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17
‘이건 좀 싫은데.’
서국 랭킹 1위이자 전체 랭킹 1위인 오퍼레이터를 일대일로 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좋아!”
시로네가 소리쳤다.
“너,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하이 기어인지 뭔지 아주 박살을 내 줄 테니까!”
하이 기어(HIGH GEAR) (1)
오퍼레이터가 음성 대화를 종료한 즉시 시로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
페르미는 깨달았다.
“너, 이런 거 해 본 적 없지? 오퍼레이터의 레벨은 487이야. 레벨 항목에서 전체 랭킹 4위라고. 반면에 너는 1부터 시작해야 되지. 설마 하이 기어에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어. 하지만 직접 싸워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잖아?”
마그네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좋아, 들어 봐.”
페르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이 기어는 레벨이 오를 때마다 보너스 스테이터스를 얻을 수 있어. 레벨은 크리처를 사냥하면 올릴 수 있는데, 보통은 플레이 시간에 비례하는 편이야. 사망 페널티가 크기 때문에 자신의 레벨보다 낮은 크리처를 잡는 게 이득이거든. 그런데 오퍼레이터는 사용자이면서 운영자란 말이야. 이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플레이 시간이 짧다고?”
“그래. 다른 사용자에 비해 훨씬 짧아. 그럼에도 랭킹 4위를 유지하고 있어. 이는 엄청나게 효율적인 사냥을 한다는 뜻이고, 바꾸어 말하면 단순히 레벨과 장비에 의존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물론 장비는 최상급이지. 거기에 487이라는 보너스 스테이터스가 작용한다고.”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리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오퍼레이터를 꺾어야 디 어비스를 채굴할 수 있잖아.”
“아니, 불리, 그런 게 아니라…….”
페르미는 말을 멈췄다.
여태까지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경험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일 테지만.
‘하이 기어에서 이를 악무는 건 아무 소용 없어. 시스템상의 숫자가 전부라고.’
더 간절하다고 수치가 바뀌는 게 아니다.
“됐고, 일단 플레이 해 봐.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생각이 바뀔 테니까.”
시로네는 마그네티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들어가면 되죠?”
“제가 튜토리얼로 전송시킬 것입니다만, 그 전에 사용자 코드를 만들어야 합니다. 원하는 코드명을 말씀해 주세요. 단, 이미 다른 사용자가 선점한 코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어차피 오래 있지도 않을 세계에서 코드명이야 아무래도 좋을 듯했다.
“그거야 뭐 대충…….”
“코드명은 신중히 정하는 게 좋아요. 하이 기어의 커스터마이징 기능은 80퍼센트가 무료 콘텐츠라 외형만으로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코드명이 곧 사용자의 얼굴이 됩니다.”
페르미가 덧붙였다.
“마음에 드는 걸로 해.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하이 기어 안에서도 중요한 요소니까.”
“그럼 시로네로 할게요.”
본명을 사용하는 건 말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경우도 아니었다.
“좋아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화면을 조작한 마그네티가 고개를 저었다.
“중복 코드입니다. 이미 시로네라는 코드명을 가진 사용자가 있어요.”
“네?”
시로네는 황당했다.
“누가 제 이름을 쓰고 있다고요?”
“사실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는 흔해요.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가명이 되니까요. 시로네 같은 경우라면 상당히 높은 가치로 거래될걸요.”
“거래까지…….”
“정 본명을 원하시면 뒤에 숫자를 붙이는 건 어떨까요? 시로네1234, 이런 식으로요.”
그건 좀 아닌 듯했다.
“제가 시로네인데 가짜를 쓰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아리안 시로네는 어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복 코드입니다.”
슬슬 울화통이 터지려는 그때, 페르미가 제안했다.
“야훼는 어때? 물론 당연히 중복이겠지만, 적어도 숫자는 붙일 수 있잖아. 특정 경지니까 말이야.”
단지 본명을 쓰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지만 시로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이 내려지기도 전에 마그네티가 확인했다.
“중복 코드입니다. 굉장하네요. 야훼1부터 야훼12까지 전부 중복이에요. 야훼13은 어떠세요?”
“…….”
대체 누구야?
“야훼라는 이름 하나에 이렇게 많으면, 대체 하이 기어의 사용자가 얼마나 된다는 거야?”
페르미가 말했다.
“꽤나 많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야. 저건 전부 유령 사용자들이지. 현실의 인간을 데려와 미리 선점해 두는 거야. 부랑자나, 큰 빚을 진 사람들 말이야. 사용자가 현실에서 사망하면 선점이 풀리거든.”
시로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깟 코드명 하나 팔려고 사람을 죽인다고?”
“모르지, 그깟 코드명일지는…….”
마그네티가 말했다.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야훼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추천 코드를 말씀드릴게요. 사용자의 특정 패턴을 분석한 것 중 아직 선점되지 않은 코드입니다.”
마그네티는 추천 목록을 읽었다.
“내가 진짜 야훼다. 야훼짱짱맨. 야훼 내가 그냥 바름. 여자 야훼. 가증스러운 야…….”
“그만.”
마그네티가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인기네요. 이게 추천 코드라면 이미 쓸 만한 코드명은 전부 선점됐다고 봐야겠어요. 하긴, 그만큼 유명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요.”
페르미가 가리켰다.
“1위는 괜찮잖아? 내가 진짜 야훼다. 4위에 있는 여자 야훼도 좋은 콘셉트야. 성별은 유료 콘텐츠를 이용하면 바꿀 수 있으니까.”
“싫어. 싫어.”
페르미는 피식 웃었다.
“뭐, 어쨌든 하이 기어에 몰입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나쁘지는 않군. 그럼 이 방법은 어때? 플래티넘 코드명을 구입하는 거야.”
마그네티가 바로 덧붙였다.
“플래티넘 코드명은 유료 콘텐츠예요. 코드명이 황금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중복되더라도 상관이 없죠. 물론 여기서도 선점 경쟁이 치열하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괜찮은 코드명을 얻을 확률은 상당히 높습니다.”
“얼만데요?”
“1억 은하입니다.”
페르미가 추천인 보상으로 받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구매 한도가 정해져 있어서 딱 한 번만 가능해요. 다시 말하지만, 코드명은 하이 기어 내에서 사용자의 얼굴입니다.”
“흐음. 1억 은하의 가치는 어느 정도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낮지는 않아요. 욜가의 아들 님이 받은 1억 은하는 추천인 보상에서는 최고 액수예요. 추천인의 랭킹에 따라 보상 금액이 달라지거든요.”
마그네티가 검지를 들었다.
“하지만 1억이 높다고도 할 수 없는 이유는, 가치란 기준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1점짜리 음식이라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1억 점짜리 음식도 있죠. 희소성이 기준이 될 때는 사치의 한계가 없으니까요. 하이 기어도 마찬가지라, 미세한 성능 차이로도 1억 배 이상 가치가 뛰기도 합니다.”
페르미가 말했다.
“플래티넘으로 해. 추천인 보상으로 받은 돈이니 너에게 쓰는 게 맞지만, ‘정상적인 화폐 교환’을 하려면 특정 구간을 클리어 해야 되거든. 무엇보다 오퍼레이터를 꺾는 게 목표라면 1억 은하로는 과자값도 안 될 거야.”
“하하! 그건 그렇죠.”
마그네티가 눈웃음을 짓더니 금세 표정을 감췄다.
“그럼 플래티넘으로 코드를 검색해 볼게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야훼는 이미 선점되었지만 야훼2는 사용 가능해요. 야훼3도, 야훼4도 선점되었는데 야훼2가 비었다는 것은…….”
페르미가 말했다.
“사용자가 사망했을 경우겠지.”
“네. 사실 심령권이 열린 뒤로 상당히 많은 코드가 말소되었어요. 물론 그 반대급부로 선점도 늘었지만요. 아마도 이건 최신에 말소되었을 거예요.”
페르미가 시로네에게 권했다.
“이걸로 하는 게 어때? 오리지널은 아니라도 이 정도면 1억 은하를 투자할 가치는 있어.”
시로네의 눈이 퀭해졌다.
“야훼2…….”
어째서 사람들이 코드명에 집착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마그네티가 위로했다.
“내키지는 않으시겠지만 희망은 있어요. 바로 듀얼 항목의 랭커가 되는 거죠. 100위 안에만 들면 코드명을 바꿀 수 있는 특전이 생겨요. 설령 다른 사용자의 코드명이라도 랭커에게 독점권이 생기거든요.”
“네, 야훼2로 할게요. 코드명은 뭐가 됐든 좋으니까 이제 들여보내 주세요.”
페르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나도 슬슬 접속할게. 튜토리얼이 끝나면 곧장 아토그램이라는 도시로 와. 내일 저녁, 그곳의 자유 광장에서 만나는 걸로 하자.”
마법이 없는 세계였기에 아무리 빨리 이동해도 반나절은 걸릴 거리였다.
페르미가 마그네티에게 요청했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화신의 기억으로 보내 주시죠. 코드명 욜가의 아들입니다.”
“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되어 있는 장소는 벽력의 산맥, 거대 기계의 무덤입니다.”
페르미의 발밑에 원형의 푸른 빛이 생성되더니 육체가 허공으로 분해되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던 시로네가 마그네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야훼2를 사용자 코드로 등록하겠습니다. 화신의 스캔이 끝나면 자동으로 이동합니다.”
시로네의 발밑에도 원형의 고리가 생겼으나 페르미처럼 빠르게 분해되지는 않았다.
묘한 구속감이 느껴졌다.
“좀 거북한데요?”
“역시 예민하시네요. 하이 기어에 접속하는 사용자는 화신에 특별한 코딩이 들어갑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뮬레이션상의 수치를 연동시킬 수 없어요. 화신에도 제약이 가해집니다. 일종의 잠금장치로, 그게 없으면 이벤트를 발생시킬 수 없어요. 또한 자의로 시스템을 파괴할 경우 불법 사용자로 간주되어 모든 권리가 박탈되니 주의하세요.”
“그런 일이 흔한가요?”
“아뇨. 하이 기어 역사상 화신술로 시스템을 파괴한 사용자는 전무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니까요.”
진짜 야훼였다.
설명이 끝났을 무렵 시로네의 화신이 거품처럼 풀어지기 시작했다.
떠나기 직전, 할 말이 떠올랐다.
“저기, 마그네티 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덕분에 오퍼레이터와 연락을…….”
“또 그런다.”
마그네티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눈웃음을 지었다.
“얘기했을 텐데요? 여긴 가짜 세계라고. 가짜 이름, 가짜 얼굴, 온갖 거짓이 판치는 곳이에요. 그 점을 간과하면 아무리 강해도 꽤나 고생할걸요.”
“하지만 제 진심을 알아줬잖아요. 마그네티 씨는 현실에서도 좋은 사람일 거예요.”
“……영광이네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시로네 씨,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비록 세계는 가짜지만,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자들은 진짜라고. 현실에서 우리는 수많은 제약에 묶여 살죠. 자신의 이름에,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을 꾸미고 감춰요.”
“…….”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게 없어요. 생물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하이 기어의 세계입니다. 오늘과 같은 일을 기대하지 마세요. 시로네 씨도 철저하게 야훼2가 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부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시로네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스며들고 빛의 입자들이 천장으로 승천했다.
텅 빈 성안에 마그네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규 사용자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하이 기어(HIGH GEAR) (2)
***
시로네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무토막처럼 몸이 굳은 상태에서 어딘가로 빨려 드는 관성이 느껴졌다.
전선을 타고 흐르는 듯한 푸른 빛이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암전이 찾아왔다.
‘이벤트가 시작되는 건가?’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을까?
쿠르릉. 쿠르릉.
천둥소리에 눈꺼풀을 열자 구정물 같은 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보였다.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자 눈이 반쯤 감겼다.
“히히히! 찾았어! 들개를 찾았다고.”
발밑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려고 했으나 사슬이 목을 누르고 있었다.
‘묶여 있네.’
굵은 사슬에 온몸이 칭칭 감긴 채 판자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판자에 묶인 긴 사슬을 어깨에 걸친 남자가 진흙탕 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감히 내 업적을 무시해?”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시로네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했다.
‘흐음, 역시 마법도 화신술도 안 되네.’
화신에 위증은 불가능.
시로네가 직접 결정한 일이기에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거…… 끊을 수도 있겠는데?’
야훼의 경지로 작심하고 덤벼들면 파괴하지 못할 코드는 아닌 듯했다.
‘그렇더라도 정말 강력한 코드야. 코딩 실력은 슈라를 상회하는 것 같은데.’
만약 여기서 사슬을 끊고 일어나면 남자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어차피 볼 수 없겠지.’
설계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순간 이벤트 자체가 정지되어 버릴 공산이 컸다.
“날…….”
그때 시로네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이 자식! 빨리 풀어 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히히히! 깨어났나?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앞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싫어! 내가 사는 곳으로 돌려보내 줘!”
“이미 늦었어. 그러게 왜 폐기장에 기어들어 와? 쥐새끼답게 건물 안에서나 살 것이지.”
“으아아아! 으아아아!”
시로네는 고개를 흔들며 몸부림쳤다.
‘어지러워.’
여전히 마음은 편안했으나 시야가 통제되지 않는 것이 약간은 생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