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157
158.아스트리움 (3)
아스트리움에서 황제와 대면한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그동안 아스트리움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황제는 황성의 격리를 풀고 복구를 위한 인력을 차출했으며, 우수한 마법사들이 직접 나서서 제도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칠흑기사단의 마법사들 역시 제도의 복구에 손을 거들었으며, 그 결과 아스트리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칠흑기사단에 대한 미담이 도는 모양이었다.
제국에서 칠흑기사단에 내걸었던 현상금 역시 풀렸으니, 단원들로부터 많은 보고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분간은 이곳을 사용하시면 될겁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 꼽아보자면, 단언컨데 아스트리움 한가운데 생긴 칠흑기사단의 새로운 거점이었다.
칠흑기사단이 아스트리움의 수복작업에 개입하면서, 우리로서는 아스트리움에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 제도에 위치한 칠흑기사단의 거점이었다.
거점이라기보다는 은신처라는 말이 더 어울려보이는 이곳은, 일찍이 제국중앙정보국의 국장이었던 아드레인의 도움이 더해져 완성된 곳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레테이아에 비하면 무척이나 낙후된 시설이었다.
아스트리움에 마련된 기사단의 시설을 둘러보던 나는, 이 시설을 주선해준 아드레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제국측의 인사가 개입했는데, 은신처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은 칠흑기사단을 뒤쫓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제가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아드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시가를 불안하게 만지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중년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
그것은 황제와의 대면이 끝나고 이루어진 아드레인과의 독대가 원인이었다.
내가 황성에 잠입해 화려하게 일을 마친 이후.
아드레인쪽에서 먼저 나에게 접촉해왔던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아드레인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었다.
‘칠흑기사단의 비호를 받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시더라도 다 해내겠습니다.’
사실상 기사단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아드레인의 요청에,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국측에 우리쪽의 사람을 심어놓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제국측의 정보를 교란시키거나, 의도적으로 정보를 가로채고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나를 바라보던 아드레인의 눈빛은, 나로 하여금 의미심장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드레인.”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내 시선이 다시금 아드레인에게로 향했다.
짧은 정적.
나와 아드레인 사이에 가라앉은 정적을 깨며,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아드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단장님.”
“제국을 포기하고 칠흑기사단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아스트리움에 은신처를 마련해준 아드레인을 향해서, 그가 제국을 배신하여 나에게 붙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배신의 동기.
그가 진정으로 칠흑기사단의 비호를 받고자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아드레인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아드레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칠흑기사단이 제도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습니다.”
“베르딜라를 토벌하던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는 모양이군.”
“단장님의 무용에 대해서는 이미 플레니아에서의 일을 알기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칠흑기사단이 바깥세계의 존재들··· 위신을 토벌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혼돈을 삼키는 용, 베르딜라.
그는 칠흑기사단이 제도를 장악하던 용과 맞서싸운 전투를 이야기했다.
세페이드가 온갖 고생을 해가며 용을 묶어놓고는, 끝내 자신의 손으로 그 목숨을 끊어놓았던 그날의 일을 말이다.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아드레인의 손은 옅은 떨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국이 멸망하는 날이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았구나. 그때의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운이 좋았군.”
“예. 운이 좋았죠. 폐허가 된 제도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다보니, 문득 깨닫게되고 말더군요. 이러한 격변이 전세계를 뒤덮게 되었을때, 제국의 힘으로는 결코 저 괴물들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제국의 힘으로는 결코 바깥세계의 괴물들에게 대항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어렵지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칠흑기사단이 인간을 초월한 무력으로 괴물을 토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또 하나의 진실을 이해했습니다.”
“어떤 진실이었지?”
“칠흑기사단··· 그 이름이 기사단을 표방하는 이유는, 분명 그 무력을 행사할 이유가 필요한 까닭이겠죠.”
망가진 제도에서도 가능한 귀중한 물건들을 그러모아 만들어낸 거점.
그것들을 자신의 뒤에 두고서, 더할나위없이 묵직한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쳐있는 아드레인의 얼굴에서도 그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빛을 쫓는 이들의 눈빛.
그는 아득히 오래전에 내가 보았던 영웅에 대한 찬사를, 그 눈에 담으며 나를 향해 이야기를 전했다.
“저러한 괴물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칠흑기사단의 본질적인 목표가 아닙니까?”
“······글쎄. 아드레인,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예.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인류를 지키는 기사단에게, 더할나위없이 어울리는 장소를 마련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신처가······.”
“권위를 잃고 추락해가던 제국의 한 관리가, 인류의 구원자들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노력입니다.”
드넓은 지하시설.
그것을 앞에 둔 아드레인이 떨리는 손으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힘으로 제국을 지켜주십시오.”
* * * * *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에 위치한 기사단장실.
아스트리움에서의 복잡한 일정들을 완전히 끝마친 나는, 기사단장실에 홀로 남아서 그곳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단장의 운명을 보여주는 수정구.
벽에 걸린 채로 하나씩 별을 새겨나가는 원판.
내가 지상에 머무를 수 있는 잔여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
그 모든 것들이 이전과는 아득히 달라진 수치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
내가 짊어지고 있는 업의 크기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닻을 내린 지역에 한해서는 아무런 시간제약없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
더군다나 이제 원판에 비어있는 별의 갯수도 고작해야 열개 남짓밖에 남지않은 상황.
조금만 더 봉인석을 모은다면, 아르니아에게 내려진 저주도 온전히 풀어낼 수 있을 터였다.
이제는 정말 얼마남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으며, 나는 원판의 너머에 존재하는 아르니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니아.”
반투명한 유리의 너머에 보이는 짙은 갈색머리의 아르니아를 응시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머리에는 여전히 짐승의 귀가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신을 배신한 사도로서, 벌을 받고 영락해 짐승의 탈을 뒤집어쓰게 된 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 잘못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않았다.”
과거의 잘못을 더듬어가며, 그 과오를 정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아르니아를 잃어버리고, 그녀를 마신의 사도로 만들었으며, 끝내 그녀에게 천벌이 내려지게 했다.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들은 언제까지고 과거의 동료를 옭아매며, 글라이온 역시 그릇된 길로 이끌리고 말았다.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고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의 손으로 거짓된 신들을 베어, 스스로 그 미래를 열어나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오직 그것만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있었다.
“모두를 위한 영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스윽-.
유리를 타고 미끄러지는 손바닥이, 머나먼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갔다.
닿지 않는 손길.
그럼에도 그 순간이 얼마 남지않았음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너를 위한 기사가 되겠다는 약속만큼은 잊지 않겠다.”
거짓을 벤다.
거짓을 삼킨 신을 벤다.
인류를 억압하는 운명을 벤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도달점은 아직도 멀고, 이 여정의 끝에 정해진 결말은 없을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빛을 동경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리도록, 아르니아.”
툭-.
짧게 유리벽을 두드리던 손이, 다시금 아르니아에게서 멀어졌다.
그 다음은, 평소와 마찬가지의 짧은 선언이었다.
“내가 곧 거기에서 꺼내줄테니.”
* * * * * *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이라······.”
제국 동부.
아스라이트 공국의 접경지역.
그곳에서 당대의 용사 알칸디오는 상념에 젖은 얼굴로 제 동료를 바라보았다.
—성 아렌시아.
알칸디오의 오랜 동료이자 이제는 교단에 얼마 남지않은 성인은, 그를 향해 칠흑기사단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수복과 재건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국에서 해주겠다는 모양이에요. 잘된일이네요, 용사님!”
“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된건지······.”
“대륙 전체가 위험한 상황이잖아요? 제국의 황제조차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게 아닐까요?”
성 아렌시아의 이야기에 알칸디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제국과 교단사이에 벌어졌던 정치적인 분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물며 제한없는 지원같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전할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제국은 교리보다도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국이 이런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없었다.
국경을 걸어잠그지 않는 시점에서 단장이 모종의 방법으로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성 아렌시아.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단장이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군요.”
“단장이 직접 말인가요······?”
“그만한 거물이 움직이는게 아니라면 꿈쩍하지 않는게 제국의 황실입니다. 직접 무력시위라도 벌여서 황제의 협조를 얻어낸 모양입니다.”
단장이 직접 나서서 무력시위를 벌였을 것이다.
그런 알칸디오의 예상에 성 아렌시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 용사님, 너무 과격한 생각인 것 같은데요······.”
“백색마탑을 점거하고 마도서와 봉인석을 탈취했으며, 제국의 국경수비대를 무너뜨렸던 칠흑기사단입니다. 당연히 무력시위쪽이 더 일관성이 있을겁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보는 편이 더 합당하겠죠.”
알칸디오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제국의 지원에 대해서는 반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국이 직접 나서서 병력을 지원하고, 물자를 보급한다는 것을 구태여 말릴 이유는 없었다.
제국의 지원은 신성교단을 포함한 그 주변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틀림없이 도움이 될 터였다.
당장 알칸디오 자신만 하더라도 자금과 물자의 수급에 애를 먹고있지 않던가.
탈환병력을 구성하기 위해 교단의 지부를 쥐어짜내는 일에도 결국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성도방향의 성역들을 철거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겁니다.”
“······.”
“물론 그 전에 여기부터 돌파할 필요가 있겠지만······.”
지원에 대해 논하던 알칸디오의 시선이, 어느덧 검게 물들어버린 하늘로 향했다.
알칸디오의 눈앞에 보이는 지역은 그와 동료들이 찾아낸 교단의 성소였다.
일찍이 봉인석을 보관하던 곳이 장악당해서, 바깥세계의 존재들이 지상에 뿌리를 내려 성역을 선포한 것이다.
다만, 지상을 침식하는 성역의 모습은 그가 여태까지 마주해왔던 그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스라이트 공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신의 성역.
그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개의 성역이 겹쳐서 펼쳐져있었으니까 말이다.
“위신 둘이 같은 장소에 닻을 내렸습니다. 적어도 지금 저희만으로 수복가능한 지역은 아닙니다.”
위신 둘이 동시에 지상에 닻을 내려, 같은 장소에 성역을 겹쳐 형성한 것이다.
서로 다른 위신들이 연합해 지역을 점거하고 있는 형태의 성역.
이러한 성역의 존재는 알칸디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난해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알칸디오가 강하다고는 해도, 혼자서 위신 둘을 압도할 수 있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업을 쌓은 존재들이 그를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칠흑기사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단장··· 최소한 기사단의 단원들에게서라도 조력을 받아야겠습니다.”
“알칸디오님, 칠흑기사단이 쉽게 도움을 줄까요?”
“저희쪽에서 요청한다면 분명 도와줄겁니다. 적어도 제가 마주했던 단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했던 말을 부정할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기사.
그가 마주했던 단장은 기사였다.
칠흑기사단을 이끄는 기사가 스스로의 명예에 대고 맹세하였으니, 알칸디오 자신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틀림없이 도움을 줄 터였다.
알칸디오가 아는 진정한 기사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성 아렌시아. 전서구를 준비해주십시오. 칠흑기사단에 연락을 넣어야겠습니다.”
“알았어요. 그게 용사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전서구와 편지를 준비할게요.”
“작전의 결행일도 같이 적어둬야겠군요. 거리의 제약없이 나타나는 그들이라면, 분명 금세 이곳에 도착해줄테니 말입니다.”
용사, 알칸디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