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5
“외로워 보이더냐, 미로가?”
“당시에 저도 같은 걸 물어보았었는데, 미로 씨는 신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신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알페아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쩌면 미로는 시로네의 입을 통해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에게 전하는 것인가…….’
시로네는 알페아스를 유심히 살폈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심각한 것일까? 깊게 파고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유적도 조사하지 않을게요.”
알페아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람을 불러 두고 너무 생각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응? 아니다. 케르고 유적은 관광지이니 기회가 되면 가 보거라. 미로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대충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씀은 정말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건가요? 하지만 관광지잖아요?”
“껄껄! 다 말해 주면 재미가 없지. 다만 절대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너의 판단력을 믿기 때문에 조사도 허락해 준 것이니까.”
시로네는 말에서 뼈를 느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관광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탐색 난이도는 자신의 조사 능력에 따라 갈리게 될 터였다.
“네. 열심히 해 볼게요.”
교사동을 벗어난 시로네는 입구 쪽에서 기다리는 친구들과 조우했다.
“시로네, 무슨 얘기 했어?”
“전에 말해 준 미로 씨에 대해서.”
“아하, 그러고 보니 너 그 사람이 궁금하다고 했지? 케르고 유적이라고 했던가?”
“맞아. 그런데 교장 선생님의 말을 듣고 보니 더 궁금해졌어. 시간 내서 가 보려고.”
“아쉽네. 우리도 같이 가 주고 싶은데.”
“아니야. 방학 중에는 가족하고 보내야지.”
“쳇, 애도 아니고 누가 그것 때문에 그런대? 집에 안 들어가면 반 죽으니까 문제지.”
네이드는 상상만으로 끔찍하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이루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용뢰의 수장이니 바깥에서는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되게 궁금하다. 미로라는 사람이 우리 연구회의 초대 회장이라니. 따지고 보면 선배님이잖아? 그럼 혹시 나도 보고 계셨을까?”
이루키가 네이드의 기대를 깼다.
“시로네가 말했잖아. 이모탈 펑션에 들어가지 않으면 접촉 자체가 불가능해. 아마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중간 차원쯤에 머물고 있는 거겠지.”
“에이, 만나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뭐, 죽기 전에는 볼 수 있을지도. 아무튼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 모두 잘 지내라고.”
이루키가 가리키는 곳에 세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메르코다인 가문에서 보낸 휘황찬란한 쌍두마차였다.
“오호, 역시 제1급 귀족. 클래스가 다르네.”
“시끄러. 다 돈 낭비야. 게다가 저건 느려 터지기까지 했다고.”
마차 앞에서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비록 한 달 뒤면 다시 볼 사이지만 막상 헤어질 시간이 돌아오자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시로네, 이루키. 보고 싶을 거야. 이번처럼 방학이 싫은 적은 처음이야.”
이루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냐? 버틸 수 있겠어?”
웨스트 가문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그는 현재 네이드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예상과 달리 네이드는 밝게 웃었다.
저번 학기하고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로네와 함께 지냈던 즐거운 추억들을 한 아름 담고 가기 때문이리라.
“문제없어. 일단 돌아가서 재정비하고, 다음 학기부터 제대로 놀아 봐야지. 모두 건강하고, 잘 지내.”
반년 동안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세 사람은 각자의 마차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좋았어! 그럼 한 달 뒤에 보자!”
***
일주일 전.
카이젠 검술학교 또한 다른 검술학교와 마찬가지로 전반기 훈련이 끝났다.
리안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으나 원체 긍정적인 성격이라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크레아스로 돌아가고 싶지만 수도에 있는 누나의 집에서 짐을 찾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왕성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그 마녀를 또 만나야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 집에 맡겨 둘걸. 성적표 보면 죽이려고 들 텐데.’
부디 레이나가 출타했기를 바라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왕성에서 인정하는 예술가답게 저택은 크고 호화로웠으나 리안에게는 쓸데없이 도주로만 긴 셈이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홀을 지나는데 희망을 짓밟듯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쳇! 집에 있었잖아?”
건반 소리가 워낙에 커서 목소리마저 묻혔다. 레이나는 홀의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그랜드피아노에 앉아 무아지경으로 연주에 임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3)
선율의 피아니스트 메르헨의 제자가 되면서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스키마의 감도는 미세한 공기압마저 감지할 만큼 예민했고, 손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건반 위를 도약하고 있었다.
그 대단한 왕족들도 찬사를 보내는 레이나의 연주.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저 소리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던 리안에게는 살인적인 소음일 뿐이었다.
“젠장, 마녀가 더 강해졌군. 하지만 이 정도 소음으로 인간은 죽지 않는다고.”
레이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특유의 입술을 삐죽 내민 얼굴을 보니 고도로 집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밤을 새웠는지 머리는 푸석했고 눈은 퀭했다. 속옷만 입고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 정도가 한계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벌써 17시간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대륙에서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장송곡이었는데, 근래 들어 난관에 부딪혀 애를 먹고 있었다.
예술가에게 장벽이란 저주이자 축복.
실력이 향상되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고 있는 레이나는 며칠이고 밤을 새우며 장벽을 뛰어넘곤 했다.
리안은 새로운 희망을 엿보았다. 누나 몰래 방으로 들어가 짐만 챙길 수 있다면 그다음에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든 벽을 부수든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좋아, 침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런 생각으로 그랜드피아노의 사각지대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이대로 계단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다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됐다. 안 들켰…….’
그때 연주가 뚝 하고 끊겼다. 희망의 빛이 사라진 리안의 귀에 레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아까부터 살금살금 뭐 하냐? 요즘 검술학교에서는 사람 웃기는 법도 가르치나 보지?”
“쳇! 봤으면 반가운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 꼴은 뭐야? 다 큰 처녀가 속옷 바람으로 피아노를 쳐? 예술을 모독하지 말라고.”
“또 까분다. 아주 저게 덜 맞았지.”
레이나는 치마를 주워 입었다.
연습 중에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옷까지 벗어 버리는 신경질적인 성격은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크크크, 왜? 뭐가 또 잘 안 풀려? 다른 사람들도 마녀의 진면목을 알아야 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나의 발바닥이 얼굴을 강타했다.
리안도 열심히 수련을 쌓았지만 여전히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다.
“퉤퉤! 더럽게 뭐 하는 거야?”
레이나가 손을 내밀었다.
“내놔, 성적표.”
리안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잘 넘어가나 했더니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도, 도대체 누나가 내 성적에 왜 그렇게 신경을 써? 이제 나도 다 컸다고. 아야야야!”
레이나가 리안의 귀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안 내놔? 오늘 아주 죽어 볼래?”
“아, 알았어! 여기, 여기!”
리안은 속주머니에 있는 성적표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휴, 저게 덜 맞았지. 대체 언제 철들려고.”
레이나는 성적표를 눈앞에 펼쳤다.
훈련 과목의 점수가 차례대로 나오고 마지막에는 전교생의 숫자와 전체 등수가 적혀 있었다.
“…….”
레이나의 손이 부들거렸다.
“꼴등?”
꼴등에서 두 번째도 아닌, 진짜 꼴등이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열심히는 하는 앤데. 왜 이런…….’
성적표를 뒤집어 전담 교사 의견란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충격에 휩싸였다.
귀하의 자녀가 최하의 성적으로 학기를 마치게 되어 유감스럽다는 말을 전해 드립니다. 현재 리안은 스키마를 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교사진은 근력이 상승함으로써 생긴 플라세보효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상상 스키마라는 현상으로, 극히 드물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의 따듯한 관심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성적표가 구겨졌다.
“어휴, 진짜! 내가 못살아!”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간 레이나가 방문을 열자 곰처럼 앉아 짐을 챙기는 리안이 보였다.
“야! 꼴등이잖아!”
“아, 몰라. 그렇게 됐어.”
“게다가 상상 스키마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상상임신 같은…… 뭐 그런 거야?”
“그런가 보지 뭐.”
남의 일처럼 대답한 리안이 하던 일을 이어 가자 레이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리안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어휴, 이 화상아! 죽어라, 죽어!”
“아야! 아파!”
“이게 그렇게 어렵니? 그냥 스키마만 열면 되는 거잖아!”
“몰라!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나도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아무튼 갈 테니까 저리 비켜. 마차 시간 놓칠 수도 있으니까.”
“가긴 어딜 가? 집에 딱 붙어 있어! 여기 일 마무리되는 대로 나도 할아버지랑 내려갈 거니까 너도 그때 같이 가!”
“안 돼. 나 약속 있단 말이야.”
“약속? 네 주제에 무슨 약속? 이 성적을 보고도 놀고 싶은 생각이 드니?”
리안은 울컥한 마음에 하마터면 시로네 카드를 써먹을 뻔했다.
하지만 끝끝내 참았다. 레이나에게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쌍쌍 여행이었다.
시로네가 여자와 함께 간다는 말을 들으면 레이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못 가도록 방해할 게 분명했다.
‘못생긴 게 질투심만 많아 가지고.’
처음에는 시로네와 누나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뜯어말려도 모자랄 기분이었다.
“무슨 약속인데? 빨리 말 안 해?”
“여자랑 약속이야. 놀러 가기로 했단 말이야.”
“여자? 검술학교에 다니는 놈이 무슨 여자를 만나?”
“거기도 여자 있어. 엘자인 테스라고, 누나도 엘자인 가문 알지? 거기 딸이야.”
토르미아의 외교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엘자인 가문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엘리트 집안의 딸이라면 당연히 콧대가 높을 터. 교내 꼴등을 하고 있는 동생하고 여행을 떠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어디서 뻥을 치고 있어? 솔직히 말해! 너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거지?”
“몰라, 신경 꺼! 그럼 난 간다!”
레이나의 잔소리에도 배낭을 꼼꼼히 챙긴 리안은 기회가 오자마자 후다닥 도망쳤다.
“야! 거기 안 서?”
레이나가 문밖으로 나왔을 때 리안은 이미 2층 계단을 뛰어내려 현관을 달리고 있었다.
스키마로 추격하면 못 따라잡을 리가 없으나 레이나는 귀찮다는 듯 내버려 두었다.
어릴 때부터 밥이었던 리안쯤이야 10만 리 밖에서도 조종할 수 있을 테니까.
“호호! 그래, 열심히 마차 타고 가 봐라.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는지 보자.”
***
네이드와 이루키를 배웅한 시로네는 오젠트 가문의 마차에 탑승했다.
본가의 부집사 테무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도 깐깐한 인상은 그대로였으나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훌륭히 해내셨군요.”
“부집사님도 오랜만이에요.”
처음에는 도련님이라는 소리가 어색했으나 반년이 지난 지금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쑥스러운 단어인 건 사실이었다.
마차에 앉은 두 사람은 시로네의 집으로 향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나 시로네는 오젠트 가문의 사람들의 근황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우와, 벌써 공인을 땄다고요?”
리안의 친형 오젠트 라이는 공인 시험에 합격했다. 물론 10급의 검사가 흔히 그렇듯이 여유를 부릴 형편은 아니었고 일선에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네. 게다가 레이나 아가씨는 왕궁 제7음악대 악장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승승장구하고 계시죠. 가주님은 여전히 공무에 바쁘시고 큰 어르신은 조만간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아하. 그런데 리안의 큰형도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뭐 하시는 분인가요?”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발언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공인 6급의 검사라고만 알고 계십시오. 주제넘은 조언이지만 본가에서도 장남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군요.”
오젠트 가문의 성품을 보면 가족 간에 불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라면 정치적인 사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은 잘 지내죠? 조만간 볼 테지만.”
테무란이 짧게 대단했다.
“반년째 연락 한번 없으십니다.”
“하하하! 리안답네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시로네는 창문을 열고 그리운 풍경을 만끽했다. 숲의 향기마저 그의 귀환을 반기는 듯했다.
마차는 시로네 집의 안마당에 섰다. 테무란이 처음 시로네를 데리러 왔을 때의 그 장소였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뵐게요.”
“집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시로네는 설레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통나무집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달 동안 효도할게요.’
문으로 다가갈수록 부모님 생각이 더욱 났다. 여태까지 고생한 어머니와, 자신을 마법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아버지.
북받친 감정으로 시로네는 문을 열었다.
“엄마! 아빠!”
“우하하하! 맞아, 맞아! 역시 맥주는 돼지고기에 먹는 게 최고지!”
“아버님도 그러십니까? 저도 양고기에는 맥주가 안 맞더라고요!”
“그렇다니까. 양고기는 비린 맛이 나서 술맛이 떨어져. 자, 자! 그런 김에 한 잔 더 하자고!”
시로네의 표정이 멍해졌다.
예상보다 축제 분위기여서 놀랐지만 진짜로 충격을 받은 이유는 빈센트와 술잔을 기울이는 거구의 소년 때문이었다.
“리안?”
“시로네!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