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66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어쨌든 토르미아 국민의 미래를 책임지고 이곳에 온 사람이니까.”
말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네가 토르미아 국적을 선택해 준 것은 고맙다. 야훼가 인류를 구원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국가 간의 경쟁이야. 그 순간이 왔을 때 토르미아가 몰락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알비노 씨도 그걸 알고 있는 거겠지.”
루피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너는 성전에서 가장 넓고 깊은 인맥을 가진 핵심 인물이다. 어떤 의미로는 제13국이라고 할 수 있지. 솔직히 너를 이용하고 싶다.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하지만…… 배신감 같은 말은 오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성전을 앞두고 한 번은 언급해야 했던 문제였다.
‘배신감이라.’
시로네가 생각에 잠긴 그때 아이론 왕국이 도착했다.
페르미가 남부 7왕국을 장악하는 동안 유일하게 왕권을 지킨 국가였다.
루피스트가 말했다.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성전에서도 튀지 않을 거라는 게 공론이야. 적당히 강하고, 적당히 유연하다.”
아이론의 국왕 바사크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십로회의 슈라.’
부처와 함께 월면에 있던 그녀가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루피스트가 중얼거렸다.
“어째서 아이론을 선택했을까?”
“베론이겠죠.”
시로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베론 문제.’
인간은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베론은 마지막 순간 가능성을 남겼어.’
그가 아이론 왕국에 심은 철극은 여전히 율법의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원인에 흔들리지 않는 결과. 어떤 색채도 없는 순수한 의지일 뿐이지만.’
신에 대적할 수 있는 힌트였다.
자정이 넘을 무렵 남방의 부족연합과, 열도 10왕국을 대표하는 아라크네 왕국이 도착했다.
루피스트가 말했다.
“이번 성전의 핵심적인 국가들은 아니지. 하지만 남방은 주시할 필요가 있어. 전쟁 중에 수많은 부족이 통합되었으니까. 각자의 샤머니즘이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거야. 가올드의 미친 짓으로 마족의 숫자가 줄어든 것도 있지만, 현재 유일하게 마족을 소탕한 대륙이 남방이라는 것도 유의미하지.”
시로네가 물었다.
“아라크네는 어떤가요?”
“미인이 많다.”
짧은 감상에 시로네가 루피스트를 돌아보았다.
“왜? 내 말이 이상한가?”
“세계 미인 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유명하죠. 하지만 성전 12국에 들어갈 정도면 얕봐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루피스트가 아라크네를 가리켰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하지만, 국경이 다른 만큼 각 국가의 철학도 차이가 있어. 수십 년 동안 미인에 대해 연구한 나라야. 어린아이들은 세계 미인 대회를 꿈꾸며 성장하지. 즉, 인력풀의 크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 인력은 아라크네의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에 전부 스며들어 가 있어. 접대부가 없이는 작은 계약 하나도 따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시로네는 란기를 떠올렸다.
“전문적이라는 거군요.”
“그래. 가용 인력, 경험치, 데이터베이스 등, 아라크네에서 미인계란 임기응변이 아닌 병법이야. 그리고 미인계는 때론…….”
루피스트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원소 폭탄 설계도 같은 카드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 특히 욕망의 화신이 우글거리는 정치판에서는 말이야.”
시로네는 아라크네의 행렬 속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들을 살폈다.
10명이 족히 들어갈 마차가 수십 대였고, 루피스트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지도국이 될 생각은 애초에 없겠지. 하지만 음지에서 판을 뒤흔들 여지는 충분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기는 거야.”
자이브 왕국에서 열리는 성전.
‘카샨, 구스타프, 진천.’
3개의 제국.
‘아이론, 문, 파라스.’
전통의 강국.
‘토르미아, 케시아, 코로나.’
성전에 처음 참가하는 신흥 세력.
‘남방과 아라크네.’
아직 짐작하지 못한 미지의 변수.
‘이제부터 시작이야.’
성전의 문이 열렸다.
***
연회장을 나선 시로네는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토르미아 구역으로 들어갔다.
복도부터 경비가 삼엄했고 용뢰의 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했다.
근위대가 지키는 방에 들어가자 포니와 알비노, 루피스트와 플루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었다.
“찾으셨나요?”
루피스트가 말했다.
“브리핑을 들었으면 해서. 방해했나?”
“아뇨.”
시로네가 테이블의 한편에 자리를 잡자 플루가 전방의 입식 차트로 걸어갔다.
“성전에 앞서 필수 요소들을 점검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지휘봉을 꺼낸 플루가 차트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를 가리켰다.
“성전.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들이 모여서 만든 국제연합입니다. 성전의 조직은 크게 5개로 나누어집니다. 총회의, 군사부, 경제사회부, 종교부, 국제재판부. 보통 성전이 열린다고 하면 총회의를 뜻하죠.”
지휘봉이 차트를 탁 하고 때렸다.
“군사부는 통칭 발키리로 불리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르미아 출신인 이루키가 총군사로 있었으나, 현재는 감정병을 이유로 휴직 중입니다.”
퇴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경제사회부의 수장은 국제 연금술 재단의 이사장 스미스 씨입니다. 자이브 왕국 출신이에요.”
“호의는 기대할 수 없겠군.”
“네. 다만 전쟁 이후로 권한이 상당히 축소되었다는 게 위안거리랄까요. 종교부는 라미교의 교황이 관할하고, 국제 재판부는 레드 라인 본부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알비노가 물었다.
“본부장이 누구야? 각국에서 협회장을 지낸 자들 중에서 선출한다고 알고 있는데.”
“현재는 베베토 소크라테스 씨가 역임하고 있습니다. 별칭은 배부른 돼지. 야크마 공화국 마법협회장 자리에 7년 동안 있었죠.”
“가올드는 알고 있겠군?”
“네. 저도 가올드 씨를 따라 전임 협회장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만, 딱히 관계는 좋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루피스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녀석이 누구하고는 친하겠어?”
플루가 설명을 이었다.
“성전의 산하 기구로는 세계기후기구, 세계보건기구, 세계통신국 등이 있어요. 각 기구의 파견단도 내일 행사에 참석할 것입니다.”
세리엘도 밤을 새워서 오는 중이었다.
“여기까지가 성전의 개요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의 투표 방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시로네가 표정을 고친 가운데 설명이 이어졌다.
“성전의 일정이 모두 끝나면 12개국이 모여서 동시에 투표를 하게 됩니다. 각 국가는 세 가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 롬입니다.”
고대어로 권력이라는 뜻이었다.
“롬은 자국 혹은 타국에 줄 수 있는 1표입니다.”
선택 가능한 표.
“두 번째는 가르토. 호의라는 뜻으로, 타국에 주는 1표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효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찍어야 한다는 거지.”
“네. 표는 세 장이라도 결국 투표예요. 룰을 어기면 투표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로 간주, 권한을 회수하게 됩니다.”
플루가 세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테미카. 억제라는 의미의 권한으로, 자국에 사용하지 않은 롬, 그러니까 타국에 넘긴 롬이 되겠죠. 그 표를 소거시킬 수 있습니다.”
시로네가 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토르미아가 롬의 권한을 자국에 행사했을 때는 다른 국가가 테미카로 소거할 수 없다는 거죠?”
“그렇지. 롬의 거래가 너무 활발해지면 경매의 상한선이 없어져. 쉽게 말해 나에게 줄 수 있는 1점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지만, 그 1점은 -1점에 의해 지워질 수 있는 위험까지 안게 되는 거야.”
루피스트가 말했다.
“롬이 핵심이군.”
“네. 예를 들어 아라크네처럼 지도국의 야심이 없는 국가라면 아마도 가장 비싼 값에 이 권한을 팔려고 들겠죠. 하지만 사는 사람 입장에서도 테미카라는 억제기가 있으니 대놓고 사들이지는 못할 겁니다.”
“흐음.”
저마다 생각에 잠긴 가운데 플루가 말을 이었다.
“투표 전까지 12개국은 이 권한을 자유롭게 협상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표를 받은 국가가 교황의 승인 아래 지도국이 됩니다. 산술적으로는 23표가 최대, 최소는 0표예요. 단, 결정권자는 공식적으로 자국의 대표여야 하고, 중간에 교체될 경우 선대의 권한은 취소됩니다.”
알비노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큭큭큭, 왕이 교체되는 상황이라…….”
벌써부터 피 냄새가 진동하는 듯했다.
인간의 미지 (1)
자정이 넘은 시각.
교황청의 비밀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 시로네 일행은 조명이 꺼진 어두운 통로에 잠입했다.
‘이 복도 끝에 이단관리부가 있다.’
시로네가 원하는 건 이단관리부의 실체였기에 은밀히 잠입할 필요가 있었다.
세이나의 말에 의하면 보초는 8시간마다 교체된다고 한다.
‘경지에 상관없이 성직자들이야. 정신 계열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게 나아.’
그렇게 기다린 끝에 새벽 2시가 되자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으, 졸려.”
보초를 서던 일반 사제들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시로네 일행의 곁을 지나갔다.
“빛도 없는데 보초 서는 거 말이야, 진짜 고역이야.”
“맞아. 야간 보초는 특히 그렇지.”
복도 끝에 교체 멤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별일 없었지?”
“그야 뭐, 아무도 오지 않는걸.”
사제들 중에는 이단관리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지금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시로네 일행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반딧불처럼 작은 빛에 의지하며 나아가자 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커다란 문이 복도를 막고 있었다.
새로운 보초가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분.
‘할 수 있을까?’
세이나의 걱정과 달리 시로네는 미라클 스트림을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 잠금장치로 흘려보냈다.
‘소리!’
퍼뜩 깨달은 세이나가 고개를 쳐드는 그때 잠금장치가 풀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공 마법.’
철문을 여는 순간 수많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큭.”
음파를 전부 통제한 상태에서도 시로네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신이시여! 저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
고함 소리에 이어 비명이 터지자 세이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기가…… 이단관리부?”
마치 감옥처럼 복도를 따라 철문이 설치되어 있고 하나같이 끔찍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지하라고 해도 신성한 교황청, 신의 존엄이 깃든 곳에 어울릴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나에게 세례를 받기 전이라면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야.”
세이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었어.’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단관리부의 성기사들이 이단을 어떻게 대우할지 정도는.
이제 와 깨닫게 되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지?’
교황청 지하에서 이런 비인도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가자. 이건 시작일 뿐이야.”
“시작?”
시로네는 복도의 끝을 노려보았다.
“성기사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지. 거기가 어딘지 알고 있어?”
세이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당연히 모르지. 너무 어리기도 했고, 기억이 있을 당시에는 그냥 산속의 어디라는 것 정도.”
시로네가 어둠을 가리켰다.
“이곳을 나가면 있을 거야, 성기사들의 훈련장이. 교황령에는 교황청만 있는 게 아니야. 북쪽으로 산맥이 펼쳐져 있지. 그곳에는 수많은 마을이 있어. 이단관리부의 심판을 당한 자들이 유배되는 곳.”
“그런 곳에…… 성기사들의 훈련장이 있다고?”
“우리가 확인해야 할 문제지. 출발하자.”
시로네 일행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세이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린 시절의 혹독한 훈련.’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힘든 고행이었다.
‘하지만 이겨 냈어. 오직 그 자신감으로 살아왔다. 수많은 악을 물리쳤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신성력을 되찾아야 돼. 야훼의 말대로 진실을 확인하고 직접 판단하는 거야.’
시로네의 뒤를 따라가면서 세이나는 철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었다.
“개 같은 자식아! 죽여! 죽이라고!”
화를 내는 자들.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아아, 크리아 신이시여.”
기도하는 자들.
“히히히! 그래, 더 해 봐! 나에게 천국을 맛보게 해 줘!”
웃는 자들.
세이나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건…… 이단관리부의 성기사들과 똑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