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5)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85화(85/135)
그렇게 예정에 없던 주말 나들이가 전개됐다.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에이든 파렐을 가이드로 쓴 기묘한 투어.
이제 더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촬영하다 보면 구경 다닐 시간도 없을 테고.
에이든과 친분을 쌓아두면 뭐든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디즈니랜드라도 데려갈 줄 알았더니, 에이든이 끌고 온 곳은 산타모니카 해변이었다.
에이든이 차 시동을 껐다.
조금 멀미가 났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에이든은 내내 쉬지 않고 질문을 던져댔다.
데뷔는 언제 했는지, 한국 안에서만 활동했는지, 이 워크숍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주로 출연하는 시리즈나 방송국은 어딘지 등등.
최근에 시리즈 한 편을 찍었다고 답하자 에이든은 깜짝 놀라며 몇 년을 찍었냐고 묻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한 시리즈에 장기출연하는 배우가 많은지라, 시리즈에 대한 접근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 질문에 한국 시리즈는 미국과는 좀 다르다며 설명을 해주었다.
“우와, 바다다!”
뒷자리에 앉은 꽃별이가 신이 났다.
창문 너머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어쩐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을 열려던 에이든이 날 보고 물었다.
“새나, 어디 불편해요?”
“아뇨, 에이든… 파파라치라도 붙으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그런 건 그냥 파리들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에이든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게 바로 할리웃 배우…?
괜찮겠지?
꽃별이도 신나서 차를 박차고 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슬리퍼를 들고 해변가로 나왔다.
모래사장이 햇볕에 잔뜩 달궈져 있었다.
“앗, 뜨거워!!”
한가로운 해변, 에이든이 빈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땄다.
그리고는 티셔츠를 훌렁 벗고 거의 눕듯이 앉아 맥주를 마셨다.
“마실래요?”
나도 그 맥주를 받아들었다.
예상외로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원한 파도 소리만 귓가를 맑게 울릴 뿐.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묶었다.
“하, 좋다.”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에이든이 되물었다.
웃으며 대답했다.
“뭐라고요?”
“좋다고요. 쉬니까.”
바닷가에서 보내는 휴가는 처음이었다.
이 휴가를 낯선 외국 남자, 그것도 에이든 파렐이랑 즐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대본 속 세상에서 겪었던 감정과 오디션을 마치고 난 뒤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운 걱정거리들이 파도 소리와 함께 쓸려나가는 듯했다.
그날 오디션을 마치자마자 감독님이 건넨 제안에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고민하고 알려드려도 될까요?’
그런 나를 스탭들이 휘둥그레한 눈으로 쳐다봤었다.
민영 언니 역시 화들짝 놀랐고.
바람이 불어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에이든이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참, 아까 말한 시리즈는 어떤 작품이라고 했죠?”
내 고민을 컷해주는 건 고맙지만 왜 이렇게 흥미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넷메이트 한국 오리지널 첫 작품에 출연했어요. <무인도>라는 작품이에요.”
“오? 그랬군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보고 올게요.”
“아뇨, 제발. 안 그래도 돼요.”
그러자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꼭 볼 건데요.”
에이든의 대답에 결국 못 참고 물어보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나요?”
그러자 에이든이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친해지고 싶어요. 연기를 너무 잘해서.”
저 멀리까지 뛰어나간 꽃별이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쳤다.
“에이든! 들어와요!”
그러자 에이든이 벌떡 일어나 맥주를 한 번에 비우고는 달려나갔다.
꽃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단독) 이나라vs한새나! 워너스 오디션장 앞에서 대격돌]호텔 방 침대 위.
어제 새벽에 대서특필된 기사가 각종 한국 사이트의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뒤늦게 댓글들을 읽고 있었지만.
-짬밥 덜 찬 신인이랑 자꾸 맞붙는 이나라가 퇴물 된 거냐, 아님 한새나가 싸가지가 없는 거냐.
-완전 한새나 월드네. 초심 잃기 딱 좋은 타이밍이지 ㅋㅋ 잠깐이다 즐겨라~
-둘 중에 한 명은 무조건 붙는다는 보장이 있냐. 이런 걸로 호들갑 좀 떨지 마라.
군데군데 섞인 악플들은 빠르게 스킵했다.
흘려보내야 할 영양가 없는 참견들이었다.
그때 민영 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 보고 있어?
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네, 지금 막 보고 있어요.”
-어제 새벽 기사 아님 방금 막 뜬 기사?
“에?”
서둘러 새로고침을 눌렀다.
그러자 3분 전부터 새로 올라온 기사들이 주르륵 나열됐다.
[한새나, 할리우드행!? 워너스 히어로물 첫 한국인 배역 캐스팅 제안 받다] [이나라 어떡하나. 워너스 사로잡은 세기의 라이징 스타, 한새나!] [한새나가 맡게 될 히어로 전격분석]댓글들도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달렸다.
-와 한새나 뭐야? 캐스팅된 거야? 이건 진심으로 대단하다.
-우리 언니 이제 세계로 뻗어나간다. 글로벌 팬 또 잔뜩 늘어나겠어요.
-한새나 국가대표 됐네.
-미쳤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나라도 배 아파만 하지 말고 축하해줘라.
누워있던 몸을 확 일으켰다.
“아직 확정 아닌데?”
다급한 내 말에 민영 언니가 안다는 듯 ‘응’하고 대답했다.
-워너스니까. 캐스팅 제안받으면 당연히 출연할 줄 알 거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문이 턱 막혔다.
민영 언니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음은 정했어?
언니가 물었다.
그 질문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언니 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왜?
정말이지 이상했다.
여지껏 내 인생에 없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고 그걸 따냈다.
최종 오디션에 합격하자마자 내 눈앞에 앞으로 밝은 세계만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배역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런데.
“너무 좋아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데. 기분이 애매해요.”
-…?
이번에는 민영 언니가 갈피를 잡지 못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몇 년간 같은 이미지에 묶이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 걸까.
나조차 내 감정의 이유를 뚜렷하게 알 수가 없었다.
이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일주일, 아니 삼일만요.”
-그래, 알겠어.
언니가 더 묻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 * *
다음 날 오후, 유니버셜 스튜디오.
“미쳤어. 넌 천재야, 새나.”
에이든이 놀이기구를 타러 다니는 내내 칭찬을 퍼부었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호텔 방 안에서 내내 골머리만 썩는 걸 이번에도 에이든이 밖으로 빼내 주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며칠 동안 내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친구가 되어버렸다.
“다큐멘터리까지 앉은 자리에서 다 봤어. 통틀어서 내가 거의 열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니까, 믿겨져?”
그런데 에이든의 칭찬이 점점 과해졌다.
에이든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맙소사, 완전히 압도당했어. 넌 진짜 천재야.”
머리가 멍해졌다.
장차 이름 크게 날릴 할리우드 스타가 왜 좁은 나라 배우를 붙잡고 이러고 있는 거냐고.
“고마워, 에이든. 그렇지만 너야말로 내게 귀감이 되는 배우야.”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확장되자, 눈알이 튀어나와 바닥에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에이든, 눈 닫아. 무서워.”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럼 가볼까?”
애써 대화 흐름을 끊었다.
칭찬을 한마디라도 더 들었다가는 정말 민망해져 도망가고 싶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모든 걸 잊고 신나게 놀아 재끼고 싶었다.
에이든이 앞장서서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반나절을 넘게 에이든과 한을 풀 듯 쉴새 없이 놀이기구를 타러 돌아다녔다.
어느덧 해 질 무렵.
“와, 너무 재밌어!”
다리가 풀린 채 벤치에 겨우 앉자 에이든이 헛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와하하 웃었다.
“그러게 내가 스무디 그만 마시랬지. 우리 또 타러 가자!”
이전 삶에서 놀이 기구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솜사탕부터 핫도그, 각종 먹거리들을 실컷 먹어대는 것마저 즐거웠다.
사람 구경도 즐겁고.
간만에 겪는 즐거운 아드레날린이 내 몸을 구석구석 채웠다.
그런데 에이든은 옆에서 머리까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어라.
“괜찮아…?”
그러자 에이든이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듯 웃었다.
“가이드 괜히 해준다고 나댔어.”
그 말에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가자, 이제. 실컷 놀았어.”
“미안해, 아직 더 못 봤는데.”
“괜찮아. 오늘 너무 즐거웠어.”
에이든을 끌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에 대놓은 차에 탔다.
왠지 조수석에 타기 미안해지는데.
그렇다고 남의 나라에서 괜히 섣불리 운전하기도 좀 그렇고.
에이든이 걱정하는 내게 별일 아니라는 듯 안심시켜준 다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앉아있었다.
에이든이 날 보며 무언가 망설였다.
“저, 새나.”
“응?”
“사실 말할 게 있는데.”
갑자기 에이든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이런 말 실례일 줄은 아는데, 워너스에 캐스팅 제의받았다는 소식 들었어.”
“아…? 괜찮아. 기사까지 났는걸.”
좀 뜬금없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에이든의 표정이 계속 진지했다.
“사실 나도 거기 캐스팅 제의받았거든.”
“응???”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에이든을 쳐다봤다.
“무슨 역할로?”
이어지는 에이든의 답은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놀라웠다.
“블루 가더.”
“…….”
입을 딱 벌리고 에이든을 쳐다봤다.
블루 가더는 시나리오 안에서 메인 히어로는 아니지만 나름 중요한 분량들이 꽤 있는 역할이었다.
“매력 있는 캐릭터이긴 한데. 난 이제 히어로물 서사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상태야.”
에이든이 심경 고백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작품 참여를 망설이고 있었구나.
“그냥 너라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물어봤어.”
에이든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그래도 이런 대화 주제를 터놓을 상대를 찾다니.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쉽지가 않네. 워너스니까.”
“그치, 워너스는 워너스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상당했다.
게다가 나는 그 대본에 들어갔다 나오기까지 했다.
대본 속 세상마저 내게 기회를 주려는데, 그걸 너무 섣불리 거절하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만약 이 작품을 거절하면 대본에 빙의한 이유는 무엇일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둘 다 말없이 창밖만 보는데….
에이든이 정적을 깼다.
“사실 에이전시랑 상의하고 있는 다른 시나리오가 있어.”
“그래? 잘됐는데?”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도 조연이지만…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쪽의 조연이랄까.”
“무슨 작품인데?”
“레이먼드 장 감독이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 한국인 입양아 여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고, 난 그 남편 역할이야.”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