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Goods Player RAW novel - Chapter 65
66.짊어지는 자 (3)
투둑, 투두둑-.
떨어져내리는 돌무더기 속에서 세페이드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사도 에드거스의 공격을 받아낸 세페이드의 주변에는 짙은 투기가 넘실거리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 쇄도하던 순간, 간신히 투기를 끌어올린 세페이드가 그 충격을 상쇄시킨 것이다.
사도 에드거스는 그런 세페이드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이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공격을 견딜줄이야. 확실히 범상치 않은 분들인 모양이군요. 물론 그정도가 아니라면 성 아스티야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었겠죠.”
“······성 아스티야?”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엣은 비로소 사도 에드거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성 아스티야.
지금 그는 알레테이아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성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성 아스티야를 돌려받고 싶어하는 모양인걸.”
“그 말대로 입니다. 신성교단에 있어서 성 아스티야는 무척이나 각별한 존재입니다. 물론 저에게 있어서도 후계자나 다름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정보를 순순히 말해줘도 괜찮겠어? 당신의 약점이 될지도 모르잖아.”
“상관없습니다. 이 자리에 찾아온 시점에서 당신들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사도 에드거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손으로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쥐었다.
목에 걸린 은빛 로자리오는 태양빛을 머금은 채로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저는 여러분을 인질로 붙잡아 칠흑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와 협상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오만함으로 가득차있는 발언.
그런 이야기에 걸맞게 사도 에드거스의 눈은 아리엣과 세페이드를 깔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도 에드거스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엣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평생 타고난 재능으로 남들을 내려다보며 살아왔던 아리엣이다.
인간에게서 저런 시선을 받아보는건,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오만한 태도네. 그런 태도에 걸맞는 실력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다만 사도 에드거스의 실력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잠깐이지만 아리엣이 공격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 수준은 지금까지 그녀가 마주해왔던 성인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모습이었다.
신의 사도를 자처하는 만큼, 그 역량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글쎄요. 직접 시험해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세페이드!”
아리엣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직후.
유적지의 벽에 서있던 세페이드가 쥐고 있던 창을 기울였다.
사도 에드거스를 목표로 삼은 투창.
손에 쥐고 있던 창날이 칠흑의 궤적을 그려나가며, 사도의 머리를 노리고 쇄도하는 모습이었다.
파아아아앙-!
파공성을 터뜨리며 날아오는 투창을 마주한 사도 에드거스가 로자리오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손을 떠나고 나서도 투기가 힘을 잃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상당한 귀물인 모양입니다.”
창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그는 묵빛의 궤적을 향해 손을 집어넣었다.
콰앙!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창의 궤적이 비틀리며 벽에 쳐박히는 모습이었다.
요새마저 무너뜨리는 투창을 손짓 한번에 가볍에 비틀어버린 것이다.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내는 사도 에드거스의 모습에, 그를 지켜보던 세페이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전력을 다한 투창이었는데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들을 인질로 잡아두겠다고 말입니다.”
“제 수준으로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닌 것 같네요.”
파앗-!
사도 에드거스의 손에 굴절되었던 창이 다시 세페이드의 손에 되돌아왔다.
창을 붙잡은 세페이드는 투창이 크게 의미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이내 다리에 힘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쾅!
세페이드의 발이 한차례 지면을 강하게 밀어내었다.
지면을 박찬 세페이드가 순식간에 사도 에드거스와 거리를 좁혔다.
“아리엣.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정리해주세요. 그동안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아리엣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휘릭-.
화려하게 휘둘러진 아리엣의 지팡이가 현실을 덧칠하며 공간을 격리하기 시작했다.
사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성인과 성직자들을 환영속에 가두려는 것이다.
“적이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다들 경계하십시오!”
“사전에 말했던대로 신성주문을 준비······!”
주변을 뒤덮는 마력을 발견한 성직자들은 저항을 시도했지만, 아리엣의 강력한 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성인들 정도가 아리엣의 환영을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아리엣은 환영을 무너뜨리려는 성인들의 행동을 두고보지만은 않았다.
파아앗-!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퍼져나가며, 주변의 색채를 전부 뒤바꾸기 시작했다.
백은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경치는 유적지 전역을 아리엣의 색으로 뒤덮으려는 기세였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아리엣의 환영에 사도 에드거스 역시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다섯번째 계단의 마법사들은 몇번이나 만나봤습니다만,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흑마법사는 처음 보는군요.”
“당신, 전투를 벌이면서도 감탄하고 있을 여유가 있는거야?”
“제가 이교도의 성취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카앙! 캉!
수도(手刀)를 이용해 세페이드의 공격을 받아내던 사도가 이야기했다.
그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여 세페이드의 공격을 흘려내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빛이 번쩍이며 사방으로 투기와 신성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들이 서있는 지면에는 공방으로 인한 흔적이 선명하게 새겨져가는 중이었다.
사도 에드거스와 근접전을 벌이던 세페이드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 빈틈이 전혀 안보이네요.”
“그 정도는 되어야 신의 사도를 자처하는거겠지.”
전장을 격리하기 위한 환영을 강화한 아리엣은,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이는 전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리엣의 손에 들려있는 백은 역시 전투를 벌이는 사도 에드거스를 향해 겨누어졌다.
두 사람이 벌이는 전투에 개입해, 전투의 흐름을 세페이드에게 유리하게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휘릭-.
아리엣의 백은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한차례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빛이 퍼져나가며, 세페이드의 근처에서 무수한 창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 눈을 어지럽히려는 생각입니까.”
“세페이드!”
창을 찔러나가는 세페이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아리엣의 환영마법이 전장에 개입해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리엣의 보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사도 에드거스의 눈가 주변에 피어오르며, 빠른 속도로 그 시야를 가려버리는 모습이었다.
재빠르게 사도의 눈을 덮어버린 검은 안개.
시야를 왜곡당한 사도 에드거스를 향해, 세페이드의 창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뻗어나갔다.
“······!”
콰아아아앙-!
세페이드의 창격에 직격당한 사도 에드거스의 신체가 멀찍이 날아가 유적의 벽면에 충돌했다.
투두둑-.
사도 에드거스가 충돌한 벽면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제대로 된 방어동작 없이 공격을 허용했으니, 제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몸이 멀쩡하지는 않을 터.
사도를 날려버린 세페이드의 시선이 그곳을 응시하면, 사도 에드거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이런 방식이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만한 공격을 받고도 멀쩡히 일어나는거야?”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같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터벅. 터벅.
자리에서 일어난 사도 에드거스의 발걸음이 걸어나간 지면이 일렁였다.
사도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아리엣의 환영이 기묘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지직, 지지직-.
주변의 환영을 왜곡시키며 걷던 사도 에드거스가 아리엣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만 할테지요.”
“설마······.”
“이만하면 인사를 대신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군요. 피차 감정이 쌓여있는 것은 마찬가지일테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한 사도 에드거스의 손이 목에 걸고 있던 로자리오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투둑, 투두둑-.
로자리오를 연결하고 있던 체인이 사도 에드거스의 목에서 완전히 뜯겨나갔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아리엣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빛이여. 당신의 종을 구원하소서.”
사도 에드거스를 둘러싸고 있던 신성력이 한차례 일렁이더니, 갈피를 잃어버린 채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대기를 짓누르는 신성력의 파동.
그 속에서 사도 에드거스의 눈에 선명한 광채가 머물기 시작했다.
유적을 딛고 선 사도의 배후에서는 황금빛의 광륜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사도 에드거스의 기백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이건······.”
공간을 장악하는 신의 권능.
인간의 육신으로 신을 대행하는 사도의 힘이 진정한 위용을 발하기 시작한다.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대한 업.
신의 힘을 빌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난 존재가 공간에 개입하자,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는 모습이었다.
지지직-.
아리엣이 펼쳐놓은 환영 역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자괴하기 시작했다.
“—사도강림. 아드낙스.”
사도의 등에 자리잡은 광륜의 너머로,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날개가 뻗어나갔다.
황금의 광채를 품고 있는 사도 에드거스의 머리 위에는, 신성한 빛을 발하는 헤일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공간을 뒤흔드는 사도 에드거스의 육신이 서서히 지면으로부터 솟아올랐다.
헤일로와 날개.
그리고 거룩함이 느껴지는 거대한 광륜.
지상에 내려앉은 묵직한 위압감은 신의 사자로 내려온 천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라. 찬란한 빛이 너희를 지켜보리니.”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공중에 떠오른 사도 에드거스가 이교도들을 향해 선언했다.
영혼에 스며드는 듯한 육성이 울려퍼지며,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로 향했다.
배교자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금지의 하늘.
그곳에 신의 사도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 * * *
차원요새 알레테이아에 위치한 도서관.
나는 그곳에서 일기를 쥔 채, 친숙한 모습의 곰돌이를 바라보았다.
알레테이아 서포터.
스스로를 서포터라고 주장하는 곰인형은 멀뚱히 일기를 보며 서있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칠흑기사단의 핵심 기능과 관련되어있던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나한테 마지못해 움직인다는 태도를 자주 보이는 것을 보면, 막상 서포터에게 주어진 자율적인 권한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포터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눈앞의 곰돌이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서포터. 혹시 이 일기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나?”
– “단장에게 받은 책을 도서관에 정리했을뿐임. 나는 그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음.”
내 질문을 받은 곰돌이는 이 일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내 손에 들려있는 일기는 단순히 뽑기에서 나온 부산물일뿐, 그 이상의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곰돌이가 보여왔던 태도가 전부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의 이야기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이 일기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질문할 필요가 있겠어.’
계속해서 일기에 대한 정보를 추궁해봤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곰돌이를 보며 고민하던 나는 다른 방향으로 대답을 유도하기로 결심했다.
칠흑기사단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던져, 이 일기의 저자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칠흑기사단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거지?”
– “단장이 지은 이름임.”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돌아온 대답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단장이 ‘칠흑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곰돌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내용을 몇차례고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무수한 의문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내가 직접 기사단의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 전대의 단장이 존재하고 있었나?”
– “칠흑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지은건 단장임.”
계속해서 모호한 답변만이 되돌아온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보다 더 직설적인 답변이었다.
질문의 범위를 조금 더 좁혀볼 필요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물어보지.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단장의 이름이 뭐지?”
– “단장은 그저 단장임. 그 이외의 명칭은 존재하지않음.”
“서포터. 내 이름을 말해보도록.”
– “단장을 지칭할 수 있는건 오직 단장이라는 명칭뿐임.”
곰돌이에게 질문을 이어나가던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질문을 해도 계속해서 대답이 겉도는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답이 불가능한건지 모르겠다.
나는 곰돌이를 향해 조금 더 강한 태도로 밀어붙였다.
“서포터. 명령이다. 내 이름을 말해.”
– “단장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단장을 부르는 행위가 금지되어있음.”
“내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어째서인거지?”
– “알레테이아에서 단장의 육체를 보존시키고 있는 저주의 영향임. 이곳에서는 단장에게 주어진 명칭도 역할도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음.”
“저주······?”
녀석은 저주가 걸려있다는 이유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단장이라는 이름으로만 타인에게 불릴 수 있게되는 저주.
단장이라는 역할만이 성립하게 되는 저주.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저주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무언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오기 이전에도 단장이 있었나?”
– “칠흑기사단의 단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명뿐이었음.”
게임을 처음으로 플레이하던 날의 기억을 돌이켜본다.
나는 이 게임의 닉네임 설정창에서 무언가의 닉네임을 등록하려고 했고, 결국에는 의도치않게 단장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게 되었다.
내가 이 게임에서 단장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게 된 것은 결코 내 의사가 아니었다.
우연이 아닌 필연.
처음부터 단장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일체의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결국······.’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단장’이라는 명칭을 강제하는 저주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드림 커넥터]를 통해 접속하면 마주하게되는 ‘단장 필터’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알레테이아 내부에서 나는 오로지 단장에게 어울리는 언행만이 가능했다.
필터의 존재마저도 저주라는 명목아래에 묶일 수 있을 것인가.
무수한 사고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서포터, 단장이라는건······.”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아니, 이게 아니지.”
– 단장의 품위에 어긋나는 발언이 금지됩니다.
곰돌이를 향해 다음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차오르던 상념들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한순간에 달아올랐던 머리가 냉정해진 기분이었다.
‘지금 필요한건 이런 질문이 아니야.’
더 이상 서포터에게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건 고작해야 이런 질문같은게 아니었다.
조용한 곳에서 둘만이 남아있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나와 서포터 사이에 필요한 질문은 한마디면 충분했다.
“서포터. 너는 내 편인가?”
나는 푸른 안광을 흘리는 서포터와 눈을 마주한 채로 물었다.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질문.
그럼에도 서포터 자신의 의사로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서포터에게 꺼낼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질문이었다.
나에게 질문을 받은 서포터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서있더니, 이내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알레테이아 서포터는 언제라도 단장이 내리는 명령을 이행할 것임.”
“내가 더 이상 단장으로 남아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단장이 혼자서 자신의 역할을 저버리는 것은 불가능함.”
평소와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을 들려주는 서포터였다.
허나, 나는 그런 서포터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서글퍼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 “단장이 단장으로 남아있지 않다면, 지금처럼 계속 명령을 이행하는건 불가능한 일임. 그래도 좋은 친구 정도로는 남아있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음.”
“좋은 친구라······.”
서포터의 이야기를 듣던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열심히 제 역할을 다하던 녀석이었다.
나는 서포터의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받아들였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한거겠지.’
그 이상을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서포터가 나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서포터의 조언을 받아서 하는 행동이, 무언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내 선택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온전히 그 대가를 감내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보기 위해서 찾아온 목적이 있겠지. 이야기해도 좋다.”
혼란스러운 사고를 일단은 한편으로 밀어두고서, 나는 곰돌이에게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곰돌이가 지금에서야 내 앞에 나타난 이유.
그 행동에 무언가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인지, 곰돌이는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제5석, 세페이드 델타의 생명반응이 약해지고 있음.”
“생명반응이 약해졌다고? 세페이드라면 지금 임무에 나가있을텐데, 설마 세페이드의 목숨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거냐?”
세페이드의 생명반응이 약해지고 있다.
곰돌이의 이야기에 나는 세페이드가 파견된 임무에 대해 떠올렸다.
임무의 이름도 자세한 설명도 무엇하나 적혀있지 않았던 수상쩍은 임무.
그곳에서 세페이드에게 무언가 문제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 “현재 진행중인 임무가 원활하게 풀리지 않는 것으로 보임.”
“임무를 진행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긴건가.”
– “임무에 투입된 전력이 임무의 목표에 비해 부족한 것으로 추정.”
–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세페이드의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될 것임.”
내 생각 이상으로 임무의 난이도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임무를 더 이상 속행하길 바라는 것도 어려웠다.
고심하던 나는 서포터를 향해 임무의 중단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진행중인 임무를 중단시키고 강제로 복귀시킬 수 있나?”
– “진행중인 임무를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함. 임무에 파견된 기사단원을 강제로 복귀시키려면 긴급 탈출 티켓이 필요함.”
[긴급 탈출 티켓(EX)].아리엣을 흡혈귀들의 나라에 파견하고서 획득했던 보상이었다.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대상으로 지정한 기사단원을 강제로 알레테이아에 귀환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긴급 탈출 티켓으로 귀환시킬 수 있는 정원은?”
– “한장의 티켓으로는 한명의 단원밖에 귀환시킬 수 없음.”
“세페이드를 빼내는게 한계겠군. 결국 아리엣이 나오려면 어떻게든 임무를 클리어하거나, 실패할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건데···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
– “단장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임무에 직접 개입할 수 있음.”
내 이야기를 듣던 곰돌이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 흘러나왔다.
“내가 직접 임무에 개입하는게 가능하다고?”
– “알레테이아의 차원전송 시스템이 부하를 견뎌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함.”
– “현재 단장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3분 57초.”
– “누적된 시간을 전부 소모하면 단장의 육체가 부하를 견디지 못할거임.”
– “해당 육체의 붕괴는 단장의 영체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동반할 수 있음.”
3분 57초.
그 시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사단장실의 벽면에 설치되어있는 시계.
한번 사용하면 다시 차오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 타이머에 적혀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대륙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했다.
“직접 개입해야 한다라···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나?”
– “지금의 단장이라면 스스로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을거임.”
“······.”
– “오직 단장만이 칠흑기사단의 단장으로 남아있을 자격이 있음.”
스윽-.
곰돌이의 통통한 갈색 팔이 나에게 수정구 하나를 내밀어왔다.
나는 곰돌이가 내민 수정구를 한손에 받아들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는 수정구의 너머.
그곳에는 언젠가의 내가 한차례 마주했을 무언가가 비추어지고 있었다.
칠흑기사단의 ‘단장’이 가지고 있을 캐릭터 정보.
이전에는 제대로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정보가, 지금은 손에 쥐어진 수정구를 통해 출력되고있는 모습이었다.
[ 캐릭터 정보 ]– 캐릭터 이름 : 단장
[ 캐릭터 고유 특성 ]– 칠흑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단원의 모든 특성을 인계받습니다.
– 현재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기사단원들로부터 공유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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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뒤틀림을 자신의 업으로 치환합니다.
하-.
눈앞에 보이는 수정구의 내용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손에 쥔 수정구에는 그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내용들로 가득차있었다.
허나, 그런 내용을 마주했기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오직 나만이 단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서포터의 말이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마냥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나는 그제서야 결심을 마칠 수 있었다.
단순히 이곳을 놓아버릴 수 없다는, 우유부단한 유예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가 해야하는 일.
그리고 앞으로의 내가 해야만하는 일.
어느쪽이든 거기에 대한 망설임을 전부 접어두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고민이 많은 편이었지.”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왔던 것들이 한번에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수정구를 서포터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툭.
서포터의 뭉툭한 손이 내가 건넨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그렇게까지 고민할만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차원요새 알레테이아.
이 장소는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칠흑기사단의 동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 목표가 거대한 사명을 짊어지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조금은 막혀있던 머리가 풀린 느낌이야.”
칠흑의 바다로부터 위신을 막는 사명을 짊어지는 자.
그렇기에, 칠흑기사단.
나는 이 세계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단장으로서의 자신을 놓지 못하고 있다.
분명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사단의 단원들과 정이 들었다던가.
게임의 탈을 쓴 이 세계가 마음에 들었다던가.
알레테이아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던가.
매일같이 수많은 감정들이 쌓여버려서, 이제는 내려놓지 못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서포터, 명령이다. 포탈을 열어라.”
허나, 그 모든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고 말았다.
추억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보다도 더 원초적인 감정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치기어린 꿈을 꾸던 순간부터 내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던 불꽃.
어른이 되어 차갑게 식어버린 채로, 사회의 쓴맛을 연달아 맛보면서도, 그럼에도 완전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던 이상.
이 감정은 거창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불꽃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사람의 인생은 때때로 화려한 불꽃처럼 한순간 타오르고서는 사그라든다.
저마다의 불씨가 타고 남은 자리에는, 그을음이 가득한 잿더미만이 남아있을 뿐인 정경.
나는, 스스로 불꽃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