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121
124.칠흑의 방랑자 (1)
기억이란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은, 잃어버렸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분기점 탐색].이 기능은 오래전의 나를 비추는 거울과 다를게 없는 것이었다.
“슬슬 확인해볼때가 됐나.”
나와 미니 곰돌이만이 남아있는 자취방.
그곳에서 나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내 무릎위에서 보내던 미니 곰돌이었지만, 지금은 싱크대에서 제육덮밥의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기억을 확인하러간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곰돌이가 충분히 대처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 볼 기억은······.”
혹시나 이번에도 아르니아에 대한 기억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화면속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상당히 괴로운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져온 현실을 외면할수는 없었기에.
나는 [분기점 탐색] 메뉴에 떠오른 기억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 분기점 탐색 ]– 열람가능한 기억
– x02. 안데르크 산맥 (완료)
– x07. 바렌도트 평원
– x13. 레벤디어스 대협곡 (완료)
– x14. 사도 아르니아의 영묘 (완료)
– x20. 알레스바흐 신전 (완료)
– x22. 안식의 낙원 (완료)
– 열람하기 / 닫기
이번에 열람할 기억의 이름은 [x07. 바렌도트 평원].
지금까지의 칠흑기사단이 해결해왔던 임무와는 관련이 없는 지명이었다.
오래된 일이니만큼 지명이 변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벌어졌던 일인지도 모른다.
앞쪽에 해당하는 번호인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동료들과 관련된 기억일 가능성이 커보였다.
새로 마주한 기억의 이름을 바라보던 나는, 설거지를 하던 서포터를 향해 이야기를 전했다.
“서포터.”
– 끄덕.
“내가 없는동안 문제가 생기면 부탁해.”
– 끄덕. 끄덕.
서포터는 내 명령을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커다란 문제는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알레테이아 서포터는 언제나 내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후우-.
짧은 심호흡을 마친 나는 화면속의 기억을 터치했다.
– [07. 바렌도트 평원]을 선택했습니다.
– 역사의 분기점 속에 숨겨져있던 기억의 파편을 열람합니다.
툭.
화면을 터치하던 손가락이 오랜 기억속의 이름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화면을 바라보던 내 의식이 점점 수면아래로 가라앉는다.
털썩-.
스마트폰의 화면을 응시하던 내 의식이 끊어진 직후.
깊은 어둠이 나를 반겨주었다.
* * * * * *
용사일행.
세간에서는 이제 이름없는 용병과 그의 무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활의 대부분은 길바닥에서의 야영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름없는 용병을 포함한 그의 동료들은 저마다 돌아가며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고는 했다.
이름없는 용병과 글라이온이 물을 뜨기 위해 냇가를 찾아간 것 역시 그 일환이었다.
야영지에 부족한 식수를 구하기 위한 행동.
물론 힘이 부족한 마법사를 대신해 대부분의 물통을 나르는 것은 용병의 몫이었다.
“······글라이온. 정말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건가?”
다만, 야영지에 돌아가는 두사람의 발걸음은 평소보다도 조금 더 느린 편이었다.
오늘은 페더가드의 현자, 글라이온과 동료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말이다.
교단의 지원을 받아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가해야하는 아르니아나 용병과는 다르게, 글라이온의 경우에는 지독한 전장에 발을 내딛을 이유는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의 인정에 기댈 방법 뿐.
그리고 그마저도 글라이온이 거부했으니, 이제는 정말 글라이온과 이별해야할 때가 찾아온 것이었다.
“■■. 나는 자네가 가진 이상을 존중하고 있어. 또, 자네라면 무조건 그 꿈에 닿을거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
물통을 쥐고서 이름없는 용병을 바라보던 글라이온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전하는 글라이온의 표정은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시원해보이는 얼굴이었다.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속에 쌓아놓은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한 행동.
진정한 동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을 짓던 글라이온을 향해, 이름없는 용병이 아쉬움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떠나려는거지?”
“허나, 누군가는 그것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야만 할테니까.”
오랜 동료와의 이별을 선언한 글라이온이 내뱉은 헤어짐의 이유.
그것은 이름없는 용병이나 겁없는 성직자가 애써 눈을 돌리고 있던,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결말에 대한 이야기였다.
실낙원을 돌파해 마신을 토벌하는 것은, 신마대전을 이끄는 교단이 그토록 갈망하는 염원이다.
그러나, 글라이온은 그 모든 염원이 부정당했을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르니아는 가끔씩 간단한 길조차도 잃어버리고는 하지. 자네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테고.”
“······.”
“그러니 길을 헤매던 용사가 정답을 찾지 못했을때. 그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줄 현자가 필요하지 않겠나?”
용사는 완전무결하지않다.
그러니, 그런 용사가 실패했을때.
그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길을, 글라이온이 직접 찾아나서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름없는 용병이 복잡한 얼굴로 이야기를 전하는 글라이온을 응시하면, 글라이온은 지팡이를 든 채 양팔을 활짝 벌렸다.
“글라이온, 그건······.”
글라이온이 살던 페더가드의 근처에서, 이 동작은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족으로부터의 자유.
위신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자유.
무수한 뜻을 가진 상징을 당당하게 내보이며, 글라이온이 용병의 앞에서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 나는 언제까지고 이 세계를,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신들의 손에 맡겨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러니, 이제부터 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야.”
“너도 나 못지않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군.”
피식-.
장엄한 이야기를 듣던 이름없는 용병이 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동질감.
젊은 현자의 당당한 선언은 그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쉬운 길은 아니지. 실패할지도 모르고.”
“그래. 어느쪽이든 쉬운 길은 아닐테지.”
“그렇지만, ■■. 비록, 이 갈망이 염원에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휘익-.
가볍게 휘저은 마법사의 지팡이가 사방에 따스한 빛을 퍼뜨렸다.
전신을 뒤덮은 따스한 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마법사가 남긴 빛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경이로운 현상을 가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이상에 도달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나?”
“······글라이온.”
“설령 내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자네가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테지.”
찬란한 빛속에서 그는 숙연한 표정으로 용병에게 이야기했다.
글라이온.
페더가드의 주민들은 그를 현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많지 않는 나이에도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모든 이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 나는 우리 모두가 성공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오직 한곳만을 바라보는 이름없는 용병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동안 같은 길을 바라보았음에도, 여전히 용병은 글라이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으로 영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용병은 글라이온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니 우선은 자네가 나를,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들을 미래로 데려다주길 기원하도록 하지.”
어둠이 내려앉은 세계에도 여명을 갈망하는 이들은 있다.
이름없는 용병도 그러했으며, 또 글라이온 역시 그러했다.
하늘에서 내리던 따스한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즈음.
글라이온은 오랜 친우에게 건네는, 단 둘만의 작별인사를 건넸다.
“자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이상적인 미래로 말이야.”
용병을 바라보는 현자의 뒷편.
그곳에서는 흐릿한 눈동자의 형상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 * * * * *
가라앉았던 의식이 되돌아온 직후.
익숙한 자취방의 풍경을 마주한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비어있던 폐부에 공기가 가득차는 감각이었다.
부족한 산소를 갈구하듯이 들이마시는 숨결.
밀려들어오는 공기를 만끽하던 내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허억······!”
숨을 토해내는 내 눈앞에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작은 곰돌이 인형이 서있었다.
그것은, 아르니아는 나를 약하게 두드리며,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아르니아를 마주한 채, 그녀와의 여정이 이어지던 어느날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 ······.
평원.
마법사.
하늘을 가득채우던 빛무리.
작별을 고하는 현자.
그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꿈을 나누며, 그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글라이온.”
꿈을 꾸었다.
지독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는 꿈.
어둠으로 가득찬 세계를 빛으로 밝혀나가고자 갈망하던 시대의 꿈.
오래 전의 꿈에서는 잊어버렸던 동료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오래 전의 꿈에서는 잊어버렸던 ■■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오래 전의 꿈에서는 잊어버렸던 눈동자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너는, 분명, 그곳에서······.”
– “떠올리지 마셈.”
툭-.
뭉툭한 갈색손이 내 시야를 가렸다.
편안한 감각속에서 다시 한 번 의식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윽.
힘이 풀린 머리가 뒤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전해져왔다.
– “살아있는 위신의 모습을 떠올리는건 위험한 행동임.”
익숙한 목소리.
잊지 못할만큼 아름다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깊은 잠으로 이끌었다.
* * * * * *
어둠으로 가득차있는 별의 바다.
그 한가운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빛을 머금은 화려한 날개.
날개를 닮아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형상은 인간을 닮아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인간의 범주로 표현될 수 없는 미형을 가지고 있었다.
페어리.
대륙의 인간들이라면 그러한 이름으로 불렀을만한 존재는, 일찍이 신격을 얻어 스스로의 성역을 일구어낸 존재였다.
– “슬슬 장벽이 거두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셀레스.
칠흑의 방랑자라고 불리는 이 신격은 원래부터 대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이나 어둠, 혹은 눈동자와 같은 이들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한발을 내딛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그녀의 존재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장벽은 내부의 관측조차도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대륙에 관심을 거두고 있던 셀레스였지만, 최근 들어서 장벽이 거두어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그곳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눈동자의 권속이 토벌당한 이후, 그가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권속이 토벌되어서 그런가, 눈동자도 더 이상 욕심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네.”
펄럭-.
우아하게 날개를 펄럭이던 셀레스가 주변에 있던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으며 이야기했다.
셀레스가 앉은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인간을 닮은 몸에 양의 머리를 달고 있는, 괴물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
그는 셀레스가 만들어낸 성역의 부속물, 아담이었다.
– “이렇게되면 내가 직접 닻을 내려보는 것도 괜찮겠어. 안그래, 아담?”
“그 말씀이 맞습니다.
셀레스의 질문에 아담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아담뿐만이 아니었다.
용의 머리를 매달고 있는 사람의 형상.
돼지의 머리를 매달고 있는 사람의 형상.
무수한 숫자의 괴물들이 전부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공상의 낙원, ‘요정여왕의 유원지’에 속한 이들이었다.
– “그래. 지금이라면 눈동자도 나를 주시하지 않을테니까 말이야.”
그들은 일찍이 칠흑의 바다를 유영하던 괴물들이었지만, 하나같이 셀레스의 손에 걸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이었다.
결국은 그녀의 성역에 귀속된 채, 인간의 흉내를 내며 셀레스의 괴팍한 취미에 어울려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유원지의 관리자.
오직 셀레스만이 여유로운 이 거대한 낙원에서, 그들은 접대부의 역할을 하며 매번 셀레스의 장난에 골탕을 먹어야했다.
그녀는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은 칠흑의 바다를 지나가는 괴물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무수한 괴물들이 그녀의 장난에 당해 유원지에 붙잡힌지 오래였다.
그중에는 유원지의 관리자가 되어 그들의 동료가 된 이들도 있었으며, 몇몇 불행한 녀석들은 짖궂은 장난에 걸려 놀잇감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뒤에서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애꾸눈 용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 “좋아. 결정했어.”
툭, 툭-.
작고 가벼운 손으로 아담의 어깨를 두드리던 셀레스가, 손에 들려있던 자그마한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짧은 시간 고민하던 그녀의 무지개빛 눈동자는 이제 거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차있는 모습이었다.
– “아담. 일단은 유원지를 장벽과 가까운곳으로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순진한 녀석을 하나 꼬드겨서 닻을 내리게 만드는거야. 어때, 완벽하지?”
“완벽합니다. 역시 셀레스님 다우신 혜안입니다.”
셀레스의 야심찬 계획.
대륙에 직접 닻을 내린다는 계획에, 이내 모든 관리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기립박수를 치는 관리자들의 앞에서, 장난기가득한 신격은 우쭐한 표정으로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보이는 셀레스의 모습에 관리자들의 박수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
그런 그들의 뒤에서는, 애꾸눈 용이 한쪽밖에 남지않은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