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is life, I will die as an actress, not a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5)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95화(95/135)
며칠 뒤.
[스노우폴, <홈타운>에 쏟아진 기립박수!] [<패뷸러스> 감독과 <홈타운> 감독의 다정한 악수! 그 사이에 있는 한새나] [<홈타운> 스노우폴 유력 수상 후보!]염상진 기자가 있는 삼연일보에서 짧은 기사들이 나갔다.
그 전에 고상한 기자가 있는 주성일보 쪽에서 <패뷸러스> 감독과의 의도적 퍼포먼스 의혹 기사를 내보냈었다.
그러자 염상진 기자가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곧이어 단독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올렸다.
‘이 작품은 한국인만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늘 아래 차별받는 모두를 위한 이야기죠.’
‘패뷸러스 감독님과는 서로 덕담을 나눴어요. 둘 다 온갖 기사와 가십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어요.’
‘에밀리는 슬프기만 한 여자가 아니에요. 씩씩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여자죠.’
‘벨라는 이제 제 분신이에요. 제 짧은 연기 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캐릭터였어요.’
‘새나 씨와 전략적으로 <홈타운>을 하기로 했던 게 아니에요. 그저 둘 다 이 작품이 좋았어요.’
잠시 망설이다 고상한 기자가 올린 기사의 댓글 창을 눌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성한 기자님. 고상하게 글 씁시다.
-이런 이간질 지겹다. 작품은 작품으로 보자.
-여기서 한새나 영어 못한다고 기사 썼었네. 웃기지도 않다.
-한국 신문이 한국을 까냐. <홈타운> 영화는 봤냐?
-이제야 기사다운 기사 좀 나오고 있는데 이 기자가 초치네.
처음으로 <홈타운>을 두둔하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새로운 반응들을 보며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나 지금 꿈이라도 꾸나.
워낙에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에 오래 시달린지라 이 상황이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곧바로 민영 언니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고 6시간 후 한국에서도 <홈타운>과 <마블러스>가 동시에 개봉했었다.
언니는 블록버스터와 맞붙은 것치고 기대 이상의 훌륭한 출발 성적을 기록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동안 여러모로 잡음은 많았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제법 산뜻했다.
<홈타운>의 영화제 수상이 유력하다는 후속 기사까지 따라붙자 루머나 가십거리들을 다룬 게시글과 기사들도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거 기대 이상인걸.’
시상식을 위해 영화제로 향하는 벤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쌩쌩 달리는 차 밖으로 드높은 건물들이 줄지어져 있었다.
어느새 이국적인 도시 풍경도 조금씩 눈에 익어가고 있었다.
건물들을 바라보는 눈이 뻑뻑했다.
손으로 비비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몇 시간 동안 공들여 받은 메이크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온 자리인데 겨우 이 정도로 피곤해할 수는 없지.’
스케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작품이 유력 수상 후보에 오르자, 현지 매체들과 연달아 만나는 라운드 인터뷰 일정도 빽빽하게 잡혀 있었다.
미국에 다시 날아온 이후부터 며칠 내내 세네 시간 이상 눈 붙이기도 힘들었다.
거기다 <홈타운> 식구들끼리 하루 두 편 이상 출품작을 보자며 매일같이 뭉치기까지.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줄곧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쏟아지는 관심이 기꺼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에 참여한 배우와 스탭진들을 만나는 일도 즐거웠다.
뒤에 앉아 졸고 있던 레이먼드 감독님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피곤하시죠?”
“새나 씨만 할까.”
감독님이 마른 세수를 하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샤엔 감독님 엄청 독특했지?”
“그러게요.”
샤엔 감독님은 이번 영화제에 또 다른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데, 업계에서 괴짜 중의 괴짜라고 유명했다.
어제 팀원들과 함께 영화 관람을 하고 나오던 중 우연히 마주쳤다.
샤엔 감독님은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나와 감독님에게 말했다.
‘두 분은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감독님과 내가 어리둥절한 채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서 있자 샤엔 감독님은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혼잣말하듯 말했다.
‘이번 영화 찍으면서 여배우랑 엄청 싸웠거든요. 혼나기도 혼났고. 총 안 맞은 게 다행이죠. 지난 작품에선 남자 배우한테 주먹으로 맞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이가 좋으신가요?’
그 말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이 광기 뭐지.
레이먼드 감독님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서로 존중하면 되죠.”
그러자 샤엔 감독님이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그 자리에서 폭소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감독님이 웃음을 멈추지 않자 살짝 뒷걸음질 쳤었다.
‘존중이라.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는 미신인 줄 알았는데.’
샤엔 감독님은 이후로도 10분 넘게 우릴 붙잡아뒀다.
‘실제로 한국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했나요?’
‘그나마 이 영화제가 제일 나아요. 다른 해외 영화제들은 죄다 쓰레기거든요. 백인들 잔치. 나도 물론 백인이지만요.’
‘턱시도 입고 영화제 참석하는 것도 너무 낡아빠진 문화 아닌가요. 다음에는 박스 뜯어서 입고 올까 봐요.’
감독님의 말에는 결국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등에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 감독님에게서 벗어나 눈을 돌리자마자 슬리퍼에 양복 바지를 입은 배우를 발견했었다.
뛰어난 연기력보다 패션 테러리스트로 더 유명한 배우였다.
실제로 보니 실례라는 것도 잊고 뚫어져라 보게 됐다.
정말이지 미국은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한국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지? 미국보다.”
옆에 앉아있던 에이든이 물었다.
“그런 것 같네.”
“와, 다 왔다!”
클로이의 말과 함께 벤이 영화제 레드카펫 앞에 멈춰 섰다.
“다들 가볼까.”
에이든을 선두로 다 같이 벤에서 내렸다.
눈앞이 순식간에 하얘지는 폭죽같은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레드카펫 위로 발을 올렸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후….
“제 자전적 이야기가 잘 전달될지 걱정이었는데, 이번에도 매우 훌륭한 배우들 덕분에 뜻을 이뤘습니다.”
레이먼드 감독님이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난 에이든, 클로이와 나란히 감독님 옆에 서 있었다.
우리 팀에게 심사위원 대상이 내려졌다.
뛸 듯이 기뻐하는 클로이와 손을 맞잡았다.
나 역시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동안 겪은 갖은 수모가 싹 씻겨나가는 기분까지 들었다.
외국에서 처음 경험하는 시상식, 트로피, 그리고 성공.
눈물이 핑 돌았다.
에이든이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날 보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럼 이 영화의 일등공신, 새나 씨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그때 레이먼드 감독님이 소감을 마치고 날 바라봤다.
모든 관객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날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다양한 국적이 보였다.
정말 낯설고 진귀한 경험.
떨리는 발걸음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출연 배우들 대표로 소감을 전달할 기회 주신 감독님과 동료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유색인종과 입양아라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의 이야깁니다. 그러면서도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죠.”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짧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 박수에 힘입어 말을 이었다.
“최근 스노우폴 영화제는 다양한 소외계층이 중심이 된 영화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홈타운>에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들과 관객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스노우폴을 통해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 역시 다양한 배역으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상식에 참여한 배우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상영관에 이어 두 번째였다.
꿈에서도 상상치 못한 반응에 잔뜩 놀라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 * *
수상 바로 다음 날.
“레오 토크쇼요?”
민영 언니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되물었다.
스노우폴 수상을 하자마자, 마덴 국제 영화제에서 비경쟁 부문으로 초청이 들어왔다.
비경쟁이긴 하지만,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 아닌데도 초청한 것이 이례적이었다.
보통의 영화제들은 작품들을 초청할 때 자신의 영화제에서 개봉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우린 이미 스노우폴에서 개봉을 했는데도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잔뜩 좋아진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두 군데서 섭외까지 들어왔다.
나와 클로이에게 보낸 러브콜 하나, 감독님과 에이든 그리고 나에게 보낸 러브콜 또 하나.
감독님을 함께 초대한 레오 쇼는 밤늦게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쇼인지라 클로이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나저나 클로이와 단둘이 나가는 토크쇼가 영 껄적지근했다.
에비게일 쇼.
에비게일이라는 캐나다 출신 여성이 진행하는 토크쇼였는데, 이 사람은 겉으로 늘 관대한 척했지만 실제로 엄청난 차별주의자였던 게 밝혀진 적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전생의 기억 중 한 조각.
지금의 시점에서 에비게일은 한층 상승가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흠… 잠깐 고민해볼게요, 언니.”
민영 언니와의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왜 에이든은 부르지 않았지?
보통의 인터뷰나 토크쇼라면 배우들 전부 초대하고 싶어할 텐데.
왠지 에이든만 쏙 빼고 나와 클로이만 부른 것부터 좀 이상했다.
이걸 어떻게 한담.
무턱대고 거절하자니, 잔뜩 주목받기 시작한 클로이와 클로이 회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에비게일의 차별주의적 태도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예술 영화 업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홈타운>을 널리 홍보할 기회가 필요했다.
‘일단은 나갈 수밖에 없나.’
골똘히 생각해도 달리 괜찮은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겠지, 설마.
대놓고 뭐라 하기야 하겠어.
너무 앞선 걱정일 수도 있다.
* * *
일주일 후, 문제의 토크쇼.
수많은 카메라와 방청객이 대기하고 있는 생방송 스튜디오.
스튜디오 뒤편에서 클로이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스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비게일 도착!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스탭들이 순식간에 경직된 표정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
살벌한 분위기 속, 클로이가 잔뜩 놀라 주위를 살폈다.
나 역시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클로이의 손을 잡았다.
그때 복도 끝에서 문이 열리고 에비게일이 등장했다.
이번 생은 악녀 말고 배우로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