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2
팔다리가 절단될 수도 있는 평가를 앞두고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리안이 태연하다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하긴…… 그때도 그랬지.’
두 사람이 친해진 건 수습 기간 때였다.
검사란 천성적으로 전투를 좋아하고, 피 끓는 혈기가 300명이나 모였으니 첫날부터 분위기는 살벌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교관들도 막사 내의 일에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해진 수순으로 몇몇 이리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서열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스키마를 익힌 자들이 1그룹, 육체 능력이 강한 자들이 2그룹,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이 3그룹이었다.
문제는 3그룹에도 들지 못하는 생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검에는 관심도 없지만, 가문과 부모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들어온 소년들이었다.
1그룹의 리더인 리차드 파이거는 그런 소년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원래부터 포악한 데다 그런 행동들이 자신의 권위를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이었다.
테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력으로는 그녀도 1그룹이지만 300명 중에 고작 10명밖에 없는 여성들은 남자들의 서열 경쟁에서 자유로웠다.
당시 리안의 위치는 2그룹의 중간.
이 정도면 괴롭힘을 당할 위치는 아니지만 리안은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검술학교에 지원한 이유는 하나.
졸업장 따위는 상관없었고, 실력을 키워서 시로네에게 어울리는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야! 달려! 더 빨리!”
“히히힝! 히히힝!”
지옥 같은 훈련이 끝나면 막사에서는 1그룹의 생도들이 약한 생도의 등에 올라타 경주를 벌였다.
개중에는 인상을 찡그리는 생도도 있었지만 대부분 실제 경마를 보듯 응원에 열중이었다.
실제로 돈이 걸린 경주인 데다 자칫 싫은 티를 냈다가는 1그룹 밑에서 달리는 말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더 빨리! 이긴다! 내가 이겨!”
선두를 달리는 파이거는 신이 났다.
어떤 일에서건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라 장난으로 하는 경주라도 최선을 다하는 그였다.
결승선이 눈에 들어오자 몽둥이질이 더욱 강해졌다.
경주마가 된 생도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에 피가 나도록 기어야 했다.
“히히힝! 히힝!”
“아싸! 내가 1등……!”
결승선을 통과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파이거의 옆구리에 발을 내질렀다.
“아욱!”
그가 경주마에서 떨어진 사이에 후발 주자들이 속속들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적당히 해라. 여기가 놀이터냐?”
이성이 날아간 파이거는 자신을 걷어찬 푸른 머리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놈이…….”
오젠트 리안.
파이거가 알기로 2그룹에 속한 놈이었다.
스카마조차 열지 못한 놈에게 일격을 당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살의로 바꾸었다.
“너, 죽고 싶냐?”
“…….”
리안은 말이 없었다.
할 얘기가 없다면 어떤 말도 지어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 자식 봐라.”
파이거가 리안에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공포에 질린 생도는 나서지 못했다.
물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태연하게 지켜보는 자들도 있었다. 테스 또한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열 정리가 안 된 모양이네.’
이곳은 검술학교.
전쟁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모인 자들이니 선별이 끝날 때까지는 모두 적이었다.
약한 전우와 전쟁에 나서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어라? 리안이잖아? 결국 사고를 쳤군.”
테스가 뒤를 돌아보자 남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여성 생도가 서 있었다.
“이름도 알아? 별로 강해 보이진 않는데.”
“약해. 근데 고집은 세지. 저번에 2그룹 애들끼리 모여서 돈을 좀 걷었어. 파이거 생일이라고. 그런데 유일하게 안 낸 사람이 바로 리안이야.”
“하하, 그래서 찍힌 거야?”
“벼르고 있기는 했겠지. 근데 리안이 먼저 행동에 나서다니, 좀 놀랐어. 의외로 다혈질이네.”
“흐음…….”
테스도 그제야 리안을 살폈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만 물러설 생각도 없어 보였다.
‘꽤 침착하네. 2그룹이면 스키마를 못한다는 건데. 확실히 왕국은 넓구나.’
감흥은 거기서 끝이었다.
점령지 사령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많은 괴짜를 보며 자란 그녀였다. 거기서 배운 건, 신념을 아무리 내세워 봤자 검이 강하지 않다면 부러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크크크, 이 자식이 벙어리가 됐나? 설마 이런 짓을 해 놓고 멀쩡하길 바란 건 아니지?”
“밖으로 나가자. 교관이 알면 평가에 좋지 않으니까.”
파이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려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놈이 오히려 눈을 피해 싸우자고 하다니.
“좋아, 원대로 해 주지. 다른 놈들도 전부 따라와. 나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 테니까.”
두 사람은 막사 뒤편의 공터로 향했다.
1그룹부터 3그룹이 파이거의 뒤편에 자리했고, 리안 쪽에 서 있는 건 그룹 외의 아이들뿐이었다.
물론 리안을 응원하는 건 아니다. 단지 파이거의 무리에 속하지 못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 리안을 원망하고 있었다.
“야! 너희들! 두들겨 맞기 싫은 놈들은 넘어와.”
파이거가 면죄부를 건네자 생도들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후하하! 한심한 것들. 어이, 리안. 이제 어떡할 거냐? 다 도망가고 너밖에 안 남았다.”
“싹수가 노란 놈이군.”
“뭐가 어째?”
“싸울 수밖에 없다면 싸우는 게 기사다. 유불리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 너 같은 건 기사의 자격이 없어.”
파이거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전쟁이 터지면 서로 개 잡듯 물고 뜯는 게 기사다.
기사도란 생존한 놈들이 자신을 포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좋아, 주둥아리만큼 주먹도 강한지 보자. 직접 상대해 주마. 안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혼자 하겠다는 건,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니까.”
리안이 말없이 주먹을 들었다. 반면 파이거는 산책을 하듯 설렁설렁 걸어왔다.
“먼저 들어와. 한 대는 맞아 주지.”
리안이 땅을 박차며 주먹을 날리자 허리를 비튼 파이거가 복부를 가격했다.
“큭!”
뱃가죽이 찢어지는 고통에 리안의 눈이 커졌다.
이것이 스키마의 위력인가?
“멍청아, 내가 왜 맞아 줘?”
리안을 조롱하는 파이거였지만 일격에 끝내지 못했다는 건 의외였다.
‘너무 방심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심을 다해 연타를 퍼붓자 리안의 의식이 멀어졌다.
맨손 대결이지만 스키마는 자체로 살인 무기였다. 마치 해머로 두들겨 맞는 듯했다.
“별것도 아닌 게.”
파이거의 주먹이 다시 복부에 처박히자 리안의 다리가 지면 위로 떠올랐다.
다시 착지했을 때는 아무리 맷집이 좋은 리안이라도 무릎이 구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에 비웃음을 날리는 그때 리안이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도 버텨?’
스키마를 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주먹에 맞았다면 정신을 잃어야 정상이었다.
“크윽!”
리안의 태클에 당한 파이거가 엉거주춤 물러섰다. 이해할 수 없는 완력이었다.
‘뭐야, 이 자식?’
애초에 이겨도 본전인 싸움. 스키마조차 못하는 놈하고 난전을 벌인다는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였다.
“이 개자식이!”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파이거가 팔꿈치로 리안의 등을 내리찍었다. 그런 다음 멱살을 붙잡고 미친 듯이 무릎을 쳐올렸다.
둔탁한 타격음이 공터를 울릴 때마다 생도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죽어! 죽어! 죽어!”
무릎 공격을 방어하는 리안의 두 팔이 떨어지자 본격적인 충격이 들어갔다.
리안은 기절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에 파이거의 눈에 불이 붙었다.
“으아아아! 짜증 나!”
발로 리안을 밀어 버린 파이거가 곧장 달려와 전신을 밟아 대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1그룹 생도들이 달려왔다.
“파이거! 그만해! 이러다 진짜 죽어!”
“놔! 죽여 버릴 거야! 죽어! 죽어, 이 자식아!”
리안의 반응이 점차 둔해지더니 마침내 움직임이 멈췄다.
파이거는 씩씩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도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를 보자 조금은 분이 풀리는 듯했다.
“똑똑히 봐 둬! 나한테 개긴 놈의 말로가 뭔지. 야, 이 자식 밧줄로 묶어!”
리안의 상의를 벗기자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 상태로 밧줄에 묶이자 파이거는 높다란 나무에 그를 매달았다.
새우처럼 매달린 리안의 얼굴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푸하하하! 완전 낚싯대에 걸린 지렁이잖아? 그러게 주제도 모르고 왜 까불어?”
이번만은 테스도 눈쌀을 찌푸렸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대결 상대에게 수치를 주다니.
군인 집안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마음의 상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으…….”
힘을 회복한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끝까지 의식은 지켰지만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원숭이처럼 바라보는 모두를 훑었다. 대부분 웃고 있었고, 그러다가 테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테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에게는 동정조차 상처가 될 테니까.
그 순간 리안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윙크했다.
“미안하군, 숙녀들 앞에서.”
“…….”
테스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이상한 감정적 화학반응은 막을 수 없었다.
“하하! 저 녀석 지금 뭐라는 거냐? 이 상황에서도 허세를 떠네? 그냥 바보였잖아?”
“야, 리안. 솔직해져라. 죽도록 얻어터진 주제에 잘난 척하면 네가 뭐 있어 보일 것 같아? 오히려 그럴수록 너만 더 쪽팔리는 거라고.”
리안의 눈빛은 담담했다.
“괜찮아, 쪽팔려도.”
“크크, 하긴 약하면 뻔뻔하기라도 해야지. 너 같은 놈들은 평생 그러고 사는 거야.”
“금방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정적이 찾아왔다.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부끄럽지 않아. 시간이 흐르다보면 오늘 같은 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은 정말 잊을 수 있겠냐?”
대답은 없었다.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기억은 아마 평생을 따라다닐 거다. 그리고 언젠가 후회하겠지. 그때 싸웠더라면, 그때 용기를 냈었더라면. 하지만 알고 있잖아? 지나간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생도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파이거의 폭력과는 다른 형태의 두려움이었다.
학기 말의 성적표(7)
“패배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하지만 겁에 질려 도망친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전쟁터에서도, 너희들은 잊지 못할 거야. 그래서 기사의 신념은 곧 목숨이다. 한번 꺾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
리안을 조롱하는 자는 없었다.
“비겁했던 기억 따위, 누구도 가지고 싶지 않은 거야. 기사라면 더더욱. 너희들이 나중에 어디까지 올라가든, 오늘을 회상하는 게 죽기보다 싫어질 날이 올 거다. 그러니 여기서 끝내. 먼 훗날 당당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리안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싸우란 말이야, 이 멍청이들아!”
생도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전장의 귀신, 최강의 검사, 강철의 기사로 불리고자 하는 욕망은 똑같았다.
‘지금 싸워야 해.’
수백 명의 투지가 동시에 일어서고, 파이거를 위시한 1그룹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파이거가 흉흉한 살기를 뿜어냈다.
“뭐야, 그 눈깔은? 나를 이기고 싶어? 그럼 덤벼! 저기 매달린 놈과 똑같이 만들어 주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파이거를 노려보는 시선은 거두어질 기미가 없었다.
테스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오젠트 리안.
검술학교 입학 후보생.
“좋았어.”
미소를 지은 테스는 몸을 날렸다.
파이거를 뛰어넘은 그녀가 나무에 안착해 밧줄을 풀자 쿵 하고 떨어진 리안이 아픈 몸으로 가부좌를 했다.
옆에 착지한 테스가 손을 내밀었다.
“리안이라고 했지? 나는 테스다. 함께 싸우자.”
리안은 그저 쳐다만 보았다. 밧줄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악수를 하겠는가?
테스의 참전이 생도의 불길을 더욱 키웠다.
여성 그룹에 속해 있지만 훈련 중에 선보이는 능력은 파이거와 호각이라고 평가받는 그녀였다.
“나도 싸우겠어! 이대로는 못 참겠다고!”
“여자한테 질 수는 없지!”
급기야는 1그룹을 제외한 수백 명의 생도들이 한데 뭉쳐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