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113
115.NO NAME (3)
지직, 지지직——.
검을 내려꽂은 시야가 왜곡되면서, 이질적인 풍경이 눈앞에 자리잡았다.
짙은 어둠.
광활한 칠흑의 단면이 드러나고 있는 거대한 바다의 표면.
그곳에서 거대한 무언가의 형상이 보이고 있었다.
거미.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그것은, 거미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별이었다.
– “필멸자여——.”
아니다.
그것은 별같은게 아니었다.
별보다도 더 찬란한 무언가가 그 육신을 움직여 나를 바라보았다.
—불문율(不文律), 엘렌토리스.
천령(天領)의 거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체를 깨우치게 만드는 존재가, 신화에 이른 일신을 움직이며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마치 제 호기심을 자극한 미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말이다.
– “백염이—— 제 운명을 감당치 못하고 영멸에 이르렀으니.”
영혼마저 떨리게 만드는 의지가 공간을 장악하며 퍼져나간다.
눈앞에 보이는 위신의 실체가 내 안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내가 베어낸 괴물이 가지고 있던 신의 편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 이것은 편린이었다.
백염을 지배하는 거미, 아트라스크를 제 위상에 올려놓은 힘의 일부에 불과했다.
– “이는—— 내 의사와 배격하는 바.”
다른 신격들의 위에 오롯이 존재하는, 무자비한 칠흑의 제후.
살아숨쉬는 인간의 생애마저도, 모래알과 같이 취급하는 이형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다.
위신.
세계의 위에 군림하는 신화.
단지 일말의 편린에서 흘러들어오는 의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엘렌토리스의 의지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엘렌토리스의 의지는 모든 종류의 방어를 관통해서 나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의 세계를 뛰어넘는, 신의 이야기는 나를 향한 경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 “그 업이—— 네 육신을 짓누르리라.”
우주의 저편에서 나를 응시하던 거미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
순식간에 흐려졌던 시야가 되돌아왔다.
하아, 하-.
방금 전까지 신격을 마주하던 눈동자가, 지금은 거칠게 떨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짧은 만남.
찰나의 접촉에 불과한 대화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누구와 싸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엘렌토리스의 집행자.’
백염을 지배하는 거미, 아트라스크.
그는 위대한 신격마저도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거대한 무언가를 섬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주했던 그 ‘무언가’는, 엘렌토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별의 거미는, 제 권속이 대륙에 소환되어 소멸한 상황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칠흑기사단의 토벌행위뿐만이 아니라, 닻을 내리고 지상에 묶여버린 그 상황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글라이온 역시 엘렌토리스를 자극하기 위해 이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이지만 글라이온이 벌인 기행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장, 괜찮아?”
“······성역이 무너지고 있어.”
한순간 마주했던 풍경에 대한 감상을 새기고 있던 정신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마주하고서 순식간에 깨어났다.
이오와 아리엣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어느새 무너져버린 제단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봉인석을 바라보았다.
위신, 아트라스크는 이미 내 검에 의해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트라스크의 존재를 고정하는데 쓰인 봉인석 뿐이었다.
봉인석을 회수했으니 내가 해야할 일은 전부 끝났을 터.
더 이상 시간이 지체되기전에 알레테이아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이오, 아리엣. 서포터와 함께 봉인석을 회수해라. 먼저 알레테이아에 돌아가겠다.”
“글라이온은? 이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은거야?”
“이미 위신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을거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단장의 육신을 직접 움직인 이상, 글라이온을 쫓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알레테이아에 복귀하는게 우선이었다.
이오와 아리엣을 향해 짧은 명령을 내린 직후,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겨 알레테이아로 향했다.
터벅, 터벅-.
칠흑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을 알레테이아로 향해 걸어나가는 내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돌아가면 정리해야하는 생각들이 잔뜩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글라이온.’
오래전에 함께했던 동료는 나에게 무수한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이미 현실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고는 해도, 그 역사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숙제가 될 것이다.
단숨에 풀어나갈 수 없는, 아주 기나긴 시간을 요구하는 숙제였다.
* * * * * *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성적표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 칠흑기사단의 성적표는, 굉장히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편이었다.
0점.
그것이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성적표에 기재된 성적이었다.
“······어차피 못받는거긴 한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굉장히 아깝긴 하네.”
내가 직접 개입해 [신화 임무]를 클리어하고, [드림 커넥터]를 종료해 현실에 돌아온 직후.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에 떠오르는 임무의 정산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칠흑기사단에게 있어서 성적표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정산창은 애석하게도 굉장히 신랄한 비판을 전하고 있었다.
임무의 기여에 따른 포인트 정산.
해당 영역에서 이번 임무에 참여한 모든 참가자들에게 0점이라는 성적표를 들이밀어온 것이다.
– 기사단원 [이오(EX)], [아리엣(EX)]이 [신화 : ■■■■■의 집행자, ‘아트라스크’ 토벌] 임무를 클리어했습니다.
–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운명석 1000개가 추가로 지급되었습니다.
– [신화 임무]의 클리어에 따른 [운명개화 포인트]가 다음과 같이 정산되었습니다.
– 이오(EX+) : + 0
– 아리엣(EX+) : + 0
– Unknown(Unknown) : – 1,750,000
이오와 아리엣. 0점.
그리고 그 아래에 Unknown이라고 적혀있는 누군가의 점수가 마이너스 175만점.
얼핏 보기에는 버그인가 싶은 이 점수는, 화면의 우측 상단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어있는 모습이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이너스 운명석.
내가 쌓은 업에 해당하는 그것이, 이전보다 175만이나 더 깎여나가버린 것이다.
“업이 육신을 짓누른다라··· 이런 의미였나?”
그것을 마주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엘렌토리스가 나에게 전했던 경고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내 행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운명석의 대량삭감이라면, 엘렌토리스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칠흑기사단의 기사들이 쌓아올린 운명이 양수를 띄고 있다면, 내가 쌓아올린 업은 음수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짊어져야 하는 음수의 크기가 늘어난 것이다.
업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절대값이지만, 그 역할이 서로 다른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좀 아깝긴하네. 175만이면 65만짜리 기사 둘을 만들고도 남는 값인데.”
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스마트폰의 정산창을 터치했다.
툭-.
화면을 터치하자 이번에는 그 다음에 해당하는 보상이 출력되었다.
비록 포인트는 정산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행히 이번 임무에는 그 이외에도 다른 보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염을 지배하는 거미, 아트라스크가 가지고 있던 불꽃의 성역.
내가 녀석을 죽인 것으로, 변화된 성역과 관련된 특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 칠흑기사단이 [백염을 지배하는 거미 : 아트라스크(Unknown)]를 토벌했습니다!
– 신화적인 존재를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신규 특성 를 획득했습니다.
– 하나의 기사단원을 지정해 해당 특성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획득한 성역의 이름은 .
아트라스크가 사용하던 성역을 생각해보면, 녀석처럼 백염과 관련된 효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는 단원들 중 하나와 공유할 수 있는 특성이었다.
백염의 성역을 누구에게 공유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테지만, 나는 특성에 대한 고민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다음은··· 역사의 분기점 보상인가.”
아직 임무에 대한 보상이 추가로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성역을 단원에게 공유하는 것보다도, 지금의 나에게 있어 우선순위에 놓여있는 사항이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
과거의 내가 밟았던 행적을 쫓아가는 과정이 아직 남아있었다.
– WARNING! 해당 [신화 임무]가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을 발생시켰습니다.
–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함에 따라 [분기점 탐색]에 새로운 기억이 추가되었습니다.
–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함에 따라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의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알레테이아 서포터]가 [VER.4]로 진화했습니다.
– [알레테이아 서포터]가 한층 진화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맹약을 이행합니다.
– 보다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해집니다.
이번에 역사의 분기점을 달성함에 따라 획득한 보상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 해당 분기점에 대한 과거의 기억.
둘. 알레테이아의 기능 강화에 따른 서포터의 진화.
전자에 대해서는 [분기점 탐색] 기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직관적이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맹약을 이행한다.
나는 서포터에게 존재하는 그 ‘맹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맹약에 대해서는 본인한테 물어보는게 빠르겠지.’
서포터가 순순히 대답을 돌려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모르는게 있을 때에는,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있던 미니 곰돌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스마트폰을 조작해 기사단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일까.
미니 곰돌이는 멍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포터.”
– 끄덕.
“네가 이행해야한다는 맹약이 뭐지?”
– ······.
내 이야기를 듣던 미니 곰돌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아래로 시선을 내려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툭.
곰돌이의 손이 내 손아귀에 쥐어진 스마트폰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맹약이라고?”
– 절레. 절레.
“그럼 대체······.”
내가 미니 곰돌이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자, 이번에는 미니 곰돌이가 주변에 있던 볼펜 한자루를 들어올렸다.
한자루에 천원도 하지 않는 싸구려 볼펜이었다.
녀석은 그것을 들어 스마트폰 화면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미니 곰돌이가 볼펜으로 가리킨 것.
그것은 [분기점 탐색] 기능을 실행하기 위한 아이콘이었다.
“아.”
나는 그제서야 미니 곰돌이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기억을 열람할 것.
그것이, 서포터가 나에게 전하는 메세지였다.
* * * * * *
무법도시 아팔라흐트.
제국의 국경까지 제 육신을 옮겨 피신한 마법사, 글라이온이 깨져버린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제단의 풍경을 보이고 있었을 수정구가, 이제는 완전히 파괴되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트라스크와 칠흑기사단의 단장이 벌이던 전투의 여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일련의 전투는, 글라이온에게 있어서 실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글라이온이 계속해서 그에 대해 되새겼을 정도로 말이다.
“커헉, 커흐으······.”
허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글라이온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파괴된 수정구를 바라보며 구토를 하고 있었다.
백염을 지배하는 거미, 아트라스크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제국의 국경부근까지 이동한 글라이온의 속이 진탕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전이마법 하나만으로 글라이온이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쪽에 있었다.
위신.
아트라스크의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잠시동안 글라이온을 직시한 까닭이었다.
“커윽··· 크흐, 으으으윽······!”
‘그것’은 글라이온이 닻을 이용해 불러낸 신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라고 해도, 신격의 시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글라이온이 일찍이 인간의 육신을 탈피한 괴물이 되지 못했더라면, 방금 전의 시선만으로도 반쯤 미쳐버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웩, 우웨엑-.
내장마저 게워낼 기세로 바닥을 기어다니던 글라이온의 손이,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서 자리에 멈춰섰다.
“크흐, 흐흐흑······.”
비명과도 같던 글라이온의 신음소리가, 갑작스럽게 탐욕에 젖은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초월적인 격을 이룬 존재와 마주한 여파는 적지않았지만, 그로 인해서 글라이온이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존재하고 있었다.
드디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기회로 글라이온은 자신이 갈망하던 염원에 닿을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다.
그가 태초부터 갈망하던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위신이 닻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또한 단장의 존재를 통해 그는 무언가를 검증해내는데 성공했다.
“크흐으··· 신을···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진실된 신을 만들 수 있다······!”
콰릉-!
탐욕어린 목소리를 내뱉던 글라이온의 머리 위에, 시퍼런 낙뢰가 떨어져내리는 모습이었다.
모독적인 발언을 들은 ‘가장 찬란한 빛’이 그에게 내리는 천벌이었다.
허나, 글라이온의 육신에 어려있던 위신의 힘이 신의 천벌을 가로막았다.
치이이이익-.
짙은 연기에 휩싸이던 글라이온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장. 당신이 틀렸어.”
자리에서 일어난 글라이온의 주변에는, 무수한 숫자의 눈동자들이 떠올라있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