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3)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33화(33/135)
늦은 밤, 다시 돌아온 침전 안.
비단 이불 위로 주저앉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 하루도 너무 고됐다.
별의별 일이…….
갑자기 서재에서 순임과 입 맞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화들짝 놀라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내 인생의 첫 입맞춤이 대본 속 주인공이라니.
내일도 눈 뜨면 리셋이 안 되려나….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때, 궁녀 두 명이 들어와 내 다리를 한쪽씩 주무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져 손들을 걷어냈다.
“그만 되었다. 물러가거라.”
고작 이틀 새에 왕의 흉내도 많이 늘었다.
궁녀들이 물러나자, 구석에 서 있던 상선이 바깥으로 턱짓을 했다.
그러자 문이 닫혔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왕은 온종일 혼자 있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하….”
내 한숨을 들은 상선이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제 무릎에 올려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상선, 됐소.”
“고단하시지요, 전하.”
상선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힘주어 내 다리를 만져댔다.
그런 상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상선이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 아침부터 궐 바깥에 정체불명의 벽서가 나붙었다 하옵니다. 얼마 전 관직에 오른 젊은 신하들의 행방도 묘연해졌사옵니다.”
조곤조곤 얘기하는 상선의 말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상선이 계속해서 내 다리를 주물렀다.
“아마 앞으로 신하들의 농성도 계속될 것입니다. 모두 대비의 계략일 테지요.”
가만히 듣다가 대답했다.
“내가 굳건해져야겠네. 그렇지 않소.”
그러자 상선이 미소 지으며 내 다른 쪽 다리로 손을 뻗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굳건한 분이시옵니다. 선택만 내리지 않으신 것이지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늙은 상선의 손 위로 손을 뻗었다.
내 손이 닿자, 상선의 손이 멈췄다.
이렇게 늙을 때까지 왕 옆을 한평생 지켜온 사람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따뜻한 손길로, 눈길로.
어떻게 이런 사람이 대본에 없지?
의아한 일이었다.
내가 읽은 대본 속에 상선의 대사라고는 한 줄도 없었다.
낮에 순임을 보며 생각했던 걸 다시 떠올렸다.
내가 왕에 빙의한 이유는 순임의 몰랐던 면모를 다른 이의 시선으로 파악하라는 뜻 같았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대본 속에 숨어있는 상선의 존재를 깨달으라는 것.’
며칠 동안 지내며, 뚜렷해지는 몇 안 되는 사실 중 한 가지였다.
만약 내가 순임에 빙의했다면, 이만큼 상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이렇게나 중요한 임무를 많이도 맡은 사람인데.
상선의 손을 꼭 쥐었다.
“상선, 고맙소.”
상선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망설이듯, 말했다.
“어제부터 전하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십니다.”
“그런가. 어떻게 다른가.”
내 말에 상선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좀 더… 솔직해지신 것 같사옵니다.”
상선과 눈이 마주쳤다.
“전 이런 전하의 모습도 좋은 것 같사옵니다.”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그럴 리 있사옵니까.”
“상선, 방금 말 더듬었소.”
그 말에 둘 다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이날 밤, 상선의 손에 담긴 온기는 다시는 잊지 못할 것이 되었다.
* * *
며칠 후.
“나가 있거라.”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전하. 관습대로….”
“아니, 나가라고!”
매화틀을 앞에 두고 궁녀들과 입씨름 중이었다.
보다 못한 상선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의 옥체를 살펴보기 위함이옵니다.”
계속해서 아파 오는 아랫배를 부여잡으며 승질을 팍 냈다.
“나가!”
그러자 궁녀와 내시들이 땅바닥에 엎드렸다.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아니, 뭘 죽여. 그냥 제발 나가라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상선이 차분히 다른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하.”
“상선도 나가시오.”
상선이 놀란 듯 잠시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내 도끼눈에도 상선이 물러서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자꾸 궁인들을 물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숨기실수록 저들은 더욱 의심할 것입니다. 옥체가 미령하신 것 아닌가 하고요.”
혼란스러운 채로 우두커니 상선 말을 듣고 서 있었다.
아씨, 배 아파 죽겠는데.
점점 두 다리가 배배 꼬이기 시작하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사이 상선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저들에게 빌미가 되옵니다.”
“저들?”
반사적으로 상선에게 되물었다.
상선이 허리와 함께 목소리도 낮추었다.
“대비전 말이옵니다. 어찌 모르시는 양 말씀하시옵니까.”
저놈의 대비는 화장실 가는 것도 감시한다는 거야?
“전하께서 티를 내실수록 송 부수찬의 움직임이 더욱 어려워지옵니다. 불편하신 성심은 이해하오나, 부디 평소처럼 거동하여 주소서.”
부수찬의 움직임….
‘소신, 궁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서…’
‘대비가 오래전 제 가족에게 반역죄라는 누명을 덮어씌운 증거 말이옵니다.’
순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바삐 왕 노릇을 하는 동안, 순임은 무언가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았을까.
“알았소. 내 자중하겠소. 그럼 그… 부수찬의 움직임은 잘 되어가오?”
상선이 답하기 전에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오. 오늘 밤에 부수찬더러 몰래 들라 이르시오.”
사실상, 며칠 동안 관찰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이렇다 할 별일도 없으니 더욱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떤 시퀀스를 어떻게 완성하라는 건지.
게다가…
며칠이나 지났는데 왜 루프를 안 하는 거야?
속으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 * *
그렇게 또 경연에 참석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끼니를 먹고, 그보다 더 많은 업무를 보며 하루를 보낸 후의 밤.
침전 바깥으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방을 밝히는 촛불을 가만히 쳐다봤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여느 때와 달리 궁이 적막 속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선은 내 명을 받아 순임을 데리러 간 터라, 더욱 불안함이 들었다.
내 침전 안의 궁인들 중 누가 대비의 사람인지 모를 일이니….
그때, 침전 바깥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반역자를 추포했사옵니다!”
목 뒤에 소름이 쭈뼛 타고 올랐다.
“반역자…?”
곧장 몸을 일으켜 서둘러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녕전의 문이 열리자마자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소리도 없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내금위 군사들과 신료들이 침전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군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들이 강녕전 앞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 군사들 뒤에서 대비가 걸어왔다.
횃불에 비친 대비의 얼굴이 낯설었다.
문안 인사를 올릴 때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대비의 온몸에서는 섬뜩한 형형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웅크려있던 호랑이가 한 사람을 집어삼키겠다는 의지로 몸을 한껏 편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당황한 채로 뚫어져라 쳐다만 보는데, 대비가 자신의 옆을 곁눈질했다.
대비의 옆엔 익숙한 두 사람이 포승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관복이 반쯤 끌어 내려진 채 엉망진창이 된 순임과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상선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이런 게 대본에 나오는 장면인가?
그럴 리가….
“상선…. 순임아.”
내 부름에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인 순임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반역이라니. 증거가 있습니까!”
내 으름장에 대비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주상을 안으로 뫼셔라. 성심을 회복하실 때까지 대리청정을 강화할 것이다.”
상선을 따르던 젊은 내관 몇몇이 우왕좌왕하다 내 곁을 지키려 다가오는데, 군사들의 칼이 그들의 목을 겨눴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사람들이 다치기 시작하자 현실감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내가 지금 뭘 놓친 거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때, 군사 둘이서 다가와 나에게 우악스러운 손길을 뻗쳤다.
“감히 짐의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이냐.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군사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날 어딘가로 끌고 갔다.
등 뒤로 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도들에게 현혹되어 심신이 미령하시다. 편히 쉬시게 해 드려야 할 것이야.”
* * *
어두컴컴한 침전에서 눈을 떴다.
“으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와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방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점점 귓가에 가까워졌다.
“양귀비입니다.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요.”
대비였다.
몽롱한 눈 틈 사이로, 대비가 면보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중간하게 움직여서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줄 아셨습니까? 그럴 바엔 얌전히 장기 말로 있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대비가 천천히 말을 읊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비틀어 움직였다.
대비가 그런 날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진작 절실하게 발악했어야지요. 지금처럼….”
계속해서 대비의 말이 들렸다.
“절실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다 죽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대비가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직전의 몸으로 앉아있던 상선과 순임이 떠올랐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자괴감이 들었다.
“이제 이 세상은 나의 것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비가 천천히 문 쪽으로 멀어져갔다.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고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순임을 더 재촉했어야 하나?
매화틀 앞에서 사람들을 내보낸 게 문젠가?
아니 그 전에, 시위하는 신료들에게 뭘 통촉해야 하느냐 물었던 게 실수였을까?
그런데 왜 그 시점에서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은 거지?
되돌아가는 건 <플랫슈즈> 때만이었나?
나와 상선, 순임을 모조리 해친 대비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리고 익숙한 감정이 들었다.
두려움.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이렇게 죽어버리면 난 어떡하나.
순임을 연기해야 하는데…….
결국, 힘이 다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잠시 후, 깊은 수면 아래로부터 목덜미를 잡혀 끌어올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헉!”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비단 이불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하!”
주위를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전하.”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기가 망설여졌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천천히 돌린 시야에 상선이 들어왔다.
멀끔한 모습이었다.
“전하! 흉몽이라도 꾸셨나이까. 여봐라! 물을 가져오게. 어서!”
손을 뻗어 상선의 온몸을 매만졌다.
따뜻했다.
“상선. 살아있소?”
“전하. 소신 늙었으나, 아직 숨은 붙어 있사옵니다.”
상선이 늘 봤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달랬다.
그런 상선의 소매를 한참이나 부여잡았다.
그렇게 다시 대본 첫날이 시작되었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