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14
“걱정하지 마. 물론 상시 투여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는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디에 있는지?”
페르미의 말을 들어 보니 단순히 회복실을 뜻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시로네는 퍼뜩 깨달았다.
“설마?”
발할라 액션의 채무를 없애고 깨어났을 때 미로에게 들은 내용이 있었다.
“그럼 채굴 상황을 확인하러 가 볼까?”
페르미가 비어 있는 침대를 가리키더니 콩알처럼 작은 알약을 던졌다.
“이게 뭐야?”
“드림 스타. 알잖아? 아, 거기까지 기억이 지워졌나? 너도 참 철두철미하군.”
“내가 이 약을 먹은 적이 있다고?”
시로네는 드림 스타를 자세히 살폈으나 기시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직접 보겠다고 박박 우기는 바람에 같이 갔지. 뭐, 그때는 나 혼자 고군분투하던 시기였지만. 어쨌든 할 거야, 말 거야?”
생각에 잠겨 있던 시로네는 알약을 움켜쥐고 페르미를 따라 침대로 갔다.
비어 있는 침대에 나란히 누운 시로네가 상체를 세우며 물었다.
“이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지?”
“꿈에서 이탈해서 언더 코더로 들어가지. 그 전에 어드레스 일치를…… 아니, 일단 먹어. 메커니즘 대충 알잖아. 그때도 한 번에 했어.”
‘언더 코더라.’
페르미가 먼저 침대에 눕자 시로네도 드림 스타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알약 표면의 수면제가 먼저 위장에 녹으면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강제로 뇌를 각성하면 얼마든지 깰 수 있지만 시로네는 약효에 몸을 맡겼다.
현실의 감각이 사라지고…….
“응?”
수많은 시체 속에 파묻힌 꿈속의 감각이 시로네의 오감과 연결되었다.
정보의 무덤 (2)
시작부터 악몽이었다.
‘드림 스타의 영향인가?’
야훼의 정신에 불안감이 깃들기란 쉽지 않은 일, 아마도 뇌의 화학작용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몸을 일으키자 지평선 끝에서부터 수많은 시체들이 벽을 이루며 다가오고 있었다.
“흐오오오!”
건조해진 내장을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시체들이 한목소리로 울었다.
“야훼여, 너로 인해 죽은 자들을 아는가? 네가 구원하지 못한 자들을 아는가?”
시로네의 죄책감.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이상의 이면에는 지금 당장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삶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드림 스타를 먹기 전에 페르미에게 들었던 말이 무의식에 남은 모양이었다.
“너도 당해라. 우리의 고통을, 울분을!”
시체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와중에도 시로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꿈.’
그들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고 싶은 것이었다.
“뭐 하고 있어?”
썩은 시체들 사이에서 나타난 페르미가 시로네의 꿈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흐음, 애늙은이처럼 눈에 힘만 주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네?”
“헛소리하지 마. 네가 꾸민 짓이잖아. 도대체 나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그렇게 말해도, 최고의 약물 디자이너가 개량한 차세대 드림 스타야. 공포와 에로스는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드레스 일치가 쉽거든.”
페르미의 말을 인식하는 순간 시체의 형태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물론 전에도 흐릿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모든 게 정신의 작용이었다.
“우우우……. 우우우우!”
너덜너덜한 옷 사이로 가슴이나 생식기 같은 것들이 언뜻언뜻 비쳤다.
시로네가 찜찜한 표정을 짓자 페르미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두 가지가 섞이면 이렇게 되지만.”
시로네는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야? 언더 코더는 드리모의 경계선 밖에 있잖아.”
“아무것도. 드림 스타가 위장에서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면 돼. 뇌가 반쯤 각성하면 꿈이 붕괴될 테니까, 그때 언더 코더로 가는 거지.”
간편한 방식이었지만 대기하는 장소가 악몽이라는 게 문제였다.
지척까지 다가온 시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장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로네의 정신이 사건의 전개를 막고 있기 때문.
꿈의 진행을 막는다는 것은 프로 다이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르미가 눈웃음을 지었다.
“많이 달라졌구나, 그 신입생 애송이가.”
마법학교 시절.
“참 많이 싸웠지. 그때는 촌티가 풀풀 났었는데, 이제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니.”
“너랑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꿈에서 시간개념은 뒤죽박죽이 된다고. 몰입하면 현실보다 빠르지만, 이런 식이라면 언제까지 기다릴지 알 수 없어.”
페르미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졸업반 생존 테스트가 떠오르는군. 얼음물에 갇히고, 칼날에 잘리고……. 그때 우리가 7단계까지 갔던가? 아, 나는 6단계에서 물러났었지.”
“크르르르르!”
시체들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7단계에서 네가 죽을 줄 알았거든. 통과할 줄 알았으면 끝까지 쫓아가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뭐…… 나름 억울하달까? 어쨌든 나는 패배자지만, 여긴 꿈속이니까.”
페르미가 손을 내밀었다.
“돌이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섬뜩한 살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시체들이 시로네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활로는 허공에 있지만, 날아올랐다가는 페르미의 요격에 당할 터였다.
‘광폭.’
빛의 폭발에 휘말린 시체들이 찢어지면서 살점이 수십 미터를 날았다.
열린 시야 속에서 페르미가 감가상각의 거래로 만든 칩을 낚아채 입에 넣었다.
“즐겨 보자고.”
규정외식-무인 저격.
다음 순간 허공 374군데에서 쏘아진 수백 발의 탄환이 시로네를 향해 쏘아졌다.
‘레일건이라는 거다.’
전자기장을 통해 가속시킨 탄환의 속도는 대마법사라도 반응하지 못할 터였다.
“크윽!”
핸드 오브 갓이 시로네를 쓸어 담는 것과 동시에 탄환이 지상에 처박혔다.
충격파가 지축을 흔들었다.
“크아아아!”
시체들의 살점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자리에 시로네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흐음, 못 보던 거네? 일종의…… 마음의 기술인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빛의 손을 올려다보며 페르미가 미소를 지었다.
눈빛은 호의적이었다.
“내 마음을 율법처럼 속인다는 거로군. 좋은 능력이야. 하지만 두 번은 안 통할걸.”
“그래?”
진심 어린 살기를 느낀 시로네도 진심으로 대했다.
“어디 한번 해볼까?”
핸드 오브 갓이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거대한 포톤 캐논이 탄생했다.
초고속 탄환과 강력한 대포.
“…….”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페르미는 태연하게 핸드 오브 갓을 살피고 있었다.
‘스케일을 이용해 위력의 한계를 초월했군. 시로네답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나라면 조금 전의 속임수를 더 계발했을 거야.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활로는 있는 법이지. 반면에 그 기술은 상황만 맞아떨어지면 100퍼센트 적을 제압할 수 있거든. 두 번째 활용에서 약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그게 또 트릭의 묘미잖아?”
시로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마법을 연구하든 무슨 상관이야? 네 마법이나 신경 써.”
“크크, 하긴 그렇지.”
페르미가 돌아서고 잠시 후 대지가 진동하며 풍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꿈이 붕괴되는 것이었다.
“몰입하면 시간이 빨리 흐르지. 이제야 약효가 도는 모양이군. 슬슬 출발하자.”
시로네는 핸드 오브 갓을 해제했으나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싸움을 걸었다고?”
“뭐, 겸사겸사.”
도무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언더 코더에서 빛으로 풀어진 두 사람은 푸른 선을 따라 중간층에 도착했다.
수많은 거울이 있는 방에서 시로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디 어비스. 정보의 무덤이자 세계의 종착지. 그래서 아포칼립스라고도 부르지. 친숙할 텐데?”
시로네의 서명을 위조하기 위해 폐기된 정보를 복구시켰다는 얘기는 들었다.
중간층을 빠져나온 그들은 디 어비스로 가는 거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경계가 역전되면서 시로네의 눈에 아포칼립스의 세계가 빠르게 밀려들었다.
“이건……?”
높은 고지에서 내려다본 시로네가 멍한 표정을 짓자 페르미가 물었다.
“왜? 예상과 달라서 놀랐나?”
확실히 그랬다.
‘미로 씨는 아포칼립스가 멸망한 미래 세계를 구현한 장소라고 했지. 하지만 이건…….’
눈에 보이는 풍경 전체가 원질을 알 수 없는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다.
“저게 뮤커스라는 건가?”
“그래. 나네가 광자계를 이탈한 이후로 아포칼립스는 뮤커스로 완전히 뒤덮였어. 조사 결과 지상의 98퍼센트 이상이 점액질이야.”
페르미가 주위를 가리켰다.
“알다시피 디 어비스는 정보의 종착지다. 현실 세계를 기준으로 구현된 종말의 현장이지. 내 생각에 이건 현실에서의 셀 버스터를 예고하는 것 같아.”
시로네는 제법 놀랐다.
“어떻게 그런 정보를 다 알고 있지? 오메가의 로그에서도 아주 오래전의 기록인데.”
“세월이 흐르면 왕의 은밀한 일기장도 서점에 걸리는 법이지. 지금 너도 나에게 발설하고 있잖아? 그러니 미래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알지 않겠어?”
“미래?”
그 순간 깨달았다.
“설마…… 너?”
참으로 발칙한 생각이 아닌가.
“그래. 디 어비스에는 끝없이 미래가 퇴적된다. 따라서 이곳에 오래 존재한 물건일수록 우리의 현실에서는 가까운 미래가 되는 거지. 그렇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예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걸 시간의 채굴이라고 불러.”
시로네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부터 아포칼립스를 샅샅이 조사했다. 산속 깊은 곳에 버려진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을 주운 적도 있지. 하지만 그것은 아직 현실에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정보다.”
이곳의 쓰레기가 현실에서 금이 되는 아이러니.
“그런 정보들을 있는 대로 수집해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고 대비했다. 감정병도 그중의 하나야. 물론 네가 나와 거래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도, 나에게서 이 설명을 듣고 난 뒤다.”
“알겠어.”
시로네는 당시의 판단에 확신을 가졌다.
“거래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게.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정보를 수집한 거지? 쓰레기라고 해도 근미래가 담긴 정보는 찾기가 어려울 텐데.”
페르미가 후 하고 앞머리를 불었다.
“정말 고생했지. 혼자서 하려니까 답이 안 나오더군. 그래서 고용한 거야, 앵무 용병단 전체를.”
“마르샤 누나가 여기에 있단 말이야?”
미소를 지은 페르미가 뮤커스로 뒤덮인 저지대를 엄지로 가리켰다.
“가 볼래?”
하늘을 날아 도착한 곳은 거대한 굴착기가 세워져 있는 도시의 복판이었다.
용병단의 간부들이 철제 상자 위에 앉아 술을 마시는 가운데 굴착기 옆에 마르샤가 있었다.
페르미가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좀 어떤가요?”
“어라? 페르미, 네가 여긴 어쩐 일…….”
시로네를 발견한 마르샤가 말을 멈추더니 이내 화색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이야, 시로네! 얘들아! 이리 와 봐. 유명인 오셨다!”
이제는 세계를 상대하는 용병단이지만 시로네의 등장은 역시나 파란이 컸다.
“시로네라면 야훼잖아? 부단장, 예전에 저 녀석하고 붙은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눈썹이 없는 프리먼이 상자에 팔을 기대며 술병을 입에 물고 말했다.
“……나하고 붙은 건 아니지만.”
마르샤가 시로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이 녀석! 어째 전보다 더 멋있어졌네? 역시 남자는 파워가 있어야 돼. 그렇지?”
마르샤는 어떤 말을 해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여전하시네요. 잘 지내시죠?”
“히히! 나야 뭐, 팔자에도 없는 일 하느라 죽겠어. 탐정에, 도굴에, 이제는 공사까지. 채굴 노래를 부르다가 진짜 채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마르샤의 얼굴은 전보다 초췌했으나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했다.
“이 기계로 뮤커스를 뚫는 건가요?”
“응. 지금은 잠시 쉬는 중이지만. 어차피 소용없을 거야. 뚫어도 다시 재생되어 버리거든.”
페르미가 물었다.
“가장 높은 건물마저 사라질 정도면 상당한 두께겠네요. 끝까지 가 봤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