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27
28.천리안의 관측자 (1)
아리엣이 진행하고 있던 [전설 임무]는 무사히 끝을 맺었다.
디펜스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만큼의 과격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아리엣이 먼저 나서서 손을 쓴 탓이겠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아리엣을 [전설 임무]에 보내겠다는 내 판단은 옳은 셈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전설 임무]를 마친 뒤, 나는 이번 임무의 클리어를 통해 획득한 보상들을 확인해보았다.
– 기사단원 [아리엣(EX)]이 [전설 : ‘제례 – 승격의식’의 보호] 임무를 클리어했습니다.
– 보상 : 10,000 EXP
–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운명석 500개가 추가로 지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지급된 것은 모든 임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경험치 보상과 운명석이었다.
이번 임무의 경우에는 특별히 경험치를 추가로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통상 임무]를 20회는 클리어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단번에 획득한 것이다.“1만 경험치··· 적은 보상은 아니지만 이번 보상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지.”
물론 이번 임무를 통해 내가 얻은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전설 임무]에는 경험치 이외에도 특별한 보상이 남아있던 까닭이었다.
바로 알레테이아의 기능 강화와 그에 뒤따르는 수많은 혜택들이었다.
나는 화면을 아래로 내려 평소보다 긴 메세지의 내용을 전부 확인해보았다.
– WARNING! 해당 [전설 임무]가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을 발생시켰습니다.
– 역사의 분기점이 발생함에 따라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의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포탈의 발생 범위가 증가합니다.
– [수집 임무]의 파견거리가 증가합니다.
– [기사단원 모집]에서 등장하는 캐릭터가 더욱 다양해집니다.
– [랜덤 아이템 박스]에서 출현할 수 있는 보상이 더욱 다양해집니다.
– [알레테이아 서포터]가 [VER.2]로 진화했습니다.
– [알레테이아 서포터]가 한층 진화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식당의 메뉴가 이전보다 다양해집니다.
– 새로운 기사단원을 위한 방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단축됩니다.
역사의 분기점.
시스템이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의 기능이 강화될때마다 출력하던 내용이 다시 한차례 언급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캐릭터풀과 아이템풀이 한층 더 넓어진 모습이었다.
물론 모든 메세지가 이전과 동일한 내용은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알레테이아 서포터]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서포터 VER.2······? 이건 또 뭐야.”
메세지에 따르면 알레테이아를 관리하는 곰돌이, [알레테이아 서포터]의 버전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그에 따라서 식당에 메뉴가 늘어났으며, 신규 기사단원을 모집하는데 걸리는 대기시간도 줄어들게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해당 요소들을 내가 지금 당장 체험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스마트폰 화면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곰돌이가 진화했는지 안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레벨 12에 도달하려면 앞으로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사실상 뽑기 리워드 풀이랑 수집 임무 범위가 늘어난게 최대 메리트인가.”
물론 처음부터 해당 효과를 노리고 진행한 임무였기에, 이정도 보상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플레이어 레벨 9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경험치도 대부분 채운 상황이었다.
며칠만 더 플레이하면 무난하게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메세지를 확인한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메세지창을 종료했다.
장시간에 걸친 임무가 끝났으니 잠시나마 화면을 좀 꺼놓으려는 생각이었다.
“수집 임무는 맡기고 꺼놓을··· 아니, 됐다. 그냥 자고일어나서 임무 보내놓고 장비나 뽑아야지.”
게임을 끄기 전에 [수집 임무]라도 보내놓고 종료할까 하다가, 나는 이내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게임을 종료했다.
캐릭터든 스마트폰이든 나름대로 휴식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나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는 참이었으니까 말이다.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멀찍이 던져놓았다.
지금은 졸린 눈을 감고 잠에 들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아이템 뽑기라도 돌려 변경된 목록을 확인해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 [드림 커넥터]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 [드림 커넥터]는 간헐적으로 단장의 꿈과 알레테이아를 연결하는 기능입니다.
– [드림 커넥터]가 활성화되는 빈도는 단장의 레벨에 따라 달라집니다.
– [드림 커넥터]에서는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 [드림 커넥터]에서는 일부 단어가 금칙어로 설정됩니다.
– [드림 커넥터]의 활성화중에는 상호간에 위해를 끼치는 행동이 전면금지됩니다.
* * * * * *
제도에 위치한 제국중앙정보국의 최상층.
국장인 아드레인은 평소부터 즐겨피우던 시가를 입에 물어놓은 채, 자신에게 올라온 새로운 보고서를 확인해보았다.
그가 마주한 보고서는 최근들어서 대륙을 한차례 뒤집어놓은 칠흑기사단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베일에 감싸여있던 비밀기사단이 이번에도 한차례 사고를 친 것이다.
아드레인은 새로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진혈의 흡혈귀, 아리엣 크레이들이라. 현장에 남아있던 흑마법사들을 심문해 나온 정보라고 했나?”
“예. 라케일 알렌바흐의 제자들을 심문해 나온 정보인만큼 신뢰도가 높은 편입니다.”
“어떤 정신나간 기사단이 다섯번째 계단의 마법사를, 그것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진혈의 흡혈귀를 기사단의 단원으로 만들었다고? 볼때마다 참으로 감탄밖에 안나오는 내용이군.”
후우-.
보고서를 보던 아드레인의 입에서 짙은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아드레인과 제국중앙정보국이 원래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네번째 계단의 흑마법사, 라케일 알렌바흐의 동향이었다.
그가 다섯번째 계단으로의 승격을 성공하면서 생겨날 여파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헤리오바르의 미친 성인, 성 알칸디오가 그를 잡겠다며 끼어들었다.
그런 성 알칸디오를 상대로 칠흑기사단의 진혈마저 전투에 참전해 승격의식이 성공할때까지 라케일을 보호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단에 숨겨져있다던 봉인석까지 가로채갔으니, 제국중앙정보국의 입장에서는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신성교단에서도 완전히 난리가 났겠군. 진혈의 흡혈귀가 속한 기사단에 봉인석을 강탈당하고, 라케일까지 승격을 허락하고 말았으니.”
“현재 대륙 전역의 성인들에게 연락을 넣어 원탁회의를 준비중인 모양입니다.”
“원탁회의라··· 이단으로도 지정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는 모양이지? 원탁회의를 연다고해서 다 모이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신성교단의 권위가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보니, 대대적으로 칠흑기사단에 대한 행동을 보이려는 모양입니다.”
보고를 들으며 보고서를 읽어나가던 아드레인은, 이내 펜을 들어올려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칠흑기사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성교단의 행동에 대한 의문만큼은 계속 머리에 남는 상황이었다.
제국중앙정보국이 대륙 전역을 뒤져보아도 본거지는 커녕 명단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던 칠흑기사단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대응을 보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본거지는 커녕 현재 위치조차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움에 임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모든 일을 지휘한 단장이라는 작자는 아직 단 한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 정체는 커녕 칠흑기사단의 단장이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조차 짐작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사각. 사각-.
그렇게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나가던 아드레인은, 자신의 보고를 기다리던 부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들 사이에서 나왔던 이야기도 있을텐데. 저들이 가져간 봉인석을 통해 뭘 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아무래도 봉인석의 힘을 추출하는 실험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의식을 준비하는게 아닐까 예상중입니다.”
봉인석은 마신의 힘을 파편화해 보관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마신을 부활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흑마법사들은 그것을 의식의 촉매로 사용하거나, 그것을 이용해 위험한 일을 벌이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는 했다.
허나 아드레인은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그 두가지 선택지 모두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칠흑기사단의 행동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은 정보를 들은 아드레인의 감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우선은 청록마탑에 있는 ‘천리안의 현자’에게 연락을 넣어라. 단장이라는 자에 대해서 먼저 알아봐야겠다.”
“청록마탑의 탑주에게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움직여라.”
“예. 알겠습니다.”
청록마탑의 탑주인 그녀는 제국중앙정보국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면서, 아드레인으로서도 남발할 수 없는 비용 지불을 강요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아드레인의 명령을 들은 부하는 곧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부하를 보면서, 계속해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대부분은 칠흑기사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 * * * * *
제국의 동부에 위치해있는 청록마탑.
마도공학과 공간제어에 치중해있는 청록마탑의 최상층에는 별의 운행을 관측하기 위한 거대한 천구의가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천구의에는 일찍이 다섯번째 계단에 도달한 마법사 하나가 거주하고 있었다.
청록마탑의 탑주.
천리안의 현자, 헤이즐 오르네스.
그녀는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관측이라는 개념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헤이즐이 구축한 고유마법체계는 사물의 관측과 분석에 특화되어있다.
청록마탑의 천구의에서 헤이즐이 사용하는 마법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일시적이지만 과거와 미래마저도 관측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만 충분하다면, 헤이즐은 앉은 자리에서 무엇이든 들여다볼 수 있었다.
“칠흑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를 조사해달라··· 상당히 오랜만에 들어온 의뢰로구나.”
다만 시공간을 넘어 무언가를 관측하는 행위는 막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제아무리 헤이즐이라도 무턱대고 남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헤이즐이 누군가를 관찰해달라는 의뢰를 받을 때에는, 쉽게 의뢰를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고는 했다.
그런 그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대부분 제국의 황실이나 정보기관들이었다.
이번 의뢰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제국중앙정보국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칠흑기사단이라··· 근래에 소문이 많다고 듣기는 했으나, 설마하니 나에게까지 조사를 부탁해올 줄이야.”
헤이즐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외알안경을 장착하면서, 의뢰내용이 적힌 문서를 불태워 없애버렸다.
화륵-.
헤이즐의 마법이 발동하며 제국중앙정보국에서 보내온 문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문서를 불태운 헤이즐은 천구의의 중앙에 위치한 계단을 오르며 미소를 지었다.
“굳이 제국의 의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 개인적으로도 그 단장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생기는구나.”
또각. 또각.
천구의의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간 헤이즐의 발길이 중앙에 위치한 그녀의 자리에 닿았다.
언제나 그녀가 천구의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목표물을 관측하던 자리였다.
자신이 원래 있어야할 위치에 돌아온 헤이즐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 모습이었다.
지이이이잉-.
눈을 감은 헤이즐의 주변에 마력이 뻗어나가며, 그녀의 뒤에서 무수한 톱니바퀴의 형상이 떠올랐다.
“······기동하라.”
—고유마법체계 : 천리.
헤이즐이 평생동안 쌓아올린 마도의 결정이 빛을 발하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천구의를 구성하는 장치들 역시 맹렬하게 회전하며 그녀가 보고자 하는 차원의 하늘을 비추기 시작했다.
수많은 풍경이 헤이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으며, 기나긴 공간이 헤이즐을 꿰뚫고 뒤로 사라졌다.
헤이즐이 보유하고 있던 마력은 빠른속도로 줄어들며, 머나먼 차원의 너머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오는 바는 명확했다.
칠흑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존재가 기거하는 장소는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차원의 틈새를 찢고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도달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차원의 틈새에 요새를 만들어놓은건가.’
헤이즐은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요새를 마주하기 무섭게 그것의 이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원요새 알레테이아.
벌어진 차원의 틈에 존재하는 그것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자만이, 차원간의 경계를 넘어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친절하게도, 알레테이아의 주인은 헤이즐의 영격이 그곳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녀가 차원너머의 알레테이아를 관측하기 위한 조건은 오직 하나.
지금부터 마주한 것을 발설하지 않는 ‘침묵의 금제’를 거는 것이었다.
‘이 맹세를 받아들인다면 의뢰를 이행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탐구심이 더욱 앞서는구나.’
침묵의 금제를 선행하는 경우 그녀는 이 요새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다만 마법사라는 존재들은 원래부터 지식에 커다란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일에 대해 세상 무엇보다도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헤이즐에게 있어서 차원요새 너머의 세계는 미지로 가득찬 것이었다.
차원요새의 너머를 탐험해볼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헤이즐은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기 자신에게 금제를 거는 것마저 용인해가며 알레테이아의 안으로 영격을 들여보낸 것이다.
“······.”
그리고 그런 알레테이아의 너머에서 헤이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제복을 입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제복.
전신을 뒤덮은 검은색의 망토.
그런 제복과 어우러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색의 눈동자까지.
헤이즐의 시선이 검정일색의 기사를 마주하기 무섭게, 그녀의 외알안경이 빛을 뿜으며 맹렬하게 마력을 순환시켰다.
헤이즐이 가지고 있던 고유마법이 대상의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단장······?”
“그래.”
하지만 마법을 통해 관측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헤이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가는 중이었다.
헤이즐의 마법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대상의 대략적인 정보를 취합해낸다.
이름과 나이, 태어난 날짜,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마저 이해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취합한 정보를 통해 헤이즐이 알아낸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단장.
눈앞의 남자는 ‘단장’이었다.
그의 이름도 ‘단장’이었으며, 그의 역할도 ‘단장’이었고, 심지어 그가 존재하는 이유마저도 ‘단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 대체 어떻게··· 당신같은 인간이 존재하는게 가능한거지······?”
게다가 헤이즐의 육안으로 보이는 단장의 운명은 이상하리만치 뒤틀려있는 모습이었다.
업을 쌓은 인간의 운명은 뒤틀린다.
그것은 다섯번째 계단에 도달한 헤이즐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녀의 눈앞에 존재하는 단장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다만 헤이즐의 눈앞에 보이는 단장의 업은 지나치리만치 많은 모습이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인세에 있는 것을 용서받지 못한 괴물.
지나치게 뒤틀린 운명은 세계조차도 적대하게 만들테지만, 차원의 틈새에 자신을 숨기고 모든 인과를 격리해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만큼이나 운명이 뒤틀려있다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터였다.
‘길어봐야 1시간 정도. 그 이상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에게 허락된 것은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단장같은 괴물이라면, 그 짧은 시간안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 눈앞에 있다.
마법사중의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헤이즐조차 그 편린도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제국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칠흑기사단의 기사단원들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단장이라는 인물이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경계해야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녀는 다섯번째 계단에 도달하고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력에 떨리기 시작한 헤이즐의 시선이 단장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칠흑을 담아낸듯한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두려운건가? 겁에 질린 표정이군.”
헤이즐이 경직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단장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두려운건가?
칠흑기사단의 단장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