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65
원인, 원인, 원인.
-응애. 응애.
태어난 순간부터 누적되는 원인의 총체가 삶이라면.
***
“인간에게 결과를 결정지을 능력이 과연 존재하는가?”
피라미드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원인이 없는 자여, 너는 신이 되려 하는 것인가?”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원인은 없을지라도 의지는 이어져 있어.”
마음으로 이어진다.
“나 또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수많은 번뇌를 했지. 그 무수한 선택과 실수를 통해 이 자리에 있는 거야.”
“하지만 너는 흔들리지 않는다. 너를 이루는 모든 삶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인가?”
“부정이 아니야.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원인이 내 기억 속에 있어. 분명 혼란스럽고, 때로는 탁하기도 하지만.”
인이라 불리는 자가 손을 내밀었다.
“하찮음을 깨달아라.”
시간의 파동이 밀려드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가 아가페의 빛을 뿜어냈다.
“용서한다.”
폭발적인 광채가 피라미드 내부를 백광으로 가득 채우고, 다시금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
인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을 얕보지 마라.”
가라앉은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는 시로네는, 인을 만난 뒤로 확신했다.
이곳에 신이 있다는 사실을.
***
자신의 방에서 요양 중인 막시무스 대사제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루키아.’
언제부터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한 것일까?
‘그날 교육원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어.’
아니, 아이린을 선택했다면 루키아 또한 교육생에 불과했을까?
‘삶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초라해지는가?’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사제님. 대사제님.”
막시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들어오게.”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제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게…….”
현재 교황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들은 그의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야훼가…… 이단관리부와 충돌했다고?”
“네. 그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진위 조사를 하려고 해도 교황께서는 출타 중이시고, 접근 권한이 있는 분은 대사제님뿐이라서.”
잠시 눈을 굴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네. 내가 올라가지. 성기사들을 소집해 주겠나?”
“네. 죄송합니다, 몸도 편찮으신데.”
루키아에게 당한 부위가 치명적이기는 했지만 신성력으로 치료는 끝난 상태였다.
“걱정 말게나. 이런 일을 하라고 내가 있는 것이니.”
사제가 나가고, 막시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야훼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쯤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참으로 귀찮은 놈이야.’
성청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려는 그때 벽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머, 오늘은 바쁜가 보네?”
막시무스의 몸이 움찔하고, 잠시 후 가녀린 손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서운한걸? 오늘은 훨씬 기분 좋게 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간다고 했잖아. 걸리면 끝장이야.”
여자의 얼굴이 막시무스의 뺨에 닿았다.
아이린이었다.
“내가 싫어?”
물론 진짜 아이린은 아니지만, 그녀의 20대와 똑같은 외모를 볼 때면 시간을 거스른 기분이었다.
“너는 아이린이 아니야.”
야훼 암살 부대 카타콤의 멤버이자 사탄교의 전도사, 엘카.
인간의 마음을 거울로 비추며, 가장 원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진 마족이었다.
“호호! 그래, 맞아. 더러운 마족이지. 하지만 그 마족에게 총각 딱지를 뗀 게 누구더라?”
“흐으으.”
막시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꺼져. 나는 더 이상 악마에게 넘어가지 않아.”
엘카가 막시무스를 침대 쪽으로 밀고 갔다.
“그래, 사라져 줄게. 하지만 괜찮겠어? 감정병이 재발할지도 모르는데.”
막시무스는 남들보다 포기할 수 없는 게 훨씬 많았고, 그중에는 대사제의 직위도 있었다.
“사탄교의 교리를 따르기로 한 건 당신 아니야? 평생 동안 욕망을 억누르며 이룬 업적인데 이제 와 버릴 순 없잖아? 교황청을 떠나면 당신도 그냥 흔한 노인일 뿐이라고.”
“아니야! 나는…….”
“이건 여태까지 열심히 한 보상이야. 여전히 당신은 라미교의 대사제고, 이제는 사랑하는 여자도 생겼잖아.”
막시무스를 침대에 눕힌 그녀가 입술을 내밀자 그가 고개를 틀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괜찮아. 충분히 참았어. 60년을 참았다고.”
악은 인간의 약점을 파고든다.
“이제 그만.”
막시무스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나에게 이러지 말아 줘.”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린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아.”
정신이 무너지는 느낌에 막시무스의 눈이 돌아가고, 엘카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
“문 왕국! 입장!”
행렬이 들어오자 델타의 본청에 있는 자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자가 문왕.’
마차가 아니라 홀로 말을 타고 있는 문룡이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흥! 쥐새끼처럼 건물에 숨어 훔쳐보는가? 왕의 품격도 없는 것 같으니.”
파라스가 카샨의 원류라면, 문 왕국은 진천의 원류.
또한 그들이 가장 잘 다루는 것도 파라스와 마찬가지로 점성술, 주역이라는 학문이었다.
플루가 말했다.
“두 나라 모두 사술을 사용해요. 정보가 많지 않은 이상 주의해야 할 거예요.”
“가장 위협적인 건 파라스와 문이 손을 잡았을 때지. 용뢰에 전달해서 막도록 해.”
여전히 시로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성전은 열리지 않았어.’
복잡하게 벌어지고 있는 동시 사건에 비하면 성전 쪽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른 국가가 내성을 통과하자 시로네의 눈이 빛났다.
“구스타프 제국! 입장!”
하비츠는 조국을 버리고 카샨에 붙었지만 그럼에도 구스타프는 강대국이었다.
카샨과 맞먹는 긴 행렬이 멀리서부터 보이고, 그들이 마침내 델타의 본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비츠는 떠났다. 그럼 현재 왕은?’
최근까지 공석이라고 들었으나 대표자 없이 성전에 참가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저자는?”
마침내 눈으로 확인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각국 수뇌부가 웅성거렸다.
“구스타프 4기예? 죽은 거 아니었나?”
황제가 타고 있는 마차에 왕관을 쓴 발칸이 보였고, 그 옆에 품위 없이 앉아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시로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스모도, 제타로, 나타샤. 물론 저들의 능력이라면 구스타프를 장악할 수 있다. 정치적인 신뢰도도 상당하니까. 하지만…….’
의문인 점은.
‘왜 하필 성전에 온 거지?’
같은 생각을 한 듯, 모두의 시선이 하비츠에게 돌아갔다.
“호오?”
연회장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던 하비츠가 포도를 우물거리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들린다, 들려.”
신의 주파수를 통해 구스타프 4기예의 마음이 전해졌다.
일말의 동정도 없는 명백한 살의.
“크크크.”
하비츠가 창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빼냈다.
“나를 죽이겠다고? 네까짓 것들이?”
본청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발칸이 하비츠를 검지로 가리켰다.
“역시 있었군.”
“뭐? 벌써 왔어?”
그러자 남은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나 발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이어졌다.
“……있다. 있어.”
구스타프 4기예의 눈에 웃음살이 튀어나왔다.
“하비츠, 노올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하비츠의 얼굴은.
“크크크! 크크크크!”
“저, 저런 미친…….”
본청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성전의 규칙 (5)
‘대체 어쩌려고…….’
사탄이 살기를 드러내자 각국의 근위대장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배니싱에 걸리면 끝장이다. 그 전에 베어야 하나?’
살기만으로 목을 쳤다가는 훗날 말이 나올 테지만, 대상이 하비츠라면 얘기가 달랐다.
“흐음.”
그 순간 하비츠의 살기가 사라지더니 얌전히 우오린에게 걸음을 옮겼다.
“재밌겠어.”
다행히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지켜보는 자들은 오히려 섬뜩한 기분이었다.
‘나중의 쾌락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참는 것.’
극악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순서대로 파라스, 문, 구스타프가 본청으로 입장했다.
점차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느낀 각국의 수장들이 안전을 위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진천 제국! 내성 입장!”
해가 질 무렵 도착한 진천 제국의 행렬에서, 시로네는 진강의 얼굴을 살폈다.
‘더 야위었구나.’
딸이 지옥에 있기 때문이리라.
“진강, 만만치 않은 사내지.”
알비노가 다가왔다.
“전쟁에 피해를 입지 않은 국가는 없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두뇌는 진천우주국. 안찰이라는 여자가 이끈다고 하던데, 자네와 동문 아닌가?”
“네. 안찰은 중간에 자퇴했지만요.”
알비노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삼황계는 무너졌으나, 여전히 이 세계를 지탱하는 3개의 제국이 있어. 카샨, 구스타프, 진천. 아마 다른 국가도 이들 중의 하나와 결탁을 하려고 할 터.”
시로네는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진천의 왕과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알비노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세상사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게 어디 있나? 당장은 대의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 대의라는 것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 궁지로 몰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자네라면 더더욱.”
“알비노 씨.”
시로네는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진강은 딸을 지옥에 보냈어요. 그 딸은 인류를 구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의미는 없는 건가요?”
“자네와 싸우려는 게 아니야.”
알비노는 태연했다.
“일단 부딪치면 어떻게든 되지. 핏대 세우지 않아도 결과는 나오게 되어 있어. 마치 찬물과 뜨거운 물이 섞이는 것처럼. 문제는 그 물을 누가 마시느냐는 거야. 자네가 토르미아 국적으로 성전에 참석한 이유는 가장 잘 아는 인간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일 터. 즉, 통제하기 쉽다는 거겠지.”
“저는…….”
“신뢰라고 말하고 싶은가? 상관없네. 어쨌든 선택은 각자가 하는 거니. 자네의 가치가 월등하다면 나 또한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알비노가 돌아서며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알겠나? 무슨 일이 생길지.”
시로네가 멀어지는 알비노를 지켜보는 가운데 루피스트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