눈과 마주했다.
그런 적이 있었구나….
“그러시며, 전하의 사람이 되어달라 부탁하셨지요. 소신이 관복으로 위장한 여자임을 아셨을 때도, 전하의 사람이 되는 일에 성별은 중하지 않다고 말씀해주셨지요.”
그리고 연이은 순임의 마지막 말에, 대본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감정이 동요했다.
“전하가 붙잡아주신 덕분에 소신, 처음으로 제 삶을 살고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왕이 순임을 만나 강해졌듯이, 순임 역시 왕을 의지해 굳세어졌구나.’
순임은 처음부터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바로는, 순임은 태생부터 시대상과 동떨어진 여자라고 생각해왔었다.
주체적이고, 대담하며, 용기 있었으니까.
뭐랄까,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더욱 굳세어진 외유내강 스타일인 듯, 그렇게 순임의 이미지를 그리며, 연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의 옷이든, 여자의 옷이든 어떤 것을 걸치든 소신은 상관없사옵니다. 그저 전 전하의 사람입니다.”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수치심이 몰려왔다.
내가 그동안 연기했던 건, 전부 가짜에 가까웠구나.
설령 칭찬을 받았을지라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흉내만 내고 있었잖아, 난.
그 순간 결심했다.
대본 밖으로 나가면 앞서 연기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기로.
오디션이 어떻게 됐든, 앞으로 어떻게 되든, 제대로 해보이겠어.
내 눈앞의 송순임을 제대로 담아낼 거야.
그리고 그즈음 한 가지 더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순임이 아니라 왕에게 빙의한 이유.
어쩌면….
그때, 생각에 잠긴 내게 순임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와 입을 맞췄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