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78
오망성 위에 펼쳐진 홀로그램에는 행성에서 관측 가능한 별들이 빼곡했다.
“흐음.”
단상에 앉은 키트라는 별자리를 지켜보았다.
‘상당히 까다롭군.’
우주의 관리자인 앙케 라조차 시스템을 초기화시키는 권한이 전부였다.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작업, 즉 미세 조정은 절대적인 바깥 세계의 능력.
‘조금만 틀어져도 우주의 본질이 바뀐다. 자칫하다가는 무無가 되어 버릴 수도 있지.’
연회장의 율법을 바꾼 것은 거대한 변화를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전하.”
문이 열리고 황도12궁의 점성술사가 연회장의 상태를 도면에 그려 왔다.
“운명이 바뀌었사옵니다.”
“가져오라.”
점성술사가 도면을 넘기자 키트라의 목에 걸린 독사가 그것을 물어 가져왔다.
‘어디 보자.’
점성술사가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는 짧은 텍스트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이건 뭐지?”
키트라가 가리킨 곳을 점성술사는 보지 못했으나, 짐작은 가능했다.
“적십자성의 운명을 타고난 케이든이옵니다. 헌데 그의 오른손에 탈옥 현상이…….”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일어나는 일이고, 통제할 수 없는 거니까.”
점성술사가 고개를 들자 키트라가 도면을 돌려 하나의 문장을 가리켰다.
“시로네. 내가 설계한 율법에 의하면 분명 32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헌데…… 고작 3센티미터라고?”
“마음에 통달한 자입니다. 모든 원인에서 거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렇기에 전하께서도 진리의 피라미드 탐색을 허락하신 게 아니옵니까?”
신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물론 그렇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 조만간 그는 진리의 피라미드에서 신을 영접하게 될 터. 이 정도로 관철시킨다면 오히려 내가 위험할 수도 있어.’
“바뀌는 건 없습니다, 전하.”
“하긴.”
시로네가 운명에 저항하는 힘이 강할수록 신의 좌표는 더욱 정밀해진다.
“세계의 율법을 바꾸겠노라.”
“역사하시옵소서.”
황도12궁의 점성술사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키트라가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신이 될 것이다.”
***
미로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한 꿈?”
“그래. 바다가 펼쳐져 있고, 거대한 괴물이 나오지. 네가 미로라면 모를 리가 없어.”
“아뇨. 그런 꿈은 안 꾸는데요.”
“……모른다고?”
그럴 수도 있다.
‘어차피 내 생각일 뿐이니까. 현실은 이곳이야.’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로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일까.
“잘 생각해 봐. 나는 너를 꿈에서 봤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잖아. 응?”
가올드.
꿈속에서 그 여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빠, 이 아저씨 좀 이상해. 빨리 가자.”
미로가 아빠의 손을 끌어당겼다.
“…….”
부모라면 곧바로 자리를 뜰 테지만, 세인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죠.”
아늑한 분위기의 세인의 집. 가올드와 강난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할 얘기가 뭡니까?”
마루에서 아리우스와 장난을 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인이 말했다.
“저도 그 악몽을 꿉니다.”
가올드와 강난의 표정이 멍해졌다.
“당신이 말한 그 바다, 그 괴물,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강난이 말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요. 꿈이라는 게 그렇죠.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잖아요.”
“이름이 나오잖아.”
남편의 집착에 강난은 화가 났다.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해! 그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악몽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좋을 리가 있겠는가.
숨만 쉬어도 목이 찢어지는 것 같고, 싸울 때마다 차라리 죽기를 기도했다.
가올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프지 않아.’
악몽에 비하면 천국이었지만, 문제는 미로의 환청을 떼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해합니다.”
세인이 말했다.
“저도 악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 딸도 너무 사랑하고요.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딸일까?’
그 사소한 의문 때문에 가올드를 외면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가올드가 물었다.
“미로, 아니 댁의 따님은 어째서 꿈을 꾸지 않는 거죠?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미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고집스럽기는 해도 착한 아이예요.”
착한 아이.
그 말을 음미하고 있는데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모두 모였군요.
고개를 쳐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천장의 나무가 액체처럼 볼록해지더니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내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표류 지점을 찾느라 애먹었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누구야, 넌?”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많이 옅어졌네요. 어쩔 수 없죠. 저는 몽아라고 합니다. 꿈 설계자예요. 심층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내려왔어요.”
“꿈 설계자? 심층 입구?”
알 듯 모를 듯 한 기분이었으나 머릿속에는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야훼를 설득시켜 주세요. 하루 종일 바다만 보고 있어요.”
세인이 물었다.
“바다라니. 여기에 바다가 어디 있어?”
“알고 있을 텐데요. 다들 꿈을 꾸지 않나요? 그러니까 일종의 악몽처럼…….”
분위기가 섬뜩해졌다.
“물론 알고 있지. 바다 밑에 잠긴 것도. 내 딸은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지만.”
“응?”
미로의 상태를 가만히 주시하던 몽아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랬구나.’
미로다운 판단이었다.
“일단 가죠. 시간이 촉박해요. 미로 씨도 잘해 줬지만 야훼를 깨우는 게 급선무예요. 해변에 도착하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날마다 그들을 괴롭혔던 악몽의 비밀이 풀린다면 무슨 짓이든 할 터였다.
“좋아, 가자.”
세인의 집을 나선 몽아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이 길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어. 그렇게 오래 이 도시에 살았는데도…….”
“그런 기억이니까요.”
몽아가 말했다.
“10년을 살았다는 기억을 원인으로 설정하면, 정말로 10년을 산 결과가 되어 버리는 거죠.”
“이게 우리의 첫날이라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에요.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거죠. 그런 세계예요, 여기는.”
세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전부 쓸려 나갔어요, 이미르의 정신에. 도시를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루버 님이 다급했다는 증거죠.”
철골만 남은 건물 사이로 백사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파도 소리를 직접 듣자 후련한 기분이었다.
“응?”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드는 파도 앞에 한 소년이 허탈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시로네.”
다가가 살피니 꿈에서 봤던 얼굴이었으나 눈에는 생기가 빠져 있었다.
“오대성님, 친구분들을 데려왔어요. 정신 차리세요. 다시 싸우러 가야죠.”
“…….”
몽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없어요. 행동 의지를 잃어버린 거죠.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요.”
“왜?”
“심연의 정신에 가해지는 수압을 버티기 위해 꿈의 장벽을 발동한 것 같아요. 지금 보는 해변이 그 증거죠. 바다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거든요. 어쨌든 이곳에서는 정신적 공격을 받지 않아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 일이란?”
“여러분은 이 현실에 만족하고 있지 않나요? 통합몽은 각자의 꿈이 하나로 합쳐져요. 즉, 모두의 바람이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거죠.”
“이 상황을 우리가 원했다는 건가?”
“가장 근접한 결과죠. 미로 씨는 꿈의 장벽이 발동됐을 때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기억을 전부 지운 겁니다. 그 이미지가 아이로 구현된 거고요.”
“어째서 그래야 했지?”
“가올드 씨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몽아가 검지를 들었다.
“꿈은 욕망의 성취. 만약 미로 씨가 성인이라면 가올드 씨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녀를 사랑했을 겁니다. 물론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몰라요. 모두의 욕망이 섞이면서 세인 씨의 아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요.”
세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몽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꿈에서까지 미로에게 거부당한 셈이 된다.
‘철벽이로군.’
“그래서 기억을 지운 거예요. 가올드 씨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요. 미로 씨는 그걸 바랐던 거예요.”
“…….”
“솔직히 나갈 방법은 없어요. 이곳을 나가는 순간 전부 몰살이에요. 오대성님이 뭔가 깨달았기에 기대를 걸었지만, 이 상태로는 무리겠죠. 그냥 여기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고요.”
가올드는 고개를 돌렸다.
“야호! 바다다, 바다!”
왈! 왈!
아리우스와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미로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심연의 깊이 (4)
가올드가 물었다.
“미로가 기억을 되찾을 확률은 없는 건가?”
“있어요.”
몽아는 바닷가 쪽을 돌아보았다.
아리우스를 데리고 시로네에게 다가간 미로가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아이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면,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죠. 제 생각에는 아마도 30년 정도가 필요할 거예요.”
“30년.”
꿈속에서의 가올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
‘모르겠다. 뭐가 옳은 거지?’
어쨌거나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했으니 생각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오빠. 오빠.”
미로가 시로네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말 좀 해 봐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바다를 보고 있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가올드 일행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대성께서는…….”
몽아의 얼굴이 슬픔에 잠겼다.
“현실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했어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고, 목숨을 걸고 인류를 위해 싸웠어요.”
세인이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군.”
“네. 보통 꿈의 장벽 안에서는 가장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 마련이지만, 야훼의 꿈은 사뭇 건조하죠. 그만큼 현실에서 치열했다는 증거예요.”
몽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무튼 안타까워요. 여기는 말하자면 심층 1.5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이미르를 몰아칠 수 있었는데. 그럴 능력도 충분했고요.”
시로네가 2단계에서 레비아탄에게 충격을 가한 일격은 몽아에게도 전달되었다.
‘분명 무한을 넘어섰어. 정상적인 상태라면 이미르도 쓰러뜨릴 수 있었을지 몰라.’
물론 이곳은 이미르의 꿈속이기에 100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이, 아무 말도 안 하네.”
시로네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미로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시로네의 냄새를 맡는 아리우스를 보고 강난이 물었다.
“어째서 개지? 꿈에서는 분명 사람이었는데.”
“이성을 날린 거죠. 좋은 판단이에요. 어차피 기억이 녹아 버린다면, 본능에 치중한 겁니다. 아마도 저 개는 이곳이 어딘지 직감하고 있을 거예요. 물론 인간의 생각처럼 명확한 언어로 느끼는 건 아니지만요.”
미로가 모래에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파도만이 하염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