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109
111.크로우라이트 (3)
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모닥불의 현자 글라이온이 남긴 한마디.
그것을 들은 아리엣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칠흑기사단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올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이 단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이야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단장과 대면하게 해주는 것은, 아리엣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황한 아리엣은 글라이온을 바라보며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그건 곤란하겠는걸.”
“단장이 저를 보고싶어하지 않습니까?”
“단장과 만나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단장이 승낙해야만······!”
단장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단장의 승낙을 받아야만 한다.
아리엣이 그러한 내용을 말하려던 순간.
품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아리엣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 “아리엣. 거울을 꺼내라.”
“······단장?”
그런 아리엣의 이야기를 끊은 것은, 글라이온이 만나기를 요청한 단장쪽에서였다.
단장은 거울을 통해 아리엣에게 전언을 전하고 있었다.
단장 역시 플레이아데스의 수괴로 보이는 저 마법사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게 분명해보였다.
“당신들의 단장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군요.”
“······.”
“문제가 없다면 그의 뜻대로 진행해주었으면 합니다.”
단장이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면, 아리엣이 그걸 막을만한 이유는 없었다.
단장의 의중은 임무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리엣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도, 단장쪽에서 해결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았어, 단장.”
체념한 아리엣은 품속에서 거울을 꺼내들었다.
거울의 능력을 이용해 축소시켰던 그것을, 단장과 제대로 대면할 수 있는 크기까지 부풀려서 끌어안았다.
공명하는 한쌍의 거울을 통해 단장과 글라이온을 대면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거울의 반사면이 글라이온과 마주하는 듯한 모습이 되자, 그제서야 거울에서 단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랜만이군. 글라이온.”
“역시, 당신이었군요. 분명 그럴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글라이온과 대면한 단장의 입에서는, 아리엣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칠흑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 플레이아데스의 수괴와 알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알고지낸 것처럼 보이는 듯한 어투였다.
흑마법사와 단장.
두 사람의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아리엣으로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짐작조차도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단장. 애석하게도 이름을 잊어버려서, 오랜 친우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게 한이군요.”
–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이 세상에는··· 당신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는 물건따위는 존재하지 않더군요. 구전으로 전해져오던 내용조차도, 이미 완전히 말소되어 사라지고 말았을겁니다.”
로브를 뒤집어쓴 글라이온의 입에서, 단장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글라이온의 이야기를 듣던 아리엣의 귀가 쫑긋거렸다.
단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녀로서도 흔치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름을 제외하고도 생각보다 많은 대가를 지불한 모양입니다. 라이젠더그의 공명거울··· 그런 도구를 통해서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을 보면······.”
– “말투가 많이 바뀌었군.”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 “······.”
“마족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찾아온 세상입니다. 한때는 대륙의 일각을 지배하던 밤의 일족조차도, 변방의 군도로 쫓겨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밤의 일족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아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허나, 금세 마음을 다잡고서 단장과 글라이온의 대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꽈악-.
거울을 붙잡은 아리엣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 하나가 바뀌기엔 충분한 시간이겠지요. 물론, 당신만큼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
“아로니아가 지금의 당신을 마주하더라도, 그게 당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겁니다. 추악함을 받아들여 여지껏 목숨을 부지해온 저와는 다르군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글라이온의 입가는, 더 이상 웃음기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닥불의 현자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대화가 가벼운 인사였다고 한다면, 진정한 대화는 지금부터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났지.”
“예.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 “지독하게도 긴 시간이군. 젊은 현자는 진작에 사라져버리고, 눈앞에 보이는건 금기를 범하는 영락한 마법사뿐이니.”
그러한 이야기의 시작을 끊은 것은 단장이었다.
마주하고 있는 오랜 친우를 질탄하는 듯한 한마디.
날이 선 이야기를 들은 글라이온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단장을 향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길을 걷고 있는 모양이군요. 지금의 칠흑기사단이, 그날의 당신이 말하던 유일한 방법입니까?”
– “그래. 이것이 내가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습니까. 당신다운 무모한 방법이군요.”
– “내 손으로 바깥세계의 존재들을 직접 죽여나가겠다. 그러니 방해하지——.”
“알고 있었습니다. 칠흑기사단이 위신들과 맞서싸우려고 한다는 것쯤은.”
진중한 눈빛의 글라이온이, 거울속에 비친 단장의 모습을 세심하게 훑었다.
“단지, 제가 당신의 방법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계를 위협하는 위신들을 전부 도륙하겠다는게, 당신과 칠흑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겠죠.”
– “그걸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는건가.”
“무모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상주의자나 이야기할법한 해답이죠. 그러한 방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거라고 생각합니까.”
휘이잉-.
싸늘한 바람이 제단 아래에 몰아치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글라이온의 후드가 뒤로 젖혀졌다.
한계까지 눌러쓰고 있던 후드의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입가와 눈을 제외한 전부를 붕대로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붕대의 사이에 드러나는 미세한 틈새에는 선명한 실자국이 드러나고 있었다.
– “······글라이온.”
“당신과의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저는 그동안 수많은 고민을 거듭해왔습니다.”
“어떤 것이 대륙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인가. 현자라는 이름을 짊어졌음에도, 막상 거대한 문제를 마주하고 나니 백치가 되어버린 기분이더군요.”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이 부질없는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 현자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가.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에는,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연이 들어있었다.
– “글라이온, 너는······.”
“추악한 모습이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이 되었기에, 비로소 다른 이들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겁니다.”
붕대에 뒤덮힌 괴물이 씁쓸함을 머금은 채 손을 들어올렸다.
마법사의 오른손에 들려있는건 낡아떨어진 지팡이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사용해왔는지 모를, 한계에 다다라 바스라지기 직전의 지팡이.
그것을 들어올린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나무에 매달려있던 사도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저는 더 이상 인간의 운명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게 설령, 가장 찬란한 빛을 표방하는 신격과, 가장 짙은 어둠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 “그렇게 해서 선택한 정답이 바깥세계의 신격을 불러오는 방법인건가?”
“이건 단순히 실험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목표는 그 다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 “글라이온. 나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우와 싸우고 싶지 않다.”
“친우라··· 우리가 우정을 표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글라이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거울속에서 흘러나오던 단장의 음성이 완전히 멈추었다.
소리없는 적막.
사방에 가라앉은 묵직한 침묵속에서, 오로지 글라이온만이 단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계의 이치를 벗어난 듯한 초연한 눈빛.
그 속에서 마법사들의 결사를 이끄는 플레이아데스의 수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르니아의 유해를 마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순간부터, 이미 저는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 * * * * *
“성역선포—— 만개하는 그림자 정원.”
무감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오의 주변에서, 엄청난 밀도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시야가 닿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은, 그림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모습이었다.
일찍이 알데어가 전승했던 파계의 색채를 넘어서는 듯한 풍경.
제 색채를 잃어버린 세계속에서 알데어가 묵직한 감탄을 토해내었다.
“이건··· 그림자의 마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군.”
끝을 모르고 확산하는 묵빛의 색채.
넘실거리는 그림자의 위에서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나온다.
붓을 이용해 먹을 칠하듯이 뻗어나간 흑색의 궤적위로, 세심하게 피어오르는 칠흑의 꽃.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그림자를 이용해 빚어낸 하나의 정원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만개한 그림자의 꽃들 사이에서 검을 뽑아든 이오가 알데어를 노려보았다.
그런 이오의 귀에서는 자수정 귀고리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성역이라··· 바깥세계의 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것을 모방한게냐?”
“······알데어.”
“못보던 사이에 재미있는 기술을 배웠구나. 그래, 그렇지 않으면 상대하는 의미가 없을테지.”
성역선포.
위대한 신격의 영지가 재현되는 광경을 목도한 알데어가, 그에 맞추어 자신의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알데어의 오른손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기이한 표식이 오른팔을 타고 올라오는 모습이었다.
카각, 카가가각-.
단단한 무언가가 마찰하며 만들어내는 굵직하고도 선명한 소음.
이오의 오드아이가 변화하기 시작한 알데어의 팔을 눈에 담았다.
“그건······.”
“언제까지 제자리에서 답보해서야 면을 세우기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 노부도 말년에 추레한 선택을 하고야 만게다.”
카가가가각-.
오른팔에서 시작된 두터운 갑각이, 얼굴을 제외한 알데어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한다.
인간의 육신이 아닌 무언가로 서서히 변해가는 알데어의 육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광경에, 이오는 알데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이미 몇차례의 임무를 거쳐온 이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이었다.
—위신(僞神).
알데어 크로우라이트는 지금 바깥세계의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온 것이었다.
“그런 짓을 해서라도 강해지고 싶었던거야?”
“크로우라이트의··· 아니, 아니지. 이오 크로우라이트. 무학이란 수단일뿐이다. 그 자체로 본연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건······.”
“처음부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게야. 목표를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다면, 무력에 담겨있는 정통성같은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테지.”
무인으로서의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알데어 크로우라이트는 괴물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이오의 앞에 마주선 알데어의 모습은 그러한 선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우우우우웅-.
갑각에 뒤덮힌 알데어의 주변에서 그림자의 파동이 터져나왔다.
알데어의 그림자는 자신을 압박해오는 이오의 그림자를 계속해서 밀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림자를 사용하는건 어렵겠군.”
이오가 이곳에 선포한 성역의 힘은, 업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림자의 통제권을 강탈한다.
이미 한차례 위신과의 전투를 통해 그 사실을 체감했던 이오였다.
알데어가 성역의 압박을 간신히 밀어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보이다가 끝났을지도 모르겠구나.”
“······.”
“끌끌··· 무학의 길에 먼저 들어선 선배로서, 수치를 당하는 꼴을 간신히 면한건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터뜨린 알데어의 모습에, 이오는 손에 움켜쥐고 있던 그림자의 대검을 들어올렸다.
콰악-.
지면을 밟은 이오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검을 휘두르는 검객의 형상으로 순식간에 변모하였다.
분화한 채로 검을 휘두르는 궤적.
알데어가 가르쳤던 그림자의 제어는, 진작에 그를 넘어서 통달의 영역에 들어서있었다.
“——팔중섬격.”
정원을 뒤덮은 그림자의 장막속에 숨어있던 검객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검을 휘둘렀다.
카앙-! 캉! 캉! 캉! 캉! 캉!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이 만들어내는 칠흑의 궤적이, 알데어의 주먹과 충돌하며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림자의 통제권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알데어의 주먹만큼은 아직 그에게 남아있었다.
단단하게 경화된 알데어의 주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격을 전부 막아내었다.
일찍이 제국의 기사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무투가의 권각술.
알데어의 양손이 그려나가는 유려한 궤적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벽을 넘었구나. 대부분의 무인에게는 마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을, 그 나이에 이미 넘어서고 만게냐.”
이오의 공격을 방어해낸 알데어의 양손이 다시금 현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공격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오가 다시금 다른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쪽이 더 강해.”
파스스슷-!
검은 아지랑이를 휘감은 이오의 눈이 이제는 자신이 넘어서야할 스승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