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80
“네가 자초한 일이다.”
씽이 말했다.
“너는 이곳에 오면 안 됐어. 태성에게 자유를 줄 바에는 상아탑이 사라지는 게 낫지.”
시로네의 눈이 부릅떠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에서 인류를 구했잖아. 이유가 뭐야?”
“태성의 힘이 필요했을 때가 있었지. 지금은 달라. 바깥 세계가 열리면 셀 버스터가 발동한다. 그리고 태성은 그 멸망의 선봉장이 될 거야.”
“그렇지 않아.”
“나를 믿어라, 시로네. 관리자는 인간이 아니야. 저들에게는 마음이 없어. 여태까지 인류를 지켰던 것도 그런 프로그램이기 때문이야.”
“설령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저들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정해진 것뿐이야.”
씽이 말했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허상이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실체는 오직 나야. 내 부모도, 내 친구도, 내가 마주친 모든 사람들도, 전부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나는 프로그램이 아니야.”
“그럴 수도. 하지만 어떻게 증명하지?”
“…….”
“내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는 정도로 무언가를 결정하기에는, 우리의 어깨에 너무 많은 책임이 지어져 있어.”
씽이 시로네를 가리켰다.
“관리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바뀐다. 나를 따르는 별들은 네가 증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는 거야. 반대로 너를 따르는 별들은 그저 너를 믿는다. 그건 지극히 감정적이지.”
“그렇지 않아.”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증명하지 못했다고 거짓인 건 아니야. 오히려 정황상 거의 진실에 가깝지. 거의 진실에 가깝다면, 그렇게 믿고 무언가를 도모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야.”
“그 신뢰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데도? 정신 차려, 시로네. 백번 양보해서 네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해도, 태성은 명백히 관리자가 아닌가? 나는 너를 돕는 거다. 네가 바깥 세계를 추적할 수 있도록 위협을 제거해 주는 거야.”
상아탑이 크게 흔들렸다.
“가세요, 시로네.”
바알이 70층을 돌파한 가운데 태성이 말했다.
“상아탑이 궤멸되는 상황은 막아야 합니다. 지금 싸울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씽이 말했다.
“상아탑을 떠나라, 시로네. 너는 내려갈 수 없어. 별들이 너를 막아설 것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음지와 양지가 동시에 손을 들어 음양의 조화를 발휘했다.
‘엄청난 율법.’
씽의 관철은 상아탑 최강.
하지만 그녀가 구속하려는 존재는 시로네가 아닌 뒤편의 태성이었다.
‘수많은 인류의 위기 속에서도, 음지와 양지는 활약을 한 기록이 없다.’
씽은 어째서 그들을 감추었는가.
‘관리자와 싸우기 위해.’
그녀의 집념이 이토록 투철하다면 당장 대화로 설득하기에는 무리였다.
‘태성님.’
음양의 율법에 구속되어 있는 태성을 짧게 돌아본 시로네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버티세요. 다시 구하러 올게요.”
태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로네의 시선이 씽의 등 뒤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후회할 거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로네는 이미 씽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성전이 열리고 하루가 지나자 대략적인 동맹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각국 지도자들의 열띤 토론 속에서도 피아가 구별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자이브, 아이론, 아라크네. 동맹이다.’
어젯밤 연회를 강행했던 3국이었고 오메가를 통해서도 납득이 되었다.
‘온건주의 정책을 펴는 국가들이지. 하지만 실상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탐욕의 괴물들.
“1시간 휴정하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각국의 수뇌부들이 동맹 구도에 따라 하나둘씩 퇴장했다.
“가시죠. 자이브가 대접하겠습니다.”
자이브의 국왕 기스가 아이론과 아라크네의 왕족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시로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복도 끝에서 소녀가 달려왔다.
“아빠!”
“아이고, 우리 공주님.”
기스의 딸 레베카였다.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우리 딸입니다.”
왕족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벌써부터 미모가 범상치 않군요. 하기야, 자이브에는 미녀가 많으니까요.”
“하하! 엄마를 닮아서 그렇지요. 얼굴만 믿고 철이 없어서, 아빠로서 걱정입니다.”
“아빠!”
레베카가 버럭 소리치자 왕족들이 웃었다.
‘흥, 70점도 안 되겠구먼.’
아이론의 왕자 마커스가 열세 살짜리를 품평하는 그때 레베카가 눈을 크게 떴다.
“응?”
복도 끝에 시로네가 보였다.
“야훼…….”
시로네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베카.”
아빠의 음성에서 살기를 느낀 그녀가 손을 내렸다.
‘아차.’
기스는 자신의 야망을 저해하는 존재라면 딸이라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레베카도 불만은 없었다.
그 하나의 제약만 감수하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멀어지는 왕족을 바라보며 시로네는 생각했다.
‘왜 나에게 손을 흔들었지?’
자이브의 공주, 레베카라면 성격이 고약하고 사치가 심한 성격으로 알고 있다.
‘어디서 봤었나?’
언뜻 낯이 익은 느낌이었으나 꼼꼼히 살펴보면 일치하는 인물은 없었다.
“아.”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데스공쥬?”
자이브 왕국이 마련한 식사 자리는 철저한 보안 속에 은밀히 진행되었다.
롱 테이블에 앉아 있는 왕족들은 산해진미를 맛보았고 레베카도 말석에 있었다.
‘지루해.’
그녀는 시로네를 떠올렸다.
‘정말 하이 기어하고 똑같이 생겼네. 하아, 그땐 진짜 재밌었지. 날 알아봤을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머리색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지만 내심 기대가 되었다.
“영 입맛이 없어요.”
아이론 왕국의 바사크가 말했다.
“날마다 챙겨 먹는 것도 고역이지요. 뭘 먹어도 거기서 거기라, 이럴 때는 서민들이 부럽다니까요. 하하하!”
기스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도 큰 문제지요. 뭐든 맛있게 먹어야 힘도 나고 국가도 운영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새로운 요리를 개발했답니다.”
“새로운 요리요?”
기스가 박수를 쳤다.
입구와 반대편에 있는 문이 열리고, 헐벗은 5명의 아이들이 목줄이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얼마나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했고, 힘이 없어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아, 아아…….”
그런 상태에서 음식 냄새를 맡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먹을 거! 먹을…… 컥!”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기어가던 그들이 목줄에 걸린 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근육질의 남자는 테이블에 닿지 않을 거리에서 아이들의 목줄을 구속시켰다.
아이론과 아라크네의 왕족들이 멍하니 보는 가운데 기스가 웃으며 물었다.
“이제 입맛이 좀 돌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치부일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연회에서 이미 타락의 끝을 공유한 그들의 유대 관계는 끈끈했다.
마커스가 말했다.
“호오, 과연. 슬슬 식욕이 올라오는데요?”
다시 식사가 진행되자 목줄에 묶인 아이들이 테이블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먹을 거…… 먹을 것 좀 주세요.”
“스테이크 맛이 아주 일품이구먼. 이제 보니 자이브 국왕의 요리 솜씨가 탁월하십니다.”
“하하! 과찬입니다.”
모두가 그 자리를 즐겼으나 레베카는 아이들의 몰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으, 할 거면 좀 씻겨서 데리고 나오든가. 하여튼 더러운 거 진짜 좋아한다니까.’
기스가 약에 취해 쾌락을 탐하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지켜본 그녀였다.
오랜만에 돋운 입맛으로 빠르게 음식을 해치우던 왕족이 입안에 든 것을 미처 삼키기도 전에 말했다.
“그나저나, 쩝쩝. 하비츠가, 쩝쩝. 조용하군요.”
“성전에서 뭘 어쩌겠습니까? 극악? 다 허세예요. 사람이 먹고살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다고.”
기스가 포크를 흔들며 동의했다.
“바로 그거죠. 누구는 소싯적에 사람 안 죽여 본 줄 아나. 꼭 모자란 것들이 그런 거 가지고 폼을 잡아요. 그놈이 사탄이면 저는 사탄 할아버지입니다.”
“푸하하하! 그거 명언입니다!”
왕족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가운데 하비츠 또한 턱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큰일을 도모하다 보면 억울하게 죽는 놈도 있고, 응? 또 스트레스 많이 받으니까, 응? 본능대로 그냥 확 덮칠 수도 있는 것이고. 왜, 우리 남자잖아요.”
“야수지, 야수. 크크크.”
“그래요, 야수성! 이런 호탕함 없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레베카는 불쾌하지 않았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아주 지들이 나라 다 먹여 살렸지. 빨리 경매나 열렸으면.’
명백하게 자신의 일이 아닐 경우에, 인간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잘 먹었습니다.”
식기를 접시에 내려놓은 하비츠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을 거……. 먹을 거…….”
굶주린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던 하비츠가 테이블의 음식을 바닥에 던졌다.
“아! 아아!”
게걸스럽게 고기를 씹어 대는 상황에서 하비츠가 쪼그려 앉아 물었다.
“맛있냐?”
한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찰나의 소리를 들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순수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고작 그뿐.
“사탄 할아버지라.”
이내 흥미가 식은 하비츠는 상석에 있는 기스에게 걸어가 손목을 잡았다.
“아무튼 저 좀 도와주십시오. 지도국이 말이 지도국이지, 다 하나가 되자는 뜻 아니겠습니까?”
기스의 팔이 굽혀지고, 손에 들린 나이프가 그의 눈을 찌를 듯 가까이 접근했다.
“흐음.”
평소라면 눈을 파냈을 터.
‘쩝.’
하지만 우오린과의 거래가 남아 있기에 왕을 건드리는 건 시기상조였다.
“심심하군. 뭐 재밌는 일 없나?”
테이블 주위를 돌아다니던 하비츠는 레베카의 빈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시로네나 한번 꼬셔 볼까? 아빠도 좋아할 텐데. 이따 환각제 좀 사야겠다.’
마음의 소리를 들은 하비츠가 고개를 저었다.
“다 똑같군. 어디나.”
쾅 하고 두 다리를 테이블에 올린 그가 의자를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좀 다른 거 없냐?”
자신을 즐겁게 해 줄 특별한 소리.
위저드가 말했다.
“저기 보여요.”
그녀가 가리킨 지평선 끝에 자이브의 수도가 웅장한 위용으로 서 있었다.
“동시 사건은 같은 공간에 일어날 수 없어. 여기서 사라질 테니 델타에서 보자.”
에이미와 시로네는 손을 맞잡았다.
“그래. 위저드를 무사히 델타 안으로 잠입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 이카엘 씨도 있으니까.”
그 애달픈 모습을 지켜보던 위저드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
이카엘이 그 모습을 관찰하는 그때, 시로네가 위저드의 어깨를 짚었다.
“부담 느낄 필요 없어. 만일의 사태에는 내가 나설 테니까. 할 수 있겠지?”
하비츠를 죽이는 것.
“네.”
위저드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시로네가 동시 사건을 해제하고, 에이미가 위저드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자, 우리도 출발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