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69)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69화(69/135)
“미쳤나 봐.”
입에서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장도겸이 날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그런데 옆에서 정채성이 똑같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맞네. 진짜 미쳤네요.”
“그렇네요….”
심지어는 관계자까지.
음악의 여운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5분가량 되는 음악을 들으며 영상을 찍던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떠올랐다.
심지어 앞으로 어떤 방향성으로 나가면 좋을지도.
내가 이럴 정도인데 아마 채성 씨는 지금쯤 머리가 팽팽 돌고 있겠지.
채성 씨가 장도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네?”
“아니, 20대처럼 보이는데 천재가 아니신가 하고….”
채성 씨의 말에 웃음이 풋 나왔다.
내 눈에는 채성 씨 역시 괴짜 천재처럼 보이는데, 이를 알 리가 만무했다.
장도겸이 이런 칭찬은 처음이라는 듯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다른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기획에 캐스팅에 OST까지, 새나 씨 등에 거의 저희가 업혀 가는 모양샌데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쨌든 영상 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본이니까요. 제가 넷메이트에게 가장 신뢰하는 점은 자본력이에요.”
채성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국 시장, 기대하시잖아요?”
그렇게 다들 한층 의욕이 샘솟는 표정으로 회의를 이어갔다.
* * *
“이게 참… 결이 같은 듯 다르면서도 묘하단 말이죠?”
여차저차 장도겸과 계약을 맺은 삼 주 후, 넷메이트 사무실.
채성 씨가 직접 써온 1, 2부 대본을 건넸다.
이미 어젯밤부터 메일로 전달받은 파일로 여러 번 읽은 참이었다.
“어떤 게 그렇단 거예요?”
채성 씨의 말이 애매하게 들려 되물었다.
그러자 채성 씨가 대본을 열며 처음 보는 깊은 눈빛으로 설명했다.
“새나 씨가 황보재준 감독님 작품에서 사생으로 나올 때 연예인에게 갖던 욕구와 집착. 그리고 이 섬에서 자살회원인 채 영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구와 집착. 이 두 가지는 같은 듯 완전히 다른 양상이에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채성 씨는 오리지널 영상에서 내 캐릭터가 그토록 영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심리에 개연을 부여하기 위해 설정을 하나 추가해왔다.
‘자살을 연구 주제로 잡은 사회심리학자.’
좀 더 집착적인 기질을 맘껏 표현해도 허용될 만한 설정이었다.
“그래서 새나 씨는 자살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살 카페에 가입한 뒤, 사건이 벌어지는 펜션으로 향하게 될 거예요.”
채성 씨의 설명을 듣자 머릿속으로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가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사생을 연기할 때와는 정말 다른 느낌의 결로 집착 욕구가 샘솟았다.
“그렇게 새나 씨가 섬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인물 전사로 드라마에 실을 예정이에요. 돈의 출처를 밝히기보다 캐릭터들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활짝 웃었다.
오리지널 영상에서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가장 아쉬운 부분이 인물 전사였다.
인물들이 섬에 모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며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부여하고 싶었지만, 말투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쳐야 했었는데.
이젠 걱정 없이 이야기를 펼쳐도 될 만한 자본과 훌륭한 이야기꾼이 붙었다.
“대본 읽어보니 다른 캐릭터들 전사도 다 재밌더라고요.”
내가 엄지를 척 들어 보이자 갑자기 채성 씨가 당황하며 평소의 어수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그래서 다 같이 인물 전사 촬영 먼저 따로 할 거예요.”
“로케이션은 다들 어디에요? 저 다른 사람들 섬에 오는 과정 다 보고 싶어요!”
잔뜩 흥분됐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바짝 다가가자 채성 씨가 부담스러운 듯 몸을 뒤로 쭉 뺐다.
그때 폰에 진동이 울렸다.
– 민영 언니 : 너 당분간 드레스 피팅 알지? 다른 스케줄 다 비워놨어.
아 맞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렇게 재미있는 기회를 드레스 피팅 때문에 날리다니.
시간이 언제 이렇게 쏜살같이 흘렀는지.
드라마 두 작품을 마쳤을 뿐인데 곧 NBS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급격히 식은 내 얼굴을 채성 씨가 쳐다봤다.
무슨 영문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에 답했다.
“곧 시상식이 있어서요.”
“…?”
“여배우들은 시상식 시즌이 전쟁이래요. 저도 이제 거기 용병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아….”
채성 씨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 타오세요. 우리 드라마 다들 많이 보게요.”
채성 씨가 엉성하게 주먹을 쥐어 내밀었다.
* * *
그렇게 온갖 드레스 피팅과 인물 들의 비하인드 촬영이 동시에 진행되던 중.
옷 몸살이 나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섬에 도착했다.
매니저 오빠가 옆에서 커다란 쇼핑백들을 한아름 들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으리으리한 대형 세트장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내 옆으로 내린 매니저 오빠가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이, 이게 뭐야. 섬이야, 나라야.”
그야말로 넷메이트의 포부가 돋보이는 펜션 세트장이었다.
작은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렇게 화면을 구성할 수 있구나….
새삼 자본의 위대함(?)을 실감하던 중, 멀리서 선유석과 스탭들이 다가왔다.
“누나! 촬영 잘 마쳤어요?”
“어, 너 은근 오랜만이다?”
“날이 추워지니까 여기 완전 을씨년스럽네요. 그건 뭐예요?”
선유석이 매니저 오빠가 든 쇼핑백에 관심을 보였다.
매니저 오빠가 묵묵히 쇼핑백에서 머플러 상자를 하나씩 꺼내 스탭들에게 건넸다.
모델을 맡은 친환경 의류 브랜드 가이아의 2015 S/S 신상이었다.
추운 겨울에 바닷바람 맞아가며 섬 촬영에 임할 스탭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우와, 새나 씨! 이거 선물이에요?”
“헐, 머플러 너무 예쁘다.”
“새나 씨가 모델 맡은 곳이구나! 여기 이번에 백화점에도 입점했죠?”
스탭 한 명이 명동 백화점에 걸린 내 화보를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화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나저나 새나 씨 다른 브랜드들도 문의 많이 왔을 텐데, 왜 가이아 맡으셨어요?”
악의 없는 솔직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친환경 브랜드 의미가 좋잖아요. 화려하고 예쁜 건 저 말고도 다른 여배우들께서 더 잘하시고요.”
“에이, 진짜 너무 겸손해!”
그 말에 겸연쩍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친환경 재질을 입고 바르는 게 좀 더 편하더라고요. 예쁘긴 똑같이 예쁜데.”
스탭들이 내 말에 웃으며 저마다 모여 인증샷을 찍기 시작했다.
“새나 씨 드라마 촬영장마다 소문 자자해요. 성격 너무 좋다고.”
머플러를 슥 두른 조명감독이 칭찬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엇, 감사해요. 브랜드 주변에 홍보 좀 해주세요!”
조명감독 등 뒤로 외치는데, 선유석이 날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이런 게 바로… 프로의 자세?”
그런 선유석에게도 머플러 상자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진짜 춥긴 춥네.”
나도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동여맸다.
그리고 거대한 펜션 앞에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를 쳐다봤다.
자본이 만든 곳에 이젠 자연까지 미장센을 첨가하고 있었다.
채성 씨 아주 신나 죽겠는걸.
그때 처음 보는 배우들도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왔다.
채성 씨가 대본에 추가한 두 명의 남자 캐릭터였다.
30대 중반 증권사 애널리스트 역할의 한현수, 부상으로 꿈을 잃은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남고생 역할의 안희찬.
한현수 배우 같은 경우에는 전생에도 지금도 크게 인상 깊은 작품을 남긴 배우는 아니었다.
다만 어느 작품에서든 꾸준히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였다.
성격 역시 연기력만큼 차분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꽃별이보다 한 살 많은 안희찬은 데뷔 3년 차로, 근래 들어 학교물 남자주인공 역을 모조리 꿰차고 있었다.
그야말로 청춘 라이징 스타.
“안녕하세요, 한현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안희찬입니다.”
두 사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나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선유석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다들 이번 기회에 친해지면 좋겠어요!”
그렇게 금방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꽃별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희찬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영운외고요?! 거기 전국에서 손꼽히는 학교 아니에요?”
“희찬이 너도 공부에 관심 있니?”
내 질문에 희찬이가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 공부 쪽은 완전 젬병이에요.”
그 말에 선유석이 하하하 웃었다.
“너 이따 꽃별이보다 긴장하면 안 된다?”
이렇게 다들 웃고 떠들며 긴장을 푸는 사이 현수 씨가 웃으며 자연스레 슥 자리를 떴다.
배역 몰입을 하기 위해 분위기를 잡는 듯 보였다.
역시 성실하구나, 저 사람.
그때 어디엔가 설치된 스피커에서 채성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배우분들 펜션 뒷마당으로 모여주세요.”
* * *
촬영이 시작된 지 두 시간 후, 모두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배우들 얼굴에 저마다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더불어 애꿎은 시나리오를 붙잡고 있는 채성 씨도 진땀을 흘렸다.
내 옆에 서 있던 유리 씨가 혼잣말했다.
“이거 감정 과잉이야.”
유리 씨의 시선은 모니터 속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향해 있었다.
나도 모니터 속에서 유리 씨가 연기하는 장소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장소영은 가족을 잃은 뒤 남자 친구에게만 의존하며 살다 그에게 전 재산을 털리고 이 섬에 들어왔다.
장소영은 모니터 속에서 생동감이 넘쳤다.
울며불며 여기저기서 힘든 감정을 맘껏 분출하고 있었다.
이제 곧 털고 일어날 사람처럼.
그런 장소영을 채성 씨 역시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유리 씨가 내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전사가 추가돼서 그런가. 인물 감정을 해석하는 데에 감독님이랑 자꾸 시차가 생기네. 장소영이 낯설어.”
그때 멀리 서 있던 장희영 선배님이 슬쩍 손을 들었다.
“감독님.”
채성 씨가 “네” 하며 선배님 있는 쪽을 돌아봤다.
“현수 씨가 규환이 역할로 들어오면서 제 캐릭터가 조금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그 캐릭터를 표현하려니까 자꾸 조금 애매해지네요…?”
그 옆에서 무언가 참고 있는 얼굴을 하던 원혜림 선배님도 입을 여셨다.
“감독님, 영실이가 안 보여요.”
모두의 시선이 원혜림 선배님 쪽으로 훅 쏠렸다.
“영실이 참 매력적이고 터프한 여잔데. 여기선 그 날것의 매력이 안 보이네요.”
선배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장 사람들의 시선이 채성 씨 등에 꽂혔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