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50
51.흑룡 (2)
“하··· 결국 뽑기에 2시간이나 쏟아부었네.”
버튼을 눌러 뽑기를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S급부터 E급까지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만나보던 나는, 슬슬 휴식을 취할까 고민이 되는 시점이 찾아오고나서야 EX랭크 캐릭터를 뽑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모한 운명석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아직 200만까지는 도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장비 뽑기와 캐릭터 뽑기를 병행하다보면 앞자리가 바뀌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나는 반복적인 터치에 고생한 손가락을 풀어주면서, 몇시간을 들여 겨우 뽑아낸 화면속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 [세페이드(EX)]가 기사단에 새롭게 합류했습니다.
– 해당 기사단원을 등용하시겠습니까?
– 모집한다 / 방출한다
흰색이 뒤섞여있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에, 두 이마에는 날카로운 뿔이 달려있는 소녀가 화면속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뽑은 캐릭터의 이름은 [세페이드(EX)].
용의 뿔을 달고 있는 캐릭터는 수술복처럼 생긴 의상을 입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세페이드는 별다른 무기따위는 들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캐릭터의 상세정보를 확인해봐야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형도 제법 멋있게 생겼고, 성능만 괜찮으면 그냥 데려와도 되겠네.”
화면속에 비추어지는 캐릭터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버튼을 터치했다.
툭-.
버튼을 터치하자 캐릭터가 방으로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캐릭터가 로비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해당 캐릭터의 상세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상세정보를 한차례 확인하고 나서 해당 캐릭터의 방출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 캐릭터 정보 ]– 캐릭터 이름 : 세페이드
– 캐릭터 등급 : EX RANK
– 성장 진행도 : S RANK / EX RANK
[ 캐릭터 고유 특성 ]– 호문쿨루스 세페이드는 용족의 특성을 재현해내기 위해 흑룡을 복제해 만들어진 개체입니다.
– 세페이드의 심장에 연결된 드래곤 하트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생산해내며 주위의 마력을 배척합니다.
– 본능적으로 마법의 취약점을 이해하며, 세번째 계단 이하의 마법을 디스펠할 수 있습니다.
– 세페이드는 용족이 타고나는 마법의 기원을 부분적으로나마 재현한 개체입니다.
– 파편화된 기원을 가진 세페이드는 마력을 투기로 치환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용족 특유의 강한 마법저항능력을 발현한 덕분에 세페이드는 마법의 영향을 적게 받습니다.
–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세페이드는 마력의 움직임이나 주변의 기척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세페이드의 상세정보를 개방하자, 가장 먼저 캐릭터의 성장 진행도가 눈에 들어왔다.
해당 캐릭터의 성장 진행도는 S랭크.
지금까지 뽑기에서 나왔던 캐릭터중에 가장 성장 진행도가 높은 캐릭터였다.
원래부터 어느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던 캐릭터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특성들을 확인해보면, 하나같이 높은 랭크의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가장 위에 있는 특성부터 차례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드래곤 하트? 용족 캐릭터··· 아, 호문쿨루스라고 적혀있구나.”
세페이드가 가지고 있는 첫번째 특성의 이름은 .
흑룡을 복제해 만들어졌다는 세페이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드래곤 하트가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었다.
드래곤 하트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마력에 관여하는 종류의 특성이었다.
세페이드의 체내에 막대한 마력을 생성하면서, 마법을 디스펠하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드는 특성인 것이다.
머릿속에 달려있는 뿔은 그 외형에 걸맞게 용을 상징하는 모양이었다.
“두번째 특성은 전투랑 마법저항에 관련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네. 이런 조합이면 사실상 마법사들 카운터 아닌가?”
두번째 특성의 이름은 .
마력을 투기로 치환한다는 설명과 함께, 마법의 영향을 약하게 받는다는 설명이 추가로 적혀있었다.
전자는 공격력을 증폭해주는 효과일테고, 후자는 마법에 대한 저항능력에 영향을 주는 효과가 분명해보였다.
마법을 디스펠하는 첫번째 특성과 합치면 마법사를 상대로 강점을 가지는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세번째 특성은 이오가 가지고 있는거랑 동일한 것 같고. 용 테마의 캐릭터답게 전반적으로 성능이 훌륭한 편이네.”
세번째는 이오가 가지고 있던 특성과 이름이 동일한 이라는 특성이었다.
다만 스킬의 랭크 자체는 이오가 가진 특성보다도 한단계 높은 것처럼 보였다.
전반적으로 마법사 사냥에 특화되어있는 캐릭터인 셈이었다.
보유하고 있는 특성의 설명에 마법에 대한 보정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보다는 물리 딜러로 운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설명에 따르면 보통의 용족과는 어딘가 다른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라고 했지. 마냥 용처럼 쓸 수 있는건 아닌 것 같고, 하위호환정도 되는 것 같네. 그래도 저런 특성이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는데?”
나는 눈앞에 보이는 호문쿨루스를 기사단에 고용하기로 결심했다.
외모도 멋있고 성능도 훌륭하다.
나로서는 방출할 이유가 일체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지금은 마법사 비중이 높으니까, 기사단에 넣어서 근접 딜러로 육성하면 되려나.”
스윽-.
상세정보 화면을 종료한 나는 곧장 알레테이아의 로비에 시선을 돌렸다.
캐릭터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던 기사단의 로비에는, 어느새 기사단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세페이드가 도착해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기사단의 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말이다.
로비에 도착한 세페이드는 머리 위에 갸웃거리는 이모티콘을 출력했다.
– (의문)
이오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기사단의 제복을 멀쩡하게 입은 캐릭터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제복을 입은 채로 망토를 펄럭이고 있으니 한층 더 멋있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적당한 무기만 손에 쥐여준다면 그럭저럭 기사처럼 보일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창고에 적당한 무기가 없으니, 장비 뽑기를 돌려서 무기를 수급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로비에 도착한 세페이드를 지켜보고 있으면, 로비에 있던 캐릭터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 (의문)
– (기쁨)
– (기대)
대부분은 처음으로 마주한 신규 기사단원에 대한 궁금증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소파에 누워있던 아리엣만큼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세페이드에게 기대감을 보이는 중이었다.
아리엣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리엣이 기대할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신입 기사단원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과의례.
아리엣은 내가 세페이드에게 포션을 먹이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쟤네 지금까지 한번에 포션 백개씩 들이마시지 않았었나?”
그런 아리엣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포션을 먹여왔던 캐릭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한 캐릭터당 거의 100개에 가까운 포션을 한번에 먹여왔던 것이다.
나조차도 물을 100잔이나 마시라고 한다면 기겁했을 것을, 게임 캐릭터니까 가능할거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99개나 되는 포션을 한꺼번에 선물해왔다.
다들 어떻게든 포션을 전부 들이마시기는 했지만, 그 후에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물고문에 가까웠던 것이다.
“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참 나쁜 짓을 많이한 것 같았다.
캐릭터들한테 돌을 무더기로 주고, 억지로 포션을 입에 들이붓게 하고, 거기에 더해 적응시간조차 주지 않고 임무에 내보내기까지 했다.
빈말로라도 좋은 단장이었다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워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와서 포션 고문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전부 먹을 수 있다는걸 확인했으니, 굳이 나눠서 선물할 필요까지는 없어보였으니까 말이다.
이미 S랭크에 다다른 캐릭터였던 만큼, 99개나 되는 포션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나도 무급으로 이짓거리 하는 중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냐.”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버린 나는, 화면을 열어 세페이드의 머리를 터치했다.
캐릭터의 머리를 터치하자 상단에 세개의 버튼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캐릭터에게 선물을 주거나, 상세 정보를 확인하거나, 기사단에서 방출할 수 있는 버튼이었다.
– 제5석, 세페이드 델타.
–
–
–
세페이드의 캐릭터 메뉴를 개방한 나는 버튼을 터치했다.
그리고는 인벤토리에 있던 [재능개화 포션] 40개를 선물칸에 올려놓았다.
S랭크에서 EX랭크에 오르기까지 필요한 포션을 계산해보니, 대략 이정도면 되겠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툭.
버튼을 눌러 세페이드에게 포션을 선물한 나는 알레테이아의 로비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열리며 곰돌이가 나타나더니, 세페이드의 앞에 포션이 잔뜩 담긴 쟁반을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 (의문)
– (기대)
세페이드는 눈앞에 놓인 포션에 의문을 표했고, 아리엣은 여전히 그 다음에 나올 광경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세페이드가 포션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려는 생각인 것이다.
포션을 거부한다고 해도 곰돌이가 억지로 먹일테니 도망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툭. 툭.
곰돌이는 쟁반을 뭉툭한 팔로 두드리며, 의문을 표하는 세페이드를 응시했다.
그렇게 세페이드와 서포터가 잠시 시선을 교환한 이후.
이내 세페이드가 [재능개화 포션]을 하나 집어들고서는, 그 내용물을 입에 부어넣기 시작했다.
– 꿀꺽. 꿀꺽.
순식간에 포션 하나를 먹어치운 세페이드는 그것을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다음 포션을 집어들어 입에 들이부었다.
끼익-. 콸콸콸.
포션의 마개를 열고서 포션을 들이붓고는, 또 다시 마개를 열어 다시 포션을 들이붓는 행동의 연속.
세페이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계속해서 포션을 들이마시는 모습이었다.
몇차례 포션을 열고 목에 때려붓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머지않아 남아있던 포션을 전부 먹어치웠다.
“뭐야. 생각보다 잘먹네.”
칠흑기사단의 역사상 가장 무미건조한 포션타임이었다.
누구보다도 호쾌하게 포션을 먹어치운 세페이드는 포션병을 치우고서 비어있는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호쾌한 행동과는 다르게, 자리에 앉는 방식은 무척이나 소심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포션을 먹고 구석에 쪼그려앉은 세페이드를 보다가, 포션 타임을 기대하던 아리엣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아리엣은 얼굴을 가린 책 너머로 세페이드를 힐끔 바라보는 중이었다.
– (아쉬움)
그리고 그런 아리엣의 머리 위에는, 실망하고 있는 이모티콘의 모습이 출력되고있었다.
대체 왜 아쉬워하는 것일까.
몇번이고 그런 아리엣의 모습을 바라보아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 * * * *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
그 한구석에 위치한 자그마한 방에서, 호문쿨루스 세페이드는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곰인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티팩트로 추정되는 거대한 곰인형.
그것은 휴면상태에 놓여있던 세페이드를 깨워 기동시키고는, 그녀를 향해 검은 옷을 건네주는 모습이었다.
그런 곰인형의 모습에 세페이드는 멍하니 눈앞의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 “오늘부터 너는 칠흑기사단의 기사단원임.”
“······.”
– “기사단 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셈.”
기사단의 제복.
거대한 곰인형은 세페이드를 향해 검은 옷을 내밀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눈앞의 옷이 제복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페이드는 자신이 이 옷을 입어야되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흑룡 일리비어드에 의해 만들어진 호문쿨루스.
자신의 주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명령도 들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세페이드는 의문을 가진 채로 눈앞의 곰인형을 조용히 응시했다.
“······?”
– “······?”
적막속에서 둘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이어지는 침묵의 도중.
둘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거대한 곰인형 쪽이었다.
곰인형은 세페이드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너는 칠흑기사단의 기사단원임. 제복으로 갈아입고 로비로 나오셈.”
“······제가 말인가요?”
– 끄덕.
“······기사단에 말인가요?”
– 끄덕.
“······어째서인가요?”
– “······?”
세페이드와 곰인형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이어진 짧은 침묵.
방안에 내려앉은 적막속에서 곰인형과 세페이드가 계속해서 시선을 교환했다.
“······?”
– “······?”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곰인형은 다시금 눈앞의 호문쿨루스 소녀를 향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너는 단장에게 선택받아 칠흑기사단의 새로운 기사단원이 되었음. 이 사항에 대한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음.”
세페이드 델타는 칠흑기사단의 새로운 기사단원이 되었다.
그녀는 단장이라는 사람에 의해 기사단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이 사실에 대해 일체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눈앞에 존재하는 곰인형의 이야기였다.
멍하니 곰인형의 이야기를 듣던 세페이드는 다시 한 번 곰인형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제가 말인가요?”
– “맞음.”
“······기사단에 말인가요?”
– “맞음.”
“······어째서인가요?”
– “맞으셈.”
딸깍-.
곰인형이 벽면의 버튼을 누르자 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불이 꺼지며 어둠이 찾아온 방에서, 세페이드는 기감을 통해 곰인형의 재빠른 움직임을 감지했다.
콰앙! 우당탕탕-.
불이 꺼진 방안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잠시 후.
세페이드는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채 로비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으······?”
여기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세페이드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칠흑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 * * * *
제국 동부. 청록마탑의 최상층.
천구의의 안에서 군청색의 머리를 나풀거리던 마법사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천리안의 현자, 헤이즐 오르네스.
청록마탑의 탑주이자 대륙에서도 가장 유명한 현자들중 하나인 그녀는, 단장을 관측하던 당시에 지불한 대가로 인해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헤이즐은 여전히 목숨을 내건 관측을 멈추지 않는 중이었다.
칠흑기사단의 행보가 봉인석과 얽혀있는 이상, 그녀에게는 계속해서 세계의 변화를 관찰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무언가를 보고 온 모양이군요. 헤이즐.”
한동안 관측에 집중하던 헤이즐이 눈을 뜨면, 그녀는 어느새인가 천구의의 안에 들어와있던 외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색이 바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
후드를 눌러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헤이즐은 어렵지 않게 남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현자라는 이름으로 칭해지는 흑마법사들 중 하나.
모닥불의 현자인 글라이온이 헤이즐의 천구의에 찾아온 것이었다.
“요즘에는 노크조차도 없이 안에 들어오는게 예의가 되어버린 모양이구나.”
“아쉽게도 격식을 차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당신이 키워낸 제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이제 제법 나이를 먹은 모양이구나. 네놈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조차 간파하지 못하다니.”
“그 말과는 다르게 예전보다 더욱 젊어진 것처럼 보이는군요.”
글라이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헤이즐의 앞에 마주섰다.
헤이즐은 오랜만에 마주한 흑마법사의 모습에 인상을 썼다.
글라이온은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양지에서 존경받는 몇 안되는 인물이면서, 또한 마탑과의 교류 역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헤이즐은 언제나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음침한 마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을 달관한 듯이 이야기하면서도, 언제나 제 속내를 숨기고 다니는 까닭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게냐.”
“이미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칠흑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라면, 내가 이 자리에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자신을 찾아온 글라이온을 향해, 헤이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헤이즐이 그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일말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단장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에 누설할 수 없었다.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에 들어가기 위해 걸었던 금제의 영향이었다.
그런 헤이즐의 반응에, 글라이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금제를 걸어놓은 모양이군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
“칠흑기사단이라··· 영지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기사단을 칭하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지요.”
글라이온은 그렇게 말하며 작동을 멈춘 천구의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천구의가 기동하며 새겨진 천체의 움직임을 스스로 읽고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이즐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 천구의를 이해할 수 없어야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흑마법사만큼은 헤이즐의 천구의를 문제없이 해석해내고는 했다.
언제나 제 속내를 감추고 살지만, 그럼에도 그 능력만큼은 누구보다 출중한 마법사였다.
“벌써 세개나 되는 봉인석이 넘어간 모양입니다. 제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군요.”
“이번 일을 예상했다고 말한건가?”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질서는 어디까지나 임시조치에 불과합니다. 결국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하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흑마법사인 네놈에게만 보이는 풍경이 달리 있는 모양이구나.”
끄덕-.
글라이온의 고개가 조용히 움직였다.
“신을 희생해 만들어낸 모독적인 질서입니다. 이러한 질서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을겁니다.”
“모독적인 질서라······.”
“물론 신성교단의 성직자들은 세계의 영원한 안녕을 이야기하고는 하지만··· 저나 당신같은 이들은 그것이 부질없는 이야기임을 쉽게 깨닫고 말죠.”
글라이온의 이야기를 들은 헤이즐의 시선이 천구의를 올려다보았다.
뒤엉키기 시작한 세계의 질서.
그 속에서 봉인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마신의 육신과 영을 가두어놓고 있는 봉인의 잔해.
그것은 단순히 신마대전의 결말을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위한 기사단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냐.”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군요.”
“그건······.”
“당신이 찾아갔던 단장이라는 자에게서 무언가를 보았겠죠. 한낱 필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그 너머의 무언가를 말입니다.”
툭.
글라이온의 지팡이가 한차례 바닥을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천구의의 주변에 마력의 파문이 퍼져나갔다.
기이이이잉-.
헤이즐의 천구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며, 하늘에 띄워놓은 천체의 움직임이 조금씩 뒤틀려나갔다.
그것은 현재의 세계를 관측하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예언.
글라이온은 세계의 미래를 가늠하며 그 결과물을 지금 이 자리에 내어놓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오랜 질서가 무너질겁니다. 신을 묶어두던 구속은 그 가치를 잃어버릴테고, 세계 역시 본연의 질서를 향해 되돌아가겠지요.”
“······분명 그렇겠지.”
“다가올 순간속에서 우리 역시 결정을 내려야만 할겁니다.”
글라이온을 뒤덮고 있는 후드의 너머.
그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황금빛의 광채가 헤이즐의 눈에 비추어졌다.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와는 다르게, 글라이온의 눈빛은 싸늘한 모습이었다.
“저는··· 더 이상 인간의 미래를 신들에게 맡겨두지 않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