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75
‘그보다 더한 짓은 못 할까?’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토르미아도 할 수밖에 없는 게 경쟁이었다.
‘그렇다고 시로네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도 좋지 않다. 이것 참 난감하군.’
루피스트는 차선책을 택했다.
“예인단의 의견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겠어. 시로네, 네가 가서 단장에게 전해 주겠나?”
“네.”
시로네도 자신이 직접 설득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연회에?”
예인단이 머무는 숙소를 찾은 시로네는 오젠트 레이나에게 서신의 내용을 전했다.
“아마도 좋은 자리는 아닐 거예요. 탐욕스러운 자들이 바글거릴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준비해서 출발할게.”
“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괜찮겠어요? 어떤 자리인지 알잖아요.”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잖아? 우리도 토르미아를 위해 싸우는 거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저들이 기대하는 건 당연히 마야일 테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내가 나서서 통제를 하면 되니까.”
시로네가 못 미더운 기색을 드러내자 레이나가 웃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왕성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누나를 믿고 맡겨. 다만 문제는…….”
레이나가 복도 쪽을 돌아보았다.
“케이든이 어떨지 모르겠어. 알잖아, 만약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움직이면…….”
“그렇군요.”
연회장이 난장판이 될 터였다.
시로네를 데리고 케이든의 방을 찾은 레이나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잠시 방에 머물러 주면…….”
“안 됩니다.”
케이든은 단호했다.
“마야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무조건 제가 지키겠습니다. 가게 해 주세요.”
“무조건이라고 한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증상을 억제할 수 없다는 건 케이든도 알고 있었다.
“검은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다.”
“어려운 자리야. 사소한 실수가 토르미아에 먹칠을 할 수도 있고. 그냥 이번에는…….”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레이나가 돌아서자 연회에 참석하는 예인들 사이에 마야가 서 있었다.
“케이든과 동행하지 않으면 저도 가지 않겠어요.”
시로네가 나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연회에 갈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야.”
시로네가 지켜 준다는 사실에 마야는 가슴이 벅찼으나,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음은 고맙지만…… 케이든과 가고 싶어.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마야.’
케이든의 표정이 멍해졌다.
물론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는지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다.
‘노력해 주고 있어.’
시로네를 잊겠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그녀 또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이다.
케이든이 앞으로 나섰다.
“맹세하겠습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가게 해 주세요.”
의지는 어느 때보다 높았고,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너도 내 몸이라면 알고 있겠지? 이번에 실수하면 정말로 잘라 버릴 거다.’
오른팔은 반응이 없었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족히 200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세계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예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토르미아의 차례는 마지막입니다. 예인들은 편하게 시간을 즐기다가 호출하면 와 주십시오.”
케이든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10분의 시간이 그들의 순서를 끝으로 밀어냈다는 것은.
‘놀랍도록 기민하다.’
마냥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점잖던 분위기는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과열되었고, 개중에는 튀는 인물도 있었다.
“푸하하하! 그래, 그래! 역시 술은 루비앙이 제일이지. 안 그런가?”
아이론 왕국의 왕자 마커스였다.
30대 초반의 호색가로, 지금도 연회장에 있는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흐흐, 그래서 내가 그때…… 응?”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마야를 보고 말을 멈췄다.
“호오?”
발키리의 예인단에 속해 있던 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야를 알았다.
“이거 유명한 분이 오셨구먼.”
곧바로 자리를 뜬 그가 술잔을 하나 더 챙겨서 마야에게 다가갔다.
“신비 마야, 맞죠?”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이미 술에 취해 풀려 있는 눈은 위협적이었다.
“아이론 왕국의 제1왕자 마커스라고 합니다.”
‘아이론의 왕자.’
직위가 주는 위압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마야는 절로 위축되었다.
“마야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자 마커스의 손가락이 마치 뱀처럼 감겨들어 왔다.
“호오, 피부가 아주 부들부들…….”
눈치 안 보고 농담을 던지려는 그때, 무서운 눈을 치켜뜬 케이든이 보였다.
“뭐야, 넌?”
이미 예고된 일이었기에 마야가 차분히 설명했다.
“제 경호원이에요. 케이든, 인사드려.”
“경호원?”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한 가지는, 여기가 상식이 통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불쾌하군. 토르미아의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되나? 예인 경호원 따위가 왕자를 노려보다니.”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만약 케이든이 마커스를 제압한다면, 그 순간 아이론이라는 적국이 늘어나는 것뿐이다.
‘참아라, 케이든. 벌써부터 아이론과 틀어지면 웃는 건 타국일 뿐이야.’
냉혹한 현실.
각국 관리들이 뱀의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케이든은 선택을 내려야 했다.
마야를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고개를 숙였다.
“제 무례를 용서…….”
그리고 그 순간.
케이든은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쳐올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심연의 깊이 (1)
케이든은 사력을 다했으나 결국 그의 주먹은 거칠게 허공을 갈랐다.
‘응? 허공?’
그의 동작이 멈췄으나 연회장의 사람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뭐야? 무슨 일이야?”
마커스뿐만이 아니라,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우오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크윽.”
시로네는 그 모습을 포착했으나 당장은 상황을 판단하는 게 먼저였다.
“혹시 조금 전에…….”
“모르겠군.”
루피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 내가 네 옆에 있었던가?”
시로네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과정. 방에서 나와 복도를 지날 때 루피스트 씨를 만났고…….’
복기를 끝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분명 움직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위치로부터 대략 3센티미터 이동한 상태였다.
또한 기억을 더욱 파헤쳐 보면 위치가 바뀐 자들 중 가장 짧은 거리였다.
‘강제로 이동당한 게 아니야.’
무언가가 움직였다면 아마도 마음일 것이다.
‘내 의지로 이곳에 온 거야. 어떤 작용이 일어났고, 그것이 내 마음을 바꾸었다.’
마치 시불상폭매처럼 2개의 사건 중 하나가 선택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따라서 시폭감이 없는 자들은 데자뷔 같은 어색한 느낌 속에 있을 터였다.
루피스트가 물었다.
“설명할 수 있겠어?”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어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규모가 너무 커요.”
시불상폭매는 시로네의 행동이 가해지는 곳에 변화가 일어날 뿐이지만…….
‘지금은 모든 자들의 위치가 바뀌었어. 한마디로 사건 전체가 뒤틀린 상황이야.’
시폭의 수준이 아니다.
“수백 명의 의지가 동시에 틀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결과물이에요. 이걸 누가 할 수 있죠?”
“……그래.”
루피스트는 턱을 괴었다.
“네 말대로 공간 이동은 아니야. 나 또한 내 의지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온 기억은 없어. 나는 분명 저 자리에 있었다.”
그는 연회장의 구석을 가리켰다.
“내 옆에 플루가 있었고, 문 왕국의 관리와 접선 중이었지. 기억은 선명해. 다만 문제는, 그럼에도 나는 내 의지로 여기에 왔다고 느낀다는 거야.”
“그게 핵심이죠.”
기억이 없는데도 갑자기 위치가 바뀐 것을 납득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와 유사한 케이스가 있어요.”
시로네는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속사검의 샤갈. 그의 삶은 라 에너미가 주입한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어요. 그 원인으로 살인귀가 되었고, 이제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결국 우리들 모두 샤갈과 똑같은 현상을 겪었다는 거로군. 정도는 다르지만.”
“네. 샤갈은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졌으니까요. 어쨌든 원인을 변화시켜 결과를 통제한다는 건, 앙케 라 수준의 권한이 필요해요.”
루피스트가 정리했다.
“즉 지금 일어난 상황은 마음, 양자 신호를 바꾸는 어떤 능력이다. 그리고 그 위력은…….”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야훼의 마음을 3센티미터나 밀어낼 정도라는 건가?”
모두의 위치가 크게 바뀐 것을 감안하면 시로네는 거의 제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어떤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하지만 그런 야훼의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는 사실은 심각했다.
루피스트가 중얼거렸다.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시로네도 같은 생각을 했으나, 이번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분명 바깥 세계의 작용이야. 정보를 공유하는 건 시기상조.’
물론 아는 자도 있었고, 아마 그중 1명은 정답까지 도달했을 터였다.
‘우오린.’
시로네가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황급히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루피스트가 물었다.
“그래. 모두의 의지가 변한 결과물이다. 마음이 틀어졌고, 나는 이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케이든을 가리켰다.
“어째서 주먹을 휘둘렀지? 마커스가 눈앞에 없는 결과라면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어야 되잖아?”
‘그래, 이건 이상하다.’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케이든은 오른손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커스가 마야를 희롱한 기억이 남아 있지만, 그가 눈앞에 없다는 것도 납득이 갔다.
‘그냥 망상을 했을 뿐이야. 저놈은 실제로 나에게 온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내가…….’
마커스를 공격하려고 했을까?
‘생각만으로 화가 났다고? 정말로 그런 거야?’
오른손은 대답이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혼란을 느끼는 가운데 페르미의 차가운 시선이 케이든을 겨누었다.
‘저거였군.’
아포칼립스에서 얻은 키워드 중에 분석되지 않은 몇 가지 중의 하나였다.
‘탈옥.’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육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현상이었다.
***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우오린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연회장의 사람들의 위치가 바뀌었을 때, 그녀의 미래시가 급격히 뒤틀렸다.
‘미래가 변했어.’
빛의 선이 요동치는 것은 눈이 멀 정도였고, 엄청난 충격이 뇌에 가해졌다.
‘시스템. 그 자체를 바꾸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가능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