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64
65.짊어지는 자 (2)
‘지나치게 신성력의 밀도가 높아보이는걸.’
아리엣은 주위에 가득차있는 신성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서포터로부터 임무를 전달받아 포탈 너머로 이동한 직후.
아리엣이 마주한 것은 이상하리만치 신성력으로 가득차있는 유적지였다.
신성력과 상극인 밤의 일족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부담이 전해져올 정도의 밀도였다.
“······아리엣.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네요.”
아리엣과 함께 포탈을 빠져나온 세페이드 역시, 유적지 부근에 내려앉은 신성력을 보며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우우웅-.
세페이드의 손에 쥐어진 묵색의 창이 웅혼한 울림을 퍼뜨리며 한차례 떨었다.
이만큼이나 신성력으로 가득차있는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아리엣에게 있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밤의 일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일평생을 피와 어둠으로 가득찬 땅에서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이만한 신성력을 마주할만한 순간은 하나뿐이었다.
배교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지(禁地).
신성교단과 빛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 예비된 금지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세페이드. 아무래도 이번 임무의 난이도는 만만하지 않아 보이는걸.”
“······?”
“가능한 주의해서 움직이자는 이야기야. 이런 공간에서는 나조차도 감각이 왜곡되기 쉽거든.”
세페이드를 향해 짧은 경고를 마친 아리엣은 새하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휘릭-.
아리엣이 허공에 백은을 휘두르자, 그들의 주위에 색채가 내려앉으며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덧칠하는 아리엣의 힘이 두 사람의 모습을 유적지로부터 가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환영마법을 사용해 모습을 감춘 아리엣은 드넓은 유적지의 안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세페이드 역시 마법을 사용한 아리엣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가능한 신중하게 조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주변에 있는 물건들은 함부로 만지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런가요?”
“그리고 이런 공간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일에도 부담이 심해질거야.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네가 먼저 전투에 나서줄 필요가 있겠어.”
아리엣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찾아온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천장이 무너져내린 유적지에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상징들이 새겨져있었다.
일찍이 아리엣이 인간들의 군세와 전투를 치루며 마주했던 것들이었다.
인간들이 섬기는 가장 찬란한 빛.
단 하나의 칭송으로 귀결되는 ‘빛’의 신도들은 별과 태양으로 자신들을 나타내고는 했다.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단장이 이번 임무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어.’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엣의 머릿속에 서포터와의 짧은 대화가 스쳐지나갔다.
평소라면 지령서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놓았을 서포터였지만, 이번 지령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두루뭉실한 내용만이 적혀있었다.
—유적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물건을 회수하라.
유적에 대한 정보도 없고, 회수해야하는 물건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적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서포터에게 질문해보아도, 유의미한 대답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다.
물론 물건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장이 평소에 어떤 물건을 찾아 헤매는지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신과 관련한 물건을 회수하려고 하는거겠지. 지난번에 마주했던 신의 유해나 봉인석 같은 물건들처럼 말이야.’
단장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임무는 위신이나 마신과 깊게 엮여있는 임무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들은 굳이 단장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중요도가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편이었다.
아리엣 역시 아직까지 봉인석이나 신마대전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들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단장이 내주는 임무들을 하나씩 해결하다보면 언젠가 그가 알고 있는 지식에 닿을 수 있을 터.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임무를 깨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유적지 전역에 신성력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은걸. 거기에 더해 별도의 인기척마저 탐지에 잡히고 있어. 유적지를 지키고 있는 성인(聖人)들인걸까?’
유적지에 대해 분석하는 아리엣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적을 탐색하는 아리엣과 세페이드의 발걸음 역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리엣의 환영은 두 사람의 발자국을 덧칠하고, 길목에 울려퍼지는 발소리마저 강하게 억누르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유적지의 중심부에 접근하는 동안, 그들을 공격하거나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일체 확인할 수 없었다.
‘주변에 설치된 장식들 중 일부는 주술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들이야. 아마 그 역할은 무언가를 격리하는 결계··· 봉인석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보관하고 있는걸까?’
백은을 쥐고 있던 아리엣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녀의 안목으로 확인한 유적의 모습은, 여태껏 아리엣이 마주해왔던 여타 유적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제례의 극의에 다가섰다며 공언하는 대마법사의 눈으로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미지.
아리엣의 눈앞에 있는 유적은 그만큼 고차원적인 연구의 산물이었다.
“아리엣. 저 앞에 인간들이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아리엣이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동안 유적을 가로지르던 아리엣과 세페이드는 어느덧 유적의 중심부에 활짝 열려있는 석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터운 돌을 이용해 만들어낸 석문의 너머.
그곳에는 무언가를 앞에 둔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하나와, 남자의 양 옆에서 도열하고 있는 성직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세페이드의 이야기를 듣던 아리엣은, 무릎을 꿇은 남자의 앞에 놓여있는 무언가를 보고 흠칫했다.
“······심장?”
무릎을 꿇은 남자의 앞에 놓여있는 제단.
그곳에는 균열이 벌어진 채로 망가져있는 거대한 결계와, 그 너머에 보이는 검은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로 어스름한 마기를 흘리고 있는 거대한 심장.
아리엣은 제단에 놓인 심장에서 일전에 마주했던 무언가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저 물건이 우리가 찾고 있던 물건인가요?”
“맞아. 제단에 놓여있는 저 거대한 심장이 단장이 찾고 있던 물건이 틀림없어.”
“그러면······.”
“세페이드,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야. 아직은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리는게 좋겠어.”
인간들은 아직 아리엣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마법이 두 사람의 소리와 기척마저 덮어씌우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숨어있다는 사실이 아직 들키지 않은 만큼, 성직자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방법일 터.
그렇기에 아리엣은 지금 당장 움직임을 취하기보다,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움직이는 편을 택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일단은 여기서 기다리는걸로······.”
그런 아리엣의 이야기에 환영속에 숨어있던 세페이드가 창을 아래로 내리려던 순간.
제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유로운 태도로 몸을 일으킨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리엣과 세페이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리엣의 마법이 두 사람의 기척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음에도, 그 시선은 선명하게 아리엣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엣이 백은을 들어올리며 남자를 경계하자, 이내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슬슬 찾아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일단은 묻고 싶은게 정말 많습니다만··· 그 전에 해야하는 일이 있겠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손을 가슴팍에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직후, 남자의 손에서 한순간 빛이 번쩍였다.
지잉-.
전조를 보았음에도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쾌속의 일격.
인지를 벗어난 속도로 뻗어나간 섬광이 투기를 끌어올린 세페이드와 충돌해 그녀를 뒤로 날려버렸다.
콰아아아앙!
유적의 한구석에 쳐박혀버린 세페이드의 상태를 확인한 아리엣의 시선이, 다시금 앞에 서있던 정체불명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는 가장 찬란한 빛으로부터 사명을 내려받은, 세번째 사도 에드거스 크루세이드.”
“당신 지금··· 내 환영을 간파한거야······?”
당황에 젖은 아리엣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도 에드거스의 발걸음 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터벅. 터벅.
유적에 울려퍼지는 묵직한 발걸음은 듣는 이의 간담을 뒤흔드는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두눈을 뒤덮은 찬란한 광채.
대기를 일그러뜨리는 신성한 아우라.
주변의 분위기를 일거에 압도한 사도 에드거스가 아리엣을 보며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칠흑기사단.”
* * * * *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
지구와는 다른 세계에 위치해있는 이 거대한 요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비밀들이 숨어있다.
[드림 커넥터]를 자유롭게 활성화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이후, 나는 틈틈히 시간을 내어 알레테이아에 숨겨진 비밀들을 탐색하고 있었다.단장의 언행을 검열하는 ‘단장 필터’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아리엣과 세페이드에게 새로운 [전설 임무]를 전달하고,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임무를 내려 알레테이아에 적막이 찾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알레테이아에 홀로 들어와서는, 알레테이아의 진실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만한 단서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난감한데.”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알레테이아에 들어온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아리엣과 세페이드에게 전달되었던 지령서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번 [전설 임무]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임무의 자세한 내용이 왜곡되어있던 스마트폰을 대신해서, 두 사람이 받았던 지령서에는 무언가 제대로 된 힌트가 적혀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나는 알레테이아의 로비에서 두 사람이 받은 지령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
온전한 지령서를 발견하기는 커녕, 지령서가 타고 남은 흔적마저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지령서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곧장 다음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알레테이아의 한켠에 위치한 도서관.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한 김에 도서관 내부의 장서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제국 군용 마법 기초, 제국의 금본위제와 패권경쟁, 투기란 무엇인가··· 하나같이 도움이 안될것같은 내용들밖에 없어보이네.”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도서관에 정리된 장서들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마법 이론. 제국의 생태. 철학.
하나같이 심오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서적들이었다.
그중에는 비교적 이해가 쉬운 주제도 여럿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내용들이었다.
제반지식이 없으면 용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도서관의 장서들을 뒤져가면서, 그나마 내가 이해할 수 있을만한 서적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제국의 건국신화, 신성교단의 탄생··· 이런 것들은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인데.”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다행히도 몇몇 장서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특히나 신학과 관련된 서적들은 어딘가 눈에 익은 단어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러한 몇몇 장서들을 따로 바깥에 빼놓아, 나중에 성 아스티야에게 이것을 건네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도중.
나는 책장의 틈새에서 제목이 적혀있지 않은 낡은 서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뭐지?”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촤라라라락-.
손에 잡힌 책을 열어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보면, 절반에 가까운 페이지가 이미 뜯겨나가있는 모습이었다.
기사단의 단원들이 책을 훼손했을리는 없을테니, 처음부터 이 책이 이런 상태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대부분 멀쩡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장서들 사이에서, 반절 가까이 찢겨나간 이 책은 무척이나 특이한 부류였다.
그런 만큼 찢겨져있는 책에 대해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책장의 틈새에서 꺼낸 책을 펼쳐 그 내용을 한페이지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6월 8일. 대주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내 생각에 대해 크게 반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몇번을 설득해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낡아빠진 책의 첫페이지를 읽어보던 나는 금세 이것이 일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남겨놓았던 일기가 절반 가까이 파손되어 후반부의 내용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일기인 모양인데··· 누가 남긴 일기인거지?”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 일기를 남긴 것일까.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일기장의 페이지를 한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사락-.
페이지가 한장씩 넘어갈 때마다 때묻은 이형의 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7월 2일. 폭우가 내려 땅이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알베르 경이 통솔하던 별동대는 어쩔 수 없이 진군속도를 늦출수밖에 없었다.’
일기를 넘길때마다 빠른 속도로 날짜가 뒤바뀌며 내용이 이어져나간다.
나는 이어지는 일기의 내용속에서 일기를 작성한 인물의 정체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기는 전쟁터에 참여한 어떤 인물의 개인적인 수기로 보였다.
스스로가 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일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11월 6일. 남부의 결계가 끝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크로테오스 대삼림에서 바깥세계의 존재가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이 일기에는 내가 그동안 보거나 들어왔던 단어들이 보이고 있었다.
바깥세계의 존재.
신성교단.
그리고 마신에 대한 내용까지.
하나같이 알레테이아에서 모종의 방법을 통해서 들어본 이야기들이었다.
다만 일기를 작성한 인물의 생애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여곡절이라고 부를만한 내용이 넘쳐나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1월 6일. 레이크와 가비온이 죽었다. 서서히 결속의 힘이 약해져가는 것을 느낀다. 이미 제 육신을 잃어버린 망자의 힘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버리고 만다.’
‘1월 27일. 적들의 공세가 심상치않다. 나와 동료들이 본대에서 고립된지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음을 느낀다.’
‘2월 1일. 아르니아가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르니아가 이야기해주기 전까지 나 역시 그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니아는 내 생일을 축하하며 주변의 꽃들을 모아 만들어낸 꽃다발을 건넸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르니아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르니아는 내 생일이 지나가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해당 페이지의 경우에는 물기에 젖었는지 미묘하게 잉크가 번져있는 모습이었다.
한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일기의 내용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때로는 함께하던 동료가 목숨을 잃었으며, 때로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넘어가며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후반부에 나온 어떠한 페이지의 경우에는, 그러한 목표에 직면하기 전에 그가 남긴 감상이 적혀있기도 했다.
‘7월 3일. 이제 하루만 더 나아가면 최초의 목적지였던 실낙원에 진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실낙원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이것이 옳은 길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단지 내가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적어나갈 뿐이다.’
실낙원.
이 일기의 주인이 처음부터 목표로 하던 장소.
그곳으로 진입하기 전에 남긴 기록은 이것이 전부였다.
다음 페이지에 나온 일기부터는 제대로 된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해당 일기의 내용으로부터 곧장 이어지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피가 젖어있는 일기의 다음 페이지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 수많은 고민과 함께 적어나간 것처럼 보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실패했다. 우리는 결국 실패를 마주하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여정은 어리석은 자들의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었다.’
‘해답이 필요했다. 지금의 미봉책은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했다. 나도 그녀도 결국 답이 될만한 이야기를 내어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괴감에 젖어있는 일기의 페이지는 피에 얼룩져있는 모습이었다.
분명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일기를 보는 내 마음마저도 무거워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남아있는 일기의 페이지는 이제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든 일기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일기의 내용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비로소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이 세계에 허락된 시간에도 한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운명은 무한하지 않다.’
일기의 내용을 곱씹어보던 내 머릿속에, 기사단장실에서 마주했던 수정구 속의 운명이 떠올랐다.
게임을 시작한 이래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쌓아나가며, 어느덧 내 운명은 뒤로 일곱자리를 세어야하는 숫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사람의 운명을 뜻하는 것이라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고민에 빠진 내 손이 일기의 페이지를 한 장 더 뒤로 넘겼다.
‘해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사가 필요했다. 불합리한 무언가와 대적하는 일에 끝까지 함께해줄 기사들이 있어야만 했다.’
‘이 무모한 계획은 그녀가 나에게 이야기했던 불가능한 꿈의 단편으로부터 이어져나온 계획이다.’
‘오직 이 계획 하나만을 위하여, 나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한창동안 집중해 일기의 페이지를 넘겨온 까닭이었을까.
어느덧 넘길 수 있는 일기의 페이지가 한장밖에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장을 앞둔 일기의 내용을 집중해서 읽었다.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필체가 점점 불안정해지는 모습이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갈망하던 것은 거대한 사명을 함께 짊어질 동료였다.’
‘끝을 모르는 칠흑의 바다. 그것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재액으로부터, 스스로가 사랑하던 세계를 구해내는 것.’
‘나는 최후의 사명을 함께해줄 기사들을 모아 기사단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기사단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기사단의 이름은 바로——.’
손가락 사이에 붙잡힌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가 유달리 얇게 느껴졌다.
이제 한페이지만 넘기면 일기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일기장의 페이지를 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입술을 짓이기며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다음장으로 넘어간 일기의 하단에 익숙한 이름이 보이고 있었다.
‘칠흑기사단.’
—칠흑기사단.
익숙한 기사단의 이름이 적혀있는 일기의 건너편.
도서관의 복도 한가운데에 서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내 시야에 보이고 있었다.
푸른 빛의 안광을 흘리는 거대한 곰인형.
언제나 알레테이아에서 나를 환영해주던 곰돌이가 그곳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