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64)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64화(64/135)
-선유석 : 누나 뭐 한다면서요. 왜 저한테는 안 알려줘요!?
“어라.”
내 말에 모니터를 보던 민영 언니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유석이한테 연락이 왔네. 얜 누구한테 들었지?”
“은서 씨인가 그분한테 들은 거 아니야? 동창이라며.”
“아….”
둘이 생각보다 연락을 꽤 하나 보네.
어떻게 답장을 보내나 고민하는데 언니가 의견을 던졌다.
“그래, 선유석 나쁘지 않네.”
“유석이?”
“응. 연기 늘었다는 전제하에.”
메시지를 읽은 채 답장이 없자 선유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누나, 그냥 해본 소리예요. 부담 갖지 마요!
-…근데 언제부터 생각해둔 거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식 하나 못 알려주냐고.
-역시 그때 같이 회사 나간다고 우겼어야 했는데….
‘진정해’를 입력했다.
또다시 곧장 답이 왔다.
-누나, 저 그거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주면 안 돼요?
그 말에 진땀을 흘리며 다시 답장을 보냈다.
-야, 우리 사이에 웬 오디션. 됐어!
선유석을 선뜻 오케이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연기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연기력을 논하자면 꽃별이 역시 아직 부족한 단계다.
다만, 꽃별이는 차근차근 데뷔를 준비하는 입장으로, 영상에 얼굴을 비추는 게 하나의 경험이 될 터였다.
운이 좋아서 입소문이라도 타면 좋은 일로 이어지는 거고.
그러나 선유석의 경우는 다르다.
선유석은 배우 전문 대형 기획사에서 키우는 연습생이고, 오랫동안 시간을 들인 뒤 데뷔를 앞둔 입장이었다.
생짜 아마추어인 내 작품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비추는 게 오히려 들인 공에 비해 마이너스일 수 있었다.
오디션을 거절하는 데도 선유석이 재차 빽빽 우겨댔다.
-그럼 연기 얼마나 늘었는지만 봐준다는 느낌으로 허락해줘요.
머리가 지끈거려 홧김에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내버렸다.
내 표정을 본 언니가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웃었다.
두 시간 뒤.
“그쪽이 그랬죠. 믿음 같은 건 여기서 쥐약이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말해놓고서 날 믿으면 어떡해요.”
사내 연습실, 선유석이 처음 보는 살벌한 눈빛과 목소리로 마지막 대사를 쳤다.
“…….”
연습실에 정적이 흘렀다.
내 옆에서 선유석을 지켜보던 민영 언니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나 역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기본 상황만 인지시킨 채 진행한 즉흥연기였다.
언제, 어떻게 이렇게 연기가 늘었지?
선유석은 내가 짜둔 캐릭터에 순식간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어떤 연기를 해도 선해 보이기만 했는데.
유석이의 선량한 자아는 대본 속 캐릭터가 쉽게 깰 수 없을 만큼 크고 단단했는데 말이다.
선유석이 우리 둘 표정을 보고 정적 속에서 씩 웃었다.
“통했구나. 나 잘했죠, 그쵸?”
그러자 민영 언니가 놀란 표정을 지우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 바뀌었다는 트레이너 쌤이 아주 제법인가 보지?”
선유석이 섭섭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새나 누나는 저 어땠어요?”
그 질문에 잠시 망설였다.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같이 하고 싶다는 열의가 생길 정도로.
그러나 역시나 걸리는 것 한 가지.
“난 좋아. 단, 네가 회사 허락 얻어 올 수만 있으면.”
그러자 선유석이 ‘그런 것쯤이야’, 하는 얼굴로 답했다.
“사실 이미 허락받았어요.”
“뭐?!”
민영 언니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냥 혹시 몰라서 회사에 물어나 봤거든요. 이런 걸로 첫 작품 하면 어떻냐, 오디션 보고 싶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막무가내로 움직이긴 좀 그러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허락을 해줬을까…?”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선유석이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엔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누나들 이름 얘기하니까 갑자기 허락해 주더라고요.”
이 이야기를 듣고 민영 언니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나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저… 캐스팅된 거죠?”
* * *
그렇게 선유석을 캐스팅한 다음 날, 강남의 한 카페.
배우들을 속속들이 섭외하고, 우리 영화에 합류할 마지막 주자와 마주 앉아있었다.
원혜림 선배님.
“제가 그래서 이런 영상을 찍어보려고 하는데요.”
조급한 마음에 말이 빠른 속도로 나갔다.
호기롭게 일은 벌리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선배님이 꼭 필요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떨리는 마음으로 선배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사람을 처음 본 날엔 이렇게나 자주, 또 길게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어쩌다 또 이렇게 연이 닿았을까.
선배님은 잠깐 고민에 잠긴 듯 차를 홀짝이셨다.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런데 찻잔을 내려놓는 선배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부럽네.”
“…?”
깜짝 놀라 선배님을 쳐다봤다.
“난 너 나이 때 왜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살았을까? 좀 더 해보고 싶은 거 막 자유롭게 해볼걸.”
당황스러워 적당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작은 영상의 캐스팅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선배님 역시 대답 들을 생각으로 던진 말은 아니라는 듯 자기 이야기를 꺼내셨다.
“난 배우로 인정받는 데에만 늘 급급했거든. 집안도 내가 책임져야 하는 환경이라 웬만큼 이름 날릴 때까지도 심적으로 좀 허덕였달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
“늘 독하게, 바쁘게만 살았어. 그러니까 결혼도 못하고 이러고 있지 내가. 에휴.”
선배님이 장난스레 한숨을 내쉬셨다.
나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몇 마디 듣는데 주책스럽게도 마음이 조금 일렁였다.
꿈보다 현실을 좇아야 하는, 그래서 바쁜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사람은 나의 전생에서 늘 빛나 보이던 사람이었다.
어디서든 당당하고, 기세 좋게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중견배우.
사실 그 당당함을 유지하게 하는 데엔 악착같음이 깔려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너 보니까 참 예쁘다, 새나야. 네 젊음이 이렇게 예쁜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니?”
그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난 그저 우연히 특별한 기회를 얻은 사람인데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걸까.
적어도 내 생각엔 나의 젊음보다는 이 사람의 악착스러움이 더 아름답다.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애써 웃으며 선배님께 장난스레 답했다.
“선배님도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으신 것들 맘껏 하시면 되죠! 뭐, 예를 들면… 이진규 선배님처럼요.”
이진규라고 하면 수차례 영화 제작을 말아먹고 있는 코미디언 출신 배우였다.
영화계에서 거대한 마이너스의 손이라 불리는 인물.
그러자 선배님이 소리 내어 웃으셨다.
“그 선배도 대단하긴 해. 시원하게 말아먹어도 또 시도하잖아. 그래도 그 선배, 너처럼 젊을 때부터 연출한다고 나섰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거지. 갑자기 내가 이제 와서 연출하겠다고 나서면 ‘노욕 부린다, 꼰대가 후배들 동원해서 일 벌인다’ 따위 소리 듣기 십상일 거다.”
“어휴, 선배님. 자아 성찰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긴. 어쨌든 난 이번 생엔 살던 대로 살다 가야지 싶다. 그저 이번 기회에 한 번 네 패기에 숟가락 얹어 볼래.”
그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선배님!”
* * *
남해안의 외딴 섬.
뜨거운 햇빛이 낡은 선착장을 내리쬐고 있었다.
“이런 데를 잘도 골랐네!”
“진짜로 이틀에 한 번 배가 다닌대요. 저 조금 무서워요.”
저 멀리 원혜림 선배님을 필두로 배에서 내린 배우진들이 얼굴을 부치며 다가왔다.
나와 함께 미리 섬에 도착한 선배님이 배우 군단을 보고 조금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배우들도 다가오다,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희영 오빠!”
원혜림 선배님이 처음 보는 발랄한 얼굴로 뛰어와 장희영 선배님에게 덥석 안겼다.
“징그러워, 왜 이래!”
원혜림 선배님이 개의치 않고 장희영 선배님의 손을 잡았다.
“우리 몇 년 만이야, 응?”
그러자 장희영 선배님도 내심 반가운 듯 눈꼬리를 휘며 웃으셨다.
“가만 보자, 우리 그때 <내 품의 그대> 찍은 게 벌써 10년 됐지?”
“그러니까. 어떻게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냐구.”
활짝 웃던 원혜림 선배님이 의아한 얼굴로 날 돌아보셨다.
“아니 근데 새나는 희영 오빠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모든 배우의 시선이 쏠렸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이전에 윤영재 선생님 극단 연습실에서 연기 티칭 받았었거든요. 그때 잠깐 뵀었어요.”
“어머, 그랬구나. 근데 왜 이번엔 윤영재 선생님 안 모시고?”
원혜림 선배님이 장난스레 물어오자 이번엔 장희영 선배님이 답했다.
“내가 꿰찼어. 윤영재 선배님이 궐꽃 준비한다고 영상 찍을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배 아파.”
호쾌한 대답에 일동 웃음바다가 됐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해둔 펜션으로 걸어가는데 김은서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이 대본이 최종본이야?”
그 질문을 듣고 슬며시 웃었다.
왜 이 말이 안 나오나 했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유리 씨도 대본으로 살살 부채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나 씨, 스토리라인은 좋은데 내가 보기엔 대사가 좀 평이해.”
“바로 그거예요, 여러분.”
내 대답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꽃별이가 당황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
“제 대본은 대사보다 흐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대사는 일부러 평이하게 썼어요.”
그러자 재형 씨도 손을 들었다.
“일부러?”
“네. 이렇게 실력 있는 분들을 모셨는데 빡빡한 대본을 드리긴 아쉬웠거든요.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자유롭게 연기하시면 돼요.”
그러자 장희영 선배님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뭐, 애드리브 남발. 그런 건가?”
“그렇게 해석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 작품은 배우의 내공을 최대치로 이끌어내야 하거든요.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해서요.”
“아주 재미있는 작업물이 될 것 같네요!”
선유석이 긍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네. 배우들이 배우들을 위한 영화 하나쯤은 찍어봐도 좋잖아요?”
그리고 촬영 방식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펜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방 안에 설치되어있던 스탠드 카메라는 대사 치는 사람을 따라갈 메인 카메라이자 한 대뿐이었다.
그 외에는 상황에 따라 내가 직접 카메라를 잡고 배우들을 따라갈 예정이었다.
나머지 장면은 펜션의 방 모서리와 앞마당에 설치된 거치형의 저가 DSLR 여덟 대가 풀샷으로 잡을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대사는 대본 내용에서 벗어나지만 않게 마음껏 애드리브를 쳐도 된다.
설명을 들은 원혜림 선배님이 피식 웃으셨다.
“좋다. 그럼 난 이제부터.”
그리고 가방에서 준비해온 촌스러운 헤어 밴드를 꺼내셨다.
“영실이가 된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