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70)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70화(70/135)
추운 촬영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채성 씨가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적당한 대답을 찾고 있었다.
그런 채성 씨를 보며 홀로 침을 삼켰다.
채성 씨의 굳은 표정 아래 깔린 극도의 긴장감을 읽은 건 이 촬영장에서 나뿐인 것 같았다.
나름 몇 달간 드라마 한 편을 찍으며 동고동락한 사이여서 그런가.
채성 씨가 고민에 잠긴 채 콘티를 확인했다.
어차피 확인해봤자…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컷의 개수만 확인할 뿐일 텐데.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긴 정적이 흐른 후, 채성 씨가 결단을 내렸다.
“촬영 잠시 접겠습니다.”
스텝들 쪽에서 놀란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감독님, 이미 촬영 딜레이가 많이 됐는데요….”
조감독이 반대하는 얼굴로 채성 씨 앞을 막아섰다.
“제작사 쪽이랑 상의해서 촬영 일정 조율해볼게요. 우선은 해 질 때부터 저녁에 찍기로 한 씬들 먼저 찍읍시다.”
채성 씨가 스탭들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탭들이 전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채성 씨가 홀로 생각에 잠길 장소를 찾아서 멀어져갔다.
누군가 그 등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듣자 새삼 다시금 자각이 들었다.
맞다, 감독은 저런 자리였지, 하고.
특히 입봉작인 만큼 채성 씨의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울 터였다.
배우들 쪽을 보니 역시나 심란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신인인 김은서, 선유석 그리고 꽃별이는 눈치만 보며 뒤로 빠져 있었다.
이런 갈등은 어느 촬영장에서나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내가 회귀한 이래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배우들 안에는 지난 촬영과 관찰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이 만들어갔던 인물의 영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당시의 현장에 없던 채성 씨에겐 그 인물의 영혼이 보일 리 없었다.
채성 씨의 손에 대본이 넘어간 이상 인물은 새롭게 탄생하게 될 운명이었다.
두 개의 영혼을 가지게 된 인물들이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는 것이다.
‘배우들도 채성 씨도 그 인물들을 잘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 단지 그래서 생긴 문제야.’
유리 씨 말대로 시차가 문제였다.
이번 일만큼은 내가 해결책을 내어 나설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위험했다.
원작 연출자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는 게 채성 씨의 자리를 위협하며 감독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보일 수 있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고난 길이 될 수도 있겠는데….
* * *
섬에서 바라본 해는 짧았다.
어둠이 깔릴 무렵 다시 스텝들이 스탠바이 상태로 장비를 갖춰 들었다.
촬영장 분위기가 무겁고 조용했다.
조감독이 채성 씨를 찾으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그 조감독에게 다가갔다.
“조감독님, 제가 감독님 모셔와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눈치 빠른 조감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펜션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저 멀리 낚시 의자 하나를 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 채성 씨 모습이 보였다.
슬그머니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감독님!”
내 목소리에 채성 씨가 퍼뜩 정신이라도 든 듯 이쪽을 쳐다봤다.
커피를 건네며 씩 웃었다.
“섬 너무 춥네요.”
채성 씨가 답답한 듯 대답 없이 커피를 따고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문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배우랑 갈등이 생겼을 때 합의를 못 보겠으면 찍어누르거나 그냥 눌리라고.”
문 감독님?
오랜만에 듣는 플랫슈즈 감독님이었다.
“찍어누를 수 있는 감독은 경력직, 눌리는 감독은 초짜. 이 두 가지의 결과론만 존재하는 세계래요.”
엉터리 같으면서도 현실적인 가르침에 말문이 막혔다.
“근데 전 둘 다 못해요. 이런 건 어느 쪽인가요. 무능? 구제불능?”
채성 씨를 보며 속으로 입을 딱 벌렸다.
이 사람 제법… 굴삭기로 지하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잖아.
채성 씨의 소매를 살짝 잡아 흔들었다.
“단지 시차 문제에요.”
“알아요.”
채성 씨가 손에 쥐고 있던 인물표를 쳐다봤다.
“배우들의 해석에 맡기자니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성에 어울리지 않고. 제 해석대로 밀고 가자니 인물들이 인형 같네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과 일일이 인물 회의하기엔 시간도 모자라고요.”
그 말을 듣고 조심스레 물었다.
“진부한 이야긴데요. 배우들을 좀 더 믿어보는 건 어때요? 찍혀서 눌리라는 게 아니라요.”
내 말에 채성 씨가 되물었다.
“좀 더 자유로움을 부여해보라는 거죠?”
“네. 구체적으로는 애드리브도 받아보고, 감정이 격해지는 부분은 끊지 않고 길게 연결도 해보고요.”
“그쵸…. 그렇게 하다 보면 아무래도 경력이 많은 베테랑 배우들에겐 해결책이 있겠죠?”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파도가 섬에 밀려드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혹시 신인 배우들한테 먼저 시도해 보는 건 어떠세요?”
그러자 채성 씨가 조금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자유로움이란 게 그렇잖아요…. 아무래도 둘러싼 틀거지가 두껍지 않을 때 더 쉽게 나오니까요. 신인 배우들은 베테랑 배우들보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인물상이 덜 뚜렷할 거예요.”
신인 배우들의 능력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었다.
배움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이전 버전도 아니고 지금의 버전도 아닌 새로운 버전의 인물형을 지금 당장 찾아보라고 한다면 오히려 신인 배우들에게 부담감이 덜할 거예요. 어차피 처음이니까.”
채성 씨가 잡은 인물표가 바람에 날아갈 듯 펄럭였다.
잠시 생각하며 다음 말을 골랐다.
“베테랑 배우들은요, 인물에 대해서 감독만큼 알아요. 어쩌면 감독보다 더요. 그 인물의 존재감이 자기 안에서 너무나 뚜렷해져서 쉽사리 다르게 표현할 방향을 찾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신인은 할 수 있어요. 기술은 떨어질지언정.”
오래된 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였다.
채성 씨가 내 이야기를 듣고서 인물표를 들었다.
“나름 설득력 있는 이야긴데요….”
채성 씨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나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이 방법도 안 된다면 정말 오늘 마저 남은 촬영을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채성 씨가 인물표에 적힌 한 명 한 명 이름들을 훑었다.
자신과 함께 분위기를 뒤집을 수 있는 후보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 * *
잠시 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카메라 앞.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는 말 들어봤어요? 난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젊은 여배우가 열연을 펼쳤다.
“난요, 너무 평범해서 죽는 사람이에요. 내 자살엔 특이사항이 없다 이 말이에요. 오수생, 편순이, 학자금 대출, 생활비 대출, 부모님 암 투병, 장기연애 실패.”
안광을 지운 듯한 눈으로 채색 없이 연기를 이어가는 배우는 김은서였다.
김은서의 대사 사이사이를 썰렁한 바닷바람이 메웠다.
카메라 뒤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김은서를 바라봤다.
며칠 전 선유석을 바라봤을 때의 감각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카메라 앞에서 김은서와 나란히 앉아있던 선유석이 피식 웃었다.
“호구 같은 삶이네.”
“그렇지, 그거예요! 너무 평범한 것도 자살 사유가 된다니까. 왜? 내가 호구 같아서.”
김은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갑자기 김은서가 파도를 보며 웃긴 TV쇼라도 본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남들 다 이러고 산다니까요. 죄다 호구라는 뜻이지. 근데 난 이제 더 못하겠어요. 난 호구 중에서도 나약한 호구니까.”
선유석은 김은서가 지껄이는 말에 관심도 없다는 듯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선유석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껄렁한 태도였다.
그 불량함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갑자기 김은서가 화난 듯 선유석의 담배를 빼앗아 던졌다.
현장 스탭들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떠올랐다.
대본에 없는 액션이었다.
선유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은서를 쳐다봤다.
“미쳤냐?!”
“너도 내가 우스워?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우습니?”
김은서가 연기하는 김민경이 엄한 데에 분노를 터뜨렸다.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 그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은 열등감을 맘껏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 김은서가 시도하는 그 액션에선 어떤 계산도 보이지 않았다.
0.1초도 되지 않는 순간, 김은서의 본능이 새로운 영역의 감정으로 이끈 것이었다.
그러자 선유석도 열받은 듯 벌떡 일어나 걸진 쌍욕을 뱉어냈다.
“X발, 죽으려니까 별 미친년이 진짜.”
두 사람 모두 상식이나 예의, 섬 바깥에서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던 생활의 개연을 가뿐히 넘어섰다.
정말로 곧 죽을 사람들처럼.
죽기 전 마지막 발악들처럼 보였다.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 때문일까,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김은서가 센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정리하지 않은 채 카메라 밖으로 벗어났다.
“…컷.”
현장에 정적이 맴돌았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채성 씨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후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던 선배들, 오늘 처음 본 배우들의 표정도 사뭇 심각했다.
김은서가 동그래진 눈으로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보는데 그날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쁘다는 말, 지겨워. 아니, 이젠 그게 무서워. 얼굴 말고는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열심히 해서, 죽어라 연습해서 사람들한테 발연기 소리도 안 듣고. 얼굴만 필요한 배역 말고, 내가 원하는 필모도 쌓을 거야.’
‘그럼. 나중에 보자, 필드에서.’
마지막 약속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박수를 쳤다.
김은서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내가 손뼉을 치자 금세 사람들이 뒤따라 호응을 보냈다.
채성 씨도 일어서서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은서 씨, 유석 씨. 오케이에요.”
그러자 김은서가 놀란 듯 채성 씨를 바라봤다.
“제가 원한 민경이, 그리고 이전 버전에서의 민경이. 그 사이의 민경이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유석 씨의 윤우도요. 고마워요.”
두 신인 배우가 얼떨떨해하며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배우들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어디서 찾은 거야, 저 신인들은?”
스탭들이 조감독의 지휘에 다음 장면을 준비하며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새나 씨가 데려온 사람들이래. 같은 서원예대 출신.”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