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70
친구의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세리엘은 핑곗거리를 떠올렸다.
“호호! 안 돼. 엄청 위험한 책이거든. 너처럼 면역이 없는 애들한테는 치명적이라고. 간다. 내일 봐.”
“야! 세리엘!”
에이미가 다급하게 불렀으나 세리엘은 이미 복도를 달려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정말로 잡을 수 없었을까?
문득 그런 감정이 들었으나 당면한 과제 앞에 잡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훈련해야지.”
한편 밖으로 나온 세리엘은 방해꾼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놀지 뭐.”
홀가분하게 학교를 벗어난 그녀가 도착한 곳은 허름한 서점이었다.
“안녕하세요.”
귀족 구역과 거리가 멀고, 심심찮게 어둠의 서적이 흘러드는 그녀만의 아지트.
“올 줄 알았다. 구석에 있어.”
세리엘은 큰 안경에 목도리로 얼굴을 감았으나 서점 주인은 즉각 알아챘다.
꾸벅 고개를 숙인 세리엘의 눈빛이 안경알 속에서 반짝였다.
‘있다, 원초적 올가미 후속편.’
귀족과 하녀의 전혀 아름답지 않은 사랑 이야기.
퇴폐적이고 성애 묘사가 적나라하기에 성인물로 취급되지만, 어릴 때부터 로맨스 소설을 탐독한 세리엘에게는 딱히 충격적인 것도 아니었다.
첫 페이지부터 전작의 인물들이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어느새 내용에 빠져들었다.
‘포지션이 바뀌었네.’
귀족 남자를 쇠사슬로 묶은 하녀가 채찍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이 남자의 솜털을 전부 곤두세웠다. 붉은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젤리처럼 축축한 혀가…….’
“남자의 목덜미를 핥으며?”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리엘이 책을 덮었다.
“힉! 누, 누구야!”
몸을 틀자 익숙한, 하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페르미?”
그녀가 확인차 큰 안경을 내리자 페르미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안녕?”
예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인간의 미지 (4)
***
“수석 연구원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리엘은 정신을 차렸다.
“성전에 참석할 시간입니다.”
“알았어요.”
담배를 끄고 손으로 냄새를 퍼트린 그녀는 가운을 걸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하니까.’
복도로 나가자 세계보건기구의 파견단이 기사들의 경호를 받으며 다가왔다.
“가자, 세리엘.”
“네.”
성전 본회의장은 대략 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 콜로세움을 연상케 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를 채운 가운데 성전 총회의장이 단상에 올라왔다.
“이제부터 제63회 성전 총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세계적인 사건 때마다 열린 총회의였기에 63이라는 숫자는 역사에 새겨진 나이테였다.
“오늘 이 자리는 세계 지도국을 뽑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지도국이란 모든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바…….”
연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각국 싱크탱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알비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모두冒頭 발언 시간은 각국마다 5분. 순서는 투표에 의해 토르미아는 일곱 번째로 하게 될 것이야.’
연설문은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타국의 연설에 따라서 실시간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성전 개회와 동시에 각국은 세 가지의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롬은 타국에 줄 수 있는 1표를 뜻하며…….”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각 부처의 발의 시간이 되자 발키리의 권한대행인 도로시가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발키리의 총군사 도로시입니다. 전 세계가 긴장 상태인 상황에서 군사부의 발의는…….”
아라크네 쪽에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잠깐.”
이름은 페드라, 젊은 시절 포주로 시작해 국무총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총군사가 사임했다는 소식만 들었지 권한대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발의 전에 군사부를 맡게 된 연유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소?”
도로시가 답했다.
“여자 친군데요?”
“여자 친……. 아니, 이게 무슨…….”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동의를 구하던 페드라는 모두가 조용한 것을 깨달았다.
“왜? 이거 나만 이상한 거야? 응?”
여전히 반응이 없는 가운데 각국 수뇌부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공석이라는 뜻이지.’
지도국이 되는 국가가 발키리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군사부의 발의는 평화협정에 관한 총괄적 해법입니다. 각국 지도부께서 옳은 결단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조한 박수 소리를 들으며 도로시가 내려가고, 경제사회부의 수장 스미스가 올라왔다.
자이브 출신이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국적은 상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모름지기 지도국이란 인류 번영의 비전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비경쟁으로 인해 각국의 통화가치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이에 세계은행 및 각국 중앙은행의 결단을 촉구하는 한편, 무분별한 전쟁 무기 개발에 대한 억제책을…….”
“이의 있습니다.”
네이드 그룹의 리즈가 손을 들자 의장이 말렸다.
“이의 제기는 발의가 끝난 후에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뇨, 발의 자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무분별한 전쟁 무기라는 표현은 실제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특정 국가의 산업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네이드 그룹의 주요 사업은 군수.
게다가 원소 폭탄 개발이라는 카드가 힘을 얻으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좋은 타이밍이다.’
루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회의가 진행되면 흐름은 빠르고 거칠어져. 발의를 공격하기에는 이미 늦지.’
스미스가 반박했다.
“이번 성전의 핵심은 세계 평화입니다. 전쟁 무기 억제에 대해 강도 높은 단어를 사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연히 평화를 반대하는 국가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형평성의 문제, 각국의 사정이 다르고 적용하기에 따라 특정 국가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소지가 있는 표현은 지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에 해당 표현을 삭제하거나, 해석의 기준이 명확한 단어로 대체해 주기를 바랍니다.”
스미스는 입맛을 다셨다.
“잠시 발의를 중단하겠습니다.”
의장이 허락하고, 경제사회부의 직원들이 다가와 머리를 맞댔다.
5분 뒤에 다시 단상에 올라온 스미스가 정정했다.
“건의를 받아들이는 바, ‘무분별한’이라는 표현을 ‘인류 평화에 위협이 되는’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모든 무기는 인류 평화에 위협이 되겠지만, 그렇기에 공평했다.
‘이 정도면 뭐…….’
이제부터는 하기 나름이었다.
포니가 말했다.
“잘 짚어 주었군요. 국왕이 나서기에는 면이 상하는 건의였는데요.”
리즈의 발언이 먹혀든 이유는 이번 발의에 1차적으로 타격을 입는 군수산업의 실무자이기 때문이었다.
루피스트가 답했다.
“네. 기업인이 아니면 의미가 왜곡될 테니까요. 에이플 리즈는 현 네이드 그룹의 총수입니다. 실무 경험도 있고, 지금 보면 촉도 좋은 것 같습니다.”
내로라하는 경제인이 모인 자리에서 리즈만이 나섰다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왕성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즉, 토르미아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뜻이야. 중역을 맡겨도 되겠어.’
발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리즈가 자리에 앉으려는 그때 페드라가 박수를 쳤다.
“껄껄! 여장부시구먼. 어디 회사인지 비서 하나는 잘 뒀어. 축하드리네.”
리즈가 맞받아쳤다.
“웃을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서가 아니라 네이드 그룹을 이끄는 대표이사입니다.”
페드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응? 네이드 그룹? 그럼 자네가 네이드 씨를 밀어낸 차기 총수인가?”
“아뇨, 여자 친군데요.”
“…….”
물론 그녀는 네이드 군수의 공동 창업자지만 받아치기에는 이 정도가 좋았다.
페드라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 참, 토르미아도 막장이구먼. 여자 친구? 무슨 인사를 이딴 식으로 해?”
“후후, 그러게요.”
그렇게 답한 보좌관은 생각했다.
‘너만 하겠냐? 쓰레기 같은 인간아.’
직위를 떠나 1명의 여자로서 페드라는 혐오의 극치였다.
“저놈은 뭐야, 깡패야? 여기가 무슨 시장 통인 줄 아나.”
자이브의 국왕 기스가 투덜대자 싱크탱크 ‘연막’이 고했다.
“아라크네의 실권자입니다. 밤의 정치로 국무총리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밤의 정치?”
남자가 새끼손가락을 흔들더니 엄지를 세웠다.
“아아, 그거.”
기스의 눈빛이 대번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이제 보니 힘든 일 하시는 분이었구먼. 자리 한번 만들어 봐.”
“네.”
그러는 사이 종교부의 수장인 교황 콘스탄틴이 단상에 올라왔다.
“기도하겠습니다.”
“어이쿠.”
황급히 상체를 세운 기스가 고개를 숙이더니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기도가 시작되었다.
“크리아 신이시여, 온 인류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참혹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러는 동안 시로네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될까?’
진실로 인류의 행복을 비는 자가.
‘모두가 남을 배려하면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없게 된다. 이론상 가능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오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심란하겠지.’
인간은 가이아인이 아니다.
‘포기해, 시로네. 네가 꿈꾸는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아. 왜냐하면…….’
이브가 금단의 선을 넘었으니까.
“여황님.”
간도가 속삭였다.
“그림자 무사를 배치하는 안건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싫다고 했잖아. 나랑 똑같이 생긴 인간이라는 거, 기분 나빠. 어차피 키도가 옆에 있을 거니까.”
그녀가 믿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 고블린이라는 것이 서글펐다.
“하지만 키도가 뚫릴 경우도 대비해야 합니다.”
“흐음.”
우오린은 하비츠를 흘끗 살폈다.
교황의 기도를 들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사탄의 모습이란…….
“세상의 악을 벌하여 주시고!”
교황이 목청을 높이자 기스가 눈물을 흘렸다.
“흐으윽! 신이시여.”
드르렁 코를 고는 하비츠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우오린이 말을 이었다.
“배니싱만 아니면 괜찮잖아? 이미르도 없고 리안도 없어. 알고도 못 막는 상황은 없다는 거야. 국왕 암살을 걱정해야 할 건 카샨이 아니라 타국이지.”
그녀의 시선이 시로네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단, 토르미아 쪽은 신경 좀 써. 들어오는 모든 첩보를 신중하게 처리해.”
“토르미아…… 말씀이십니까?”
“응. 쿠안을 보유하고 있다.”
유일하게 하비츠의 목을 베었던 검사.
“음지의 작전이라면 하비츠 외에 경계해야 할 건 그 녀석밖에 없어. 아니, 솔직히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
“그렇다면 더더욱 그림자 무사를…….”
“괜찮다니까.”
우오린은 다소곳한 자세로 기도문을 경청하는 시이나를 눈에 담았다.
아름답고 총명해 보였다.
“놈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기도하는 시늉을 하고 있던 용뢰의 알비노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우오린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었으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뭘 자꾸 쳐다봐. 짜증 나게.’
이유를 모를 리가 없는 그였다.
‘크크, 목덜미가 간질간질하겠지. 요인 암살의 측면에서 봤을 때 카샨의 천적은 우리일 테니까.’
하비츠와 쿠안이라는 필살의 검을 각자 지니고 있지만 토르미아는 왕이 죽어도 된다.
‘물론 위험한 일이지.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면 여론이 악화될 테니까. 그래도 급할 땐 한 번은 썰어 버려도 되는 카드인 것은 사실.’
따라서 맞교환을 한다면 치명적인 건 카샨이었다.
‘근데 다루기가 어려운 검이라서 말이야. 하긴, 그건 하비츠도 마찬가지겠다마는.’
알비노가 수염을 매만졌다.
‘아직도 정하지 못한 건가? 어리석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