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8
에이미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여성이 뺨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가문의 안주인 이시스였다.
소싯적에 왕국에서 이름을 알린 무용수답게 쉰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젊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철이 없다는 느낌이 더 두드러졌다.
“뭐? 시로네가 남자였단 말이야?”
“나도! 나도 볼래!”
거실과 이어진 복도에서 2명의 남자가 달려왔다. 장남 다이안과 차남 아레스였다.
에이미가 늦둥이라는 말대로 그녀보다 훌쩍 터울이 높았다.
다이안은 30대 중반의 신사였으나 두 살 아래인 아레스는 풍성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 맨얼굴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로네의 앞에서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눈동자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 저기, 안녕하세요. 시로네라고 합니다.”
이시스가 팔을 잡아끌었다.
“자, 인사는 생략하고 빨리 이쪽으로 와요. 여보, 에이미의 남자 친구가 왔어요.”
막무가내로 소파에 앉혀지자 건너편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로네조차 이름을 알고 있는 카르미스 가문의 가주, 샤코라였다.
한때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환멸을 느껴 은퇴했다고 들었다.
“흐음.”
샤코라가 신문을 내리자 이지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키가 훌쩍 컸고, 나이답지 않게 신체도 강강하여 완벽주의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으, 프레싱보다 더 힘들잖아.’
내면의 갈등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샤코라의 등 뒤로 장남과 차남이 서 있는 상태에서 시로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세 사람이 동시에 홍안을 발동하는 모습은 사뭇 공포였다.
‘날 기억하고 있다. 저장하고 있어.’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아마도 저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까지고 이 순간을 떠올릴 터였다.
“저…… 안녕하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시로네가 다시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홍안의 불이 꺼졌다.
기다렸다는 듯 이시스가 시로네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와, 잘생겼다. 너 진짜로 에이미 친구니?”
“네, 맞는데요.”
“호호! 그럼 너도 졸업반이야?”
“아뇨. 저는 클래스 파이브예요.”
“흐음.”
이시스의 미간이 구겨지자 형제들도 똑같은 각도로 고개를 갸웃했다.
당황한 시로네는 한마디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학기부터는 클래스 포예요.”
“아하!”
갑자기 세 사람이 해맑게 웃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반응이었다.
시로네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처음부터 클래스가 무엇이든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잖아. 여긴 도대체 어디지? 이 사람들은 대체…….’
문득 아델의 말이 떠올랐다.
-예상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기분 나빠하지는 마세요.
아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시로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유쾌하면서도 엉뚱한 기질이 있다고 할까?
“에이미하고는 언제 만났어? 사귀는 사이 맞지? 응? 손도 잡고 다니고 막 그래?”
“예? 아니, 그게…….”
이곳에서는 에이미의 입장이 우선이니 말을 아끼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무슨 구경났어? 나도 없는데 가족끼리 둘러싸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에이미가 2층 달팽이 계단에서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레스가 수염을 씰룩이며 말했다.
“어? 너 설마 옷 갈아입은 거야? 시로네가 왔다니까 정신없이 방으로 뛰어가더니. 푸하하!”
늘 겪는 일인 듯 에이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라고? 그럼 잠옷 차림으로 만나리? 아무튼 전부 해산. 아빠, 친구랑 얘기해도 괜찮지?”
“그러려무나. 처음으로 데려온 남자 친구 아니냐? 처음에는 무엇을 해도 좋은 게 카르미스니까. 하하하!”
샤코라의 농담에도 에이미는 꿈쩍하지 않았다.
조금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도 시로네처럼 집단 공격을 당할 터이니 아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가자, 시로네. 방에서 얘기해.”
“응. 그럼…….”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이시스의 질문은 이어졌다.
“에이미, 솔직히 말해. 애인이지? 사귀는 사이지? 응?”
에이미는 걸려들지 않았으나 그녀의 고집을 물려준 엄마답게 집요했다.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둘이 무슨 사이야? 사귀는 거 맞지? 그렇지?”
결국 참지 못한 에이미가 소리쳤다.
“어!”
잠시 후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이번만큼은 샤코라도 놀랐는지 계단을 돌아보았으나 딸은 이미 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아레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 진짜야?”
방으로 들어온 시로네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에이미와 마주 앉았다.
책장은 마법 서적으로 빼곡했고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에 펼쳐 보지도 않은 연애소설이 쌓여 있었다. 세리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의외로…….’
학교에서는 알아주는 여장부지만 방은 여성스러웠다.
특히나 침대에 앉아 있는 곰 인형에 눈길이 갔다. 귀엽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형이네. 곰 인형.”
“그게 뭐? 내 방에는 인형 있으면 안 돼?”
“아니, 너랑 닮은 거 같아서. 하하!”
에이미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그녀 또한 가족 외의 남자를 방으로 초대한 적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시로네가 말했다.
“그런데 괜찮아? 학교에서야 위장 연애를 하지만 가족에게도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관심도 없을 테니까. 그냥 자기들끼리 재밌어서 저러는 거야.”
확실히 독특한 가족이었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서로 간의 신뢰도 느낄 수 있었다.
에이미가 화제를 전환했다.
“실없는 소리는 됐고, 갑자기 우리 집에는 웬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사실은 그게…….”
그때 문이 스르륵 열렸다.
좁은 문틈 사이로 이시스의 얼굴이 슬그머니 밀고 들어왔다.
“어머, 한창 좋을 때 방해했나? 차라도 들면서 하라고.”
차를 내주고 방을 나서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시로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리고 다이안이 들어왔다.
“과자를 좀 내왔는데…….”
에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전 이런 적이 없으니 가족들은 재밌기도 할 것이다.
“알았어. 그냥 전부 들어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문이 밀리더니 두 손으로 접시를 든 아레스가 보였다.
“과일이 좀 있어서, 하하.”
“그러니까 들어오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식으로 소개할게. 시로네, 괜찮지?”
“아, 물론이지.”
그리하여 샤코라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시로네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여기는 시로네고, 마법학교 유망주야. 그리고 시로네, 이쪽은 우리 엄마. 젊을 적에 무용수셨어.”
“어쩐지 아름다우시더라.”
“호호호! 에이미가 날 닮았지. 그렇다고 나에게 빠지면 곤란해. 내 딸에게 상처를 줄 순 없으니까.”
“……아, 네.”
시로네는 알겠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쪽은 큰오빠 다이안. 공인 5급의 검사고 왕성에서 궁수단장을 맡고 있어. 정치 문제로 아빠한테 상담을 받을 게 있어서 고향에 내려온 거야.”
가족들은 살짝 놀랐다.
설령 애인이라도 집안 내부 사정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결국 태연한 척하고 있을 뿐, 그녀 또한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호호, 이 녀석이 내 딸을 긴장시킨다는 거지? 천하의 에이미를…….’
카르미스 가문은 본래 개방적이지만 에이미의 성격은 특별하게 대범했다.
어릴 때부터 건달패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단지 귀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만남(3)
“그리고 둘째 오빠 아레스. 하는 일은…….”
말을 멈춘 에이미가 오히려 되물었다.
“도대체 오빠는 하는 일이 뭐야?”
“하하하! 나는 탐험가야. 유적을 발굴하거나 오지를 돌아다니며 지도를 제작하지. 알포네스 산맥의 용의 둥지나 코로나 왕국 북방 한계선에 있는 수정 동굴이 대표적인 내 작품이야.”
“아, 그렇군요. 알포네스 산맥은 저도 알아요.”
각종 드래곤의 서식지로 알려진 알포네스 산맥은 문학작품에도 나올 만큼 흥미로운 곳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엄청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낭만에는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지. 나는 내 일에 만족해. 지도 제작에 성공하면 보수도 괜찮고. 에이미는 싫어하는 것 같지만.”
“제발 그 수염이라도 깎아. 백수도 아니고 집에 처박히면 몇 달 동안 나갈 생각을 안 한다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어차피 이번에 탐사대가 꾸려져서 2년간은 못 돌아올 테니까. 사랑하는 동생 얼굴이라도 보려고 여태까지 기다린 거야.”
“……흥.”
에이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으나 시로네는 느낄 수 있었다.
백수니 어쩌니 해도 사실은 탐험가인 오빠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시로네가 말했다.
“그래도 저는 멋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졸업하면 그런 모험을 꼭 해 보고 싶은걸요.”
“하하!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거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경험할 수 없는 일을 질리도록 하는 게 탐험가니까. 졸업하면 언제든지 찾아와. 내가 특별히 탐사대에 넣어 주마.”
“어휴, 됐어! 괜히 바람 넣지 말고 소개 끝났으니까 이제 됐지? 다들 나가.”
에이미의 축객령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들이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중요한 건 듣지도 못했는데 쫓겨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런데 에이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 설마 벌써 선을 넘은 건 아니겠지?”
“예? 아니, 저기 그건…….”
“성격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접근한 거야? 말로 녹였어? 아니면 남자답게 으슥한 곳에서…….”
에이미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나가라고 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어느새 방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아직도 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성격인지 알 만하네.’
북적거리던 방이 썰렁해지자 어색한 분위기가 한층 강해졌다.
말을 꺼낼 기회를 놓친 시로네는 쑥스럽게 방을 두리번거렸고, 에이미 또한 차를 마시는 척 얼굴을 감추고 생각에 잠겼다.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왜 온 거지, 이 자식?’
결국 답답한 그녀가 물었다.
“뭐야? 말을 해. 심심해서 놀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시로네도 비로소 말문이 트였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데 막상 오니까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결례였다는 생각도 들고.”
“됐어. 친구 집에 오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나저나 부탁이라는 건 뭔데?”
“혹시 시간 되면 놀러 가지 않을래? 갈리앙트섬으로.”
에이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못 한 발언이었다.
시로네가 놀러 가자는 말을 꺼내다니. 그것도 여자랑. 그것도 섬에.
“그러니까…… 너랑 나랑 섬에 가자고?”
“사실은 리안이라는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가 제안했어. 그런데 리안은 친구를 데려온다고 해서 나도 같이 가 줄 친구가 필요해. 4명이서 가는 거지.”
“아하, 혹시 리안이 데려오는 친구…… 여자야?”
“응. 어라? 어떻게 알았어?”
대답 없이 차를 홀짝이는 에이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흘렀다.
‘한마디로 커플 여행이네. 리안이라는 놈, 음흉하구만. 응? 잠깐, 커플 여행?’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거기에 왜 나를 데려가?’
위장 연애를 하던 당시에도 목석처럼 흔들리지 않던 시로네가 갑자기 커플 여행을 제안하다니.
단순히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부탁을 할 리가 없었다.
“왜 굳이 나야? 고급반에도 친구들 있잖아. 나 졸업반인 거 알지? 다른 졸업반 애들이 방학 중에 얼마나 특훈을 하는지도.”
질문을 던지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대답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까?
찻잔을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에이미 너밖에 없어.”
“푸우우우!”
에이미의 입에서 찻물이 뿜어졌다.
너무 황당한 일이라 변을 당한 시로네도 반응조차 못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 바보 멍청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