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74)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74화(74/135)
미팅이라면 그 사람을 이야기하는 건가.
“심소현 씨?”
내 질문에 선유석이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 아, 민영 누나가 벌써?”
선유석이 자문자답했다.
심소현은 2년쯤 전에 허소진과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여배우였다.
그리고 민영 언니가 말했던 허소진에게 피해받은 여배우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얼핏 듣기로, 심소현은 이전까지 소속사 없이 활동하다가 최근 트루액터스에 영입됐다.
소속사 없이 활동했을 당시 허소진의 괴롭힘이 얼마나 심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허소진은 그저 자기보다 가능성 있어 보이는 여배우라면 닥치는 대로 텃세를 부리고 다닐 테니까.
계속해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선유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
아까부터 앞에서 왜 이러고 서 있는지 조금 감이 왔다.
말하는 자신마저 딱히 내키지 않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아마 자신의 의지로 하는 말이 아닐 수 있었다.
내가 선유석에게 말했다.
“얘기는 고마운데 도움 안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아. 이미 알다시피 민영 언니가 워낙에 발 빠르잖아.”
“네.”
“그리고 난 트루액터스 갈 생각 없어.”
덧붙인 내 말을 듣고 선유석이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트루액터스에서 선유석에게 선뜻 인더바주카포 영상에 참여하는 걸 허락해 줄 때부터 조금 이상했다.
그쪽에선 언젠가 나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꾸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런 틈을 노려서.
그리고 그 계획에 선유석이 지금 장기 말로 쓰이고 있었다.
그 점이 기분 나빴다.
선유석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불편한 대화를 주고받게끔 만든 소속사의 개입이.
트루액터스가 점점 탐탁지 않아졌다.
선유석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해요, 누나. 신경 쓰지 마요.”
지금 누가 누구더러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손을 뻗어 조금 높은 유석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마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그런 만큼 얘도 속상하겠지.
“뭘 죄송까지. 별일 아니잖아.”
“그래도요. 누나는 항상 저를 도와주기만 했는데. 저는 이런 식으로 폐나 끼치고.”
“폐는 무슨! 나랑 같이 작품도 찍어줬으면서.”
내 말을 들은 선유석이 고개를 더 푹 숙였다.
“근데 유석아, 내가 이번 일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거든?”
“네?”
“배우는 회사에 작품으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고, 회사는 배우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투자하는 곳이라는 거.”
“….”
“이 당연한 시스템을 난 이제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더라고. 배우는 배우고, 회사는 회사일 뿐이라는 거. 그러니까 너도 배우 역할만 해. 다른 거 하지 말고.”
선유석이 곧바로 알아들은 표정을 했다.
불어온 찬바람이 선유석의 앞머리를 휙 날렸다.
* * *
[신인 배우에 좌지우지? 일선 제작자들에 대한 모욕] [‘친목질 논란’ 받아친 ‘스타 기강 잡기’ 의혹… HBC 갑질 폭로 빗발쳐] [한새나 폭로한 H씨 ‘새싹 짓밟기’ 과거사 논란 역풍! 진짜 악마는 누구?] [해외 OTT 경계하는 국내 방송사, 자사 경쟁력부터 제고해야]민영 언니와 넷메이트, 관련한 주변 사람들의 반박이 시작됐다.
기사를 몇 개 읽지 못하고 폰을 집어넣었다.
나에게 쏟아지던 화살들은 조금씩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허소진과 HBC에게로.
– 원래 허소진은 관상부터 ㅋㅋ
– HBC 언젠가 일 터질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도 몇 명이나 들쑤시더니 잘 됐다.
– 넷메이트가 대체 뭔데? 시끄러워죽겠다. 노이즈마케팅이냐.
– 그래도 친분으로 드라마 만든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해야 된다.
– 친목질 대장 한새나vs이지매 대장 허소진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댓글들이 달렸다.
그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여론이란 게 대체 뭔지.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느껴졌다.
2010년대, 이 시기에 사람들이 이슈를 소비했던 방식과 그 의견이 획일화되어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상기됐다.
특히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가십거리에 있어서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네티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어느 한쪽을 욕하는 입장이었다.
누명이 아주 조금씩 벗겨지고는 있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새나 씨.”
그때 어느샌가 옆에 다가온 채성 씨가 말을 걸었다.
“기사 봤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채성 씨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저… 드라마 제작 과정을 다큐멘터리화 해볼까 해요.”
“네??”
채성 씨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 일도 일이지만, 이건 넷메이트의 첫 한국 오리지널 진출작이잖아요.”
“네.”
“다큐를 만들면 이 드라마 제작 과정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한테는 설득이 될 거고, 내용에 관심 있는 사람들한테는 홍보가 될 것 같아서요.”
“아…?”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였다.
사건이 터진 당일, 배우들 사이에서 열심히 상황 파악하며 메모해두던 채성 씨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였을까.
“배우 한새나의 단순 친목질이 아니라 오리지널리티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채성 씨 목소리가 단호했다.
다큐라니, 채성 씨다운 무해한 방어 전략이었다.
자체적으로 공식적인 영상을 내놓으면 아마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사그라들 것이었다.
말로 해명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백 번 확실할 듯했다.
그런데 채성 씨는 아직 할 말이 다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결말 부분을 좀 논의하고 싶어요.”
“어? 결말 부분은 이미 채성 씨가 원하는 방식대로 써두셨잖아요.”
“네, 그런데 원작자와 배우들의 좀 더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꾸려고요.”
그 말에 곧바로 걱정이 샘솟았다.
“그런데 지금 시기가… 제가 제작에 너무 많이 관여하는 모습처럼 보여서 문제가 됐는데….”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이미 촬영이 많이 진행된 시점에서 결말을 바꾸면 여러모로 스텝들이 힘들 것이었다.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이 새나 씨뿐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
“지금도 배우들의 빛나는 아이디어로 캐릭터들이 채워지고 있잖아요? 모두가 자신의 포지션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대체 채성 씨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냐고.
채성 씨 목소리를 듣는데 머릿속으로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고작 1년 전에 봤던, 쑥스럽게 머리 긁적이던 조연출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엔 자신과 한 배에 올라탄 팀원을 힘있게 이끄는 리더만 서 있을 뿐이다.
“채성 씨… 웅변 학원 다녔어요?”
* * *
몇 주 후.
“레디, 액션” 소리와 함께 최후의 3인이 카메라 앞에 둘러앉았다.
권재형이 두 여자를 보며 웃었다.
고지에 다다랐다는 듯한 유준호의 여유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한새나가 들고 있던 캠코더를 차분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지현도 지금 자신이 어느 고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유준호가 캠코더를 보며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칼을 꺼냈다.
그 칼끝은 먼저 성은채에게로 향했다.
성은채가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이지현이 테이블을 권재형 쪽으로 엎었다.
권재형이 뒤로 넘어질 때 이지현이 외쳤다.
“캠코더 잡아!”
그러자 성은채가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듯 곧장 캠코더를 집어 들었다.
유준호가 넘어지자마자 멀리 날아간 칼 앞으로 기어갔다.
이지현도 테이블을 넘어 빠르게 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준호가 이지현의 다리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칼을 향한 두 사람의 처절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성은채가 겁에 질린 얼굴로 캠코더를 들고 서 있었다.
난투 끝에 이지현이 먼저 칼을 잡았다.
이지현이 재빠르게 유준호의 위로 올라타 가슴 부근에 칼을 꽂았다.
펜션에 유준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 속에는 간간이 욕이 섞였다.
그 끔찍한 비명이 잦아들 때쯤 이지현이 옆으로 풀썩 내려앉았다.
괴로워하던 유준호를 잠시 보다가 성은채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리 줘.”
이지현이 성은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유준호가 자신의 가슴에서 칼을 빼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이지현의 등에 그 칼을 찔러넣었다.
“…!!!”
이지현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유준호는 자신이 할 소임을 다한 양,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고통스러워하던 이지현이 몸을 떨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성은채의 신발 앞코가 얼굴 앞에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성은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성은채의 무릎 앞에서, 이지현이 고개만 겨우 옆으로 틀어 엎드린 채 말했다.
“가져가. 꼭 세상에 보여….”
말을 끝내 마치지는 못했다.
펜션에 정적이 흘렀다.
성은채가 두 손으로 캠코더를 꽉 쥐었다.
그 누구보다 순수하게 진심으로 죽고 싶어 했던 열일곱 살 소녀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어 있었다.
창밖으로 저 멀리 동이 터 왔다.
* * *
“컷! 오케이!”
섬에 채성 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마지칵 컷이 끝나자, 작은 섬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유, 이 섬 정들었는데.”
“이 펜션 세트장 당분간 그냥 둔다던데요. 잘 되면 관광지로 쓴다고.”
“감기 걸린 사람들 육지 가서 수액부터 맞으세요.”
드디어 마지막의 마지막 촬영까지 끝나고, 스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감격의 포옹을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나 역시 묘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실감했다.
섬 주인과 상의 끝에 남겨두기로 했다는 펜션을 바라봤다.
이렇게 또 한 작품이 끝났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치 못한 전개로 채워진 촬영이었다.
겨울 바다처럼 속이 뻥 뚫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이래저래 탈이 많았던 만큼 끝마치는 감정도 복잡했다.
정말 끝난걸까.
갑자기 몸에 힘이 쫙 풀렸다.
몸살을 앓을 것만 같은 예감을 느끼며 차가운 손을 비볐다.
저 멀리 한구석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펜션을 바라보는 채성 씨가 보였다.
그 옆으로 다가갔다.
“감독님, 결말은 마음에 드세요?”
그러자 채성 씨가 날 보며 씩 웃었다.
“글쎄요….”
뒤에서 스텝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새나 씨, 빨리 와요! 단체 사진!”
채성 씨가 뒤돌아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는 말했다.
“난 최선을 다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돌아섰다.
스텝들 앞으로 뛰어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방금 채성 씨가 정답에 가까운 답을 했다고.
촬영을 마친 순간, 작품의 성공 여부는 이제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다만, 지금 여기 앞에 모여앉은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그뿐이었다.
“김치-!”
눈부신 플래시가 터졌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