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7)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37화(37/135)
“새나야. 한새나! 얘!”
온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누군가 날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십여 일 만에 듣는 민영 언니의 목소리였다.
딱딱한 나무 바닥 위에서 눈을 떴다.
다시 돌아온 연습실 안.
더 이상 나를 반기는 비단 이불은 없었다.
그러자 문득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민영 언니의 손길에 따라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데…
곧 매서운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배우가! 몸 관리를! 안 하면! 배우 생활! 어떻게! 하려고!”
“아, 아! 무엄하구나!”
“뭐?”
간만에 보는 민영 언니의 표정이 멍해졌다.
“춥구나….”
“…?”
민영 언니의 어이 없는 눈길이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
아, 이 말투가 아니지.
“아니, 그냥 춥다구….”
그러자 민영 언니가 연습실 구석에 있는 담요를 가져와 몸을 덮어주었다.
“언니, 지금 몇 시예요?”
현실에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일찍도 묻는다. 아홉 시야, 아홉 시! 출근해서 설마 하고 내려와 봤더니, 땀 뻘뻘 흘린 채로 차디찬 연습실에서 맨몸으로 자고 있을 줄이야!”
정신없이 몰아치는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상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벌써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민영 언니가 정말 걱정스러운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힘들어서 그래?”
언니의 손을 잡고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좋아서 그러느니라.”
“…잠 덜 깼니?”
“…아니에요.”
일단 이 말투부터 좀 어떻게 해야겠다.
언니의 손에 이끌려 연습실 문을 나섰다.
* * *
사흘 뒤.
정말 간만에 보는 사무실 안.
턱을 괴고 멍- 때리고 있자, 민영 언니가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좀 쉬었어? 그나저나 지난번에… 너 연습실에서 궐꽃 연습하고 있었지?”
“아.”
맞다, 나 그랬더랬지.
“아?”
언니가 나를 따라 하더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언니. 별다른 연락 없었어요?”
“어디서?”
“궐꽃…….”
민영 언니가 내 물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을 뗐다.
“새나야, 오디션 떨어지는 거 별일 맞는데, 또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니야. 너 이렇게 매번 멘탈 털려있으면 앞으로 배우 생활 어떻게 하려구?”
언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왜 연락이 오지 않지?
분명 보상이 캐스팅이라며?
그 개고생을 해서 퀘스트 완수했잖아?
책상을 주먹 쥐고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배우는 확정 났대요?”
내 물음에 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나라랑 서재연이 합세해서 저울질하면서 방송국에 개런티 엄청 불리고 있나 봐.”
“아….”
언니가 내 안색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참. 새벽이슬 광고 반응은 좀 보고 있어? 조회수도 장난 아니구, 광고주부터 시청자 반응까지 다 좋아.”
언니가 애써, 오디션에서 내 관심을 돌리려는 듯 회유책을 썼다.
“아.”
애써 끄집어낸 대답.
“아? 아?!”
언니가 옆에 있던 종이 뭉치를 둘둘 말아 이쪽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야, 너 정신 어따 놓고 왔어!”
“어허! 무엄하도다.”
“…?”
민영 언니가 휘두르던 팔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우리 다시는 사극 준비하지 말자.”
민영 언니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큼, 큼. 아이구, 자꾸 말이 헛나와…. 점심 사 올게요!”
그렇게 도망치듯 사무실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빵 가게로 향하는 길.
“뭐가 이렇게 불친절해.”
길가에 있는 돌을 툭툭 차댔다.
대본 속 시스템에 대해 항의를 마구 해대고 싶었다.
힌트도 없고, 사람 생고생하게 만들고, 감정은 쥐락펴락.
보상은 또 어떻게 받는 거람.
그나저나…
고개를 들어 새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대본 속 조선 땅에서 봤던 하늘이 생각났다.
이번 궐꽃은 정말 플랫슈즈와는 느낌이 여러모로 달랐다.
“플랫슈즈에서는 내가 알던 대로 다 흘러갔는데.”
물론 마지막에 본 유지안의 모습이 의외였고, 그 감정이 내 연기를 뒷받침해주었지만….
사건들은 모두 대본과 똑같았다.
차에 치이러 가기까지가 버거웠을 뿐이지.
이번에는 플랫슈즈와 달리 감을 잡기까지는 내내 동분서주하기 바빴다.
아직도 눈앞에 ‘보상 : 캐스팅’이라는 황금 글자가 어른거렸다.
“그래서 보상 언제 어떻게 줄 거냐구.”
힘이 쭉 빠졌다.
이거 사기 아니야?
게임이라고 치면, 보상 같은 건 저절로 받아지는 거 아니었나?
설마.
나 또 뭘 해야 되나?
워낙에 불친절한 시스템인지라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플랫슈즈 때는 전체적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보상도 저절로 따라왔고.
그렇다면 내내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궐꽃은.
혹시, 라는 생각과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재빠르게 방향을 틀어 사무실로 뛰기 시작했다.
“안 늦어야 하는데!”
한새나 이 바보!
왜 보상이 당연히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
이건 게임 같은 게 아니라고.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내가 먼저 제작진 측에 연락을 해야 했다.
서재연과 이나라 중 아직 그 누구도 낙점되지 않았지만, 내게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제3의 인물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뛰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연락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다짜고짜 연락해서 재고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무언가 필요했다.
내가 꼭 순임이가 되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갖춘 무언가.
* * *
쾅-!
사무실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들어갔다.
“깜짝아!”
앉아있던 민영 언니가 놀라 눈을 치켜떴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먹을 거 사 온다더니?”
“우리 배달해서 먹자.”
언니의 말에 재빠르게 대답하고 사무실 서재를 헤집기 시작했다.
“어머, 얘. 새나야, 왜 그래?”
대답 없이 한참 서재를 뒤지자, 끄트머리에 놓인 궐꽃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내가 읽지 못한 6화 이후의 대본.
언니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나야. 너 왜 이렇게 집착해. 너 떨어졌잖아, 응?”
그 말에 대본에서 눈을 떼고 언니를 바라봤다.
“그럼 언니는 이 대본 왜 안 버렸어요?”
“그야….”
민영 언니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우리 이거 미련이야.”
“난 미련은 아니에요.”
테이블 앞에 대본 뭉치를 들고 가 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먹을 것 좀 사올게.”
그렇게 언니가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대본 페이지를 넘겨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야.”
또 두세 장 넘기며.
“이거 아니잖아.”
내가 겪었던 것과는 다르잖아.
미간을 찌푸리며 읽어가는데, 최종 대본 2부가 없었다.
작가가 아직 집필 중인 건가.
서둘러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이면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분명, 내가 살았던 세계가 대본으로 읽은 것보다 훨씬 풍성했어.’
먼저, 대본과 내가 겪은 바가 무엇이 구체적으로 다른지 적어볼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상선.
대본 속에 상선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물렀던 곳에선 순임에 상선까지 더해져 왕의 감정선이 복잡했었다.
대비와의 최종 결전에서도 외부에서 왕의 편을 끌어들이는 과정이 현실적이었고.
현재 대본으로선 왕이 궁 사람들을 설득해 대비를 치는 그림으로 그려졌다.
이건 치밀하지 않아.
대본을 읽으면 읽을수록 실제 겪었던 세상보다 재미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눈코입이 보이질 않았다.
입체적이지가 않았다.
장면들도 개연성이 떨어지고.
이 문제들의 심장부엔 무엇이 있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세상을 이 대본에 입히려면…….
관자놀이를 짚고 한참 동안 대본을 노려보았다.
째깍째깍-
사무실 안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리고 곧.
“아.”
펜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실렸다.
내가 몸담았던 세상 속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감정이 동요했던 순간을.
이 장면이 아마, 내가 겪은 궐꽃 세상을 한 줄기로 관통하는 단 한 장면일 것이라고, 감히 확신했다.
사각사각.
종이에 글씨가 수 놓이는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펜을 놀리는 동안 다시 상선과 순임을 눈앞에서 만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 *
한산한 카페 앞.
“선생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마스크에 캡모자로 중무장한 내 모습을 보더니, 선생님이 슬쩍 웃으셨다.
“연예인이구먼. 부탁할 게 있다고?”
“네, 또 염치없이.”
“그래요. 이야기해보시지요.”
선생님이 장난스레 말씀하셨다.
“이거요.”
선생님께 준비해온 종이를 건넸다.
선생님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종이에 쓰인 글을 쭉 읽으셨다.
“이건…?”
“제가 직접 썼어요.”
“음?”
“선생님. 숏필름을 찍고 싶어요. 선생님께서 연기해주세요.”
“…?”
선생님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너, 이거 잘못 건드리면 감독이든 작가든 아주 불쾌해할 수 있다. 위험한 일이야.”
선생님이 걱정 한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내가 상업 영상 바닥 잘 모른다지만은 자존심 강한 작자들이야. 한 번 밉보이면 작품도 안 들어올지 몰라.”
“예, 압니다.”
“너는 대체….”
선생님이 기막히다는 표정을 하셨다.
“그래도 해보고 싶어요. ‘이 설정이 꼭 필요해요!’가 아니라… ‘만약 이런 장면이 있다면?’에서 출발한 생각이니까요.”
“그러니까 작가도 아닌 배우인 네가 왜? 월권이야.”
각오한 말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먼저 설득하지 못하면 제작진 앞에서는 택도 없으리란 생각 역시 하고 있었다.
“오디션 떨어진 배우의 마지막 발악입니다.”
선생님이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마지막 발악에는 엄청난 논리가 필요해요. 제가 이 작품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증거요. 그들에게 작품 속 세계와 인물에 대한 제 이해도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선생님과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정적이 가라앉았다.
“너.”
십 년도 더 지난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선생님이 입을 떼셨다.
“어쭙잖게 할 거면 손대지 마라.”
그 말에 씩 웃어 보였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슬쩍 미소를 지으셨다.
“그럼 먼저 일어나서 연습실 가서 이것저것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일어나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렇게 윤영재 혼자 남겨진 카페 안.
윤영재가 다시금 후배가 직접 써온 대본을 집어 들었다.
‘고작 주인공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려고 이 대본을 썼다고?’
“참 나. 거짓부렁은.”
윤영재의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엉큼한 놈.’
윤영재가 보기에, 누가 봐도 그런 단순한 용도의 대본이 아니었다.
게다가…
윤영재가 대사를 한 줄 한 줄 입에 담아봤다.
“대체 어떻게 이런 장면을 떠올렸을까? 작가도 아닌 놈이….”
그렇게 대본을 곱씹으며 좀 아까 내색하지 못한 놀라움을 표출했다.
‘이 정도면 도전할 가치가 있지.’
윤영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후배가 비우고 간 자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렸다.
“역시 난 놈이야.”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