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9
소매로 입을 닦으며 소리친 에이미는 빨개진 얼굴로 수건을 챙겨 가지고 돌아왔다.
“얼른 닦아! 불결해 죽겠네, 진짜!”
“……얼굴에 뿜은 건 너잖아. 아무튼 얘기를 계속하자면, 혹시 전에 말한 미로라는 사람 기억해?”
“미로?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초대 회장이라던 그 사람 말이지? 다른 차원에서 봤다고 했잖아.”
“맞아. 근래 세운 가설인데, 나는 이모탈 펑션이 초광속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교장 선생님이 케르고 유적을 조사하는 정도라면 괜찮다고 하셔서. 리안이 제안한 김에 가 보려고.”
에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르고 유적이라면 그녀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거길 같이 조사하자 이거지?”
“응. 교장 선생님이 선뜻 허락한 이유는 학생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기 때문일 거야. 케르고 유적은 갈리앙트 자치 정부 소유니까. 하지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깊이 파 보고 싶어. 물론 위험한 일은 피하겠지만, 네가 있으면 더 안심이 될 거 같아서.”
리안이 쌍쌍 여행을 제안한 이상 파트너는 여자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빼고라도 에이미는 시로네가 아는 친구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홍안의 특이성도 그렇지만 매일 경쟁하며 졸업반 중위권에 안착한 그녀의 실력이라면 어떤 곤란한 상황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흥! 당연하지! 초자연 어쩌고 하는 애들과 나는 수준부터 다르니까.”
“하하,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지 강하다는 이유로 친구를 끌어들일 성격이 아니라는 건 에이미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목한 진짜 이유는…….’
아마도 아케인 사건.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교차했던 서로의 감정은 여전히 분석되지 않은 채 마음에 담겨 있지만, 그게 무엇이든 신뢰감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흐음, 그렇다 이거지.”
에이미는 창가로 걸어가 생각에 잠겼다.
둘만 떠나는 여행은 아니기에 부담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로네의 친구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짜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좋아. 커플 여행이니, 내가 기 좀 살려 주지 뭐.’
그런 생각으로 몸을 돌리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시로네가 보였다.
‘하여튼…….’
여행의 진의가 무엇이든 남녀가 외박을 하는 일이었다. 감언이설로 안심시켜도 될까 말까인데 저렇게 굳어 있으면 어느 여자가 선뜻 따라가겠는가?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저 아이는 대체 언제 클까?
어쩌면 성장 에너지가 전부 마법에 집중된 게 아닐까 싶었다.
“좋아. 가자, 갈리앙트섬.”
***
“안녕하십니까! 엘자인 테스라고 합니다!”
오젠트 가문을 찾은 테스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반면 그녀의 옆에 있는 리안은 초조한 눈빛이었다.
여태까지 리안이 시로네의 집에 죽치고 머무른 이유는 테스를 방패막이로 삼아 본가로 쳐들어가겠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검술학교에서 꼴등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쉬이 놀게 해 줄 부모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친구를 앞세운다면 얘기가 달랐다.
특히나 그 친구가 검술학교 수재의 모범생이라면 충분히 약발이 먹힐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음, 명성은 익히 들었네. 아버님은 건강하신가?”
“네! 점령지에 머무시는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수련하고 계십니다.”
사실 테스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리안의 아버지 비쇼프는 족히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으로 일가를 이룬 분은 다르시군. 기회가 된다면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네.”
테스의 아버지인 베론은 섬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검의 고수였다.
오젠트 검술이 패도적이라면 엘자인 검술은 예리하다.
누구의 솜씨가 높은지는 검을 다루는 자에 달렸으나 검의 정통성을 지키는 자부심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리안, 너답지 않게 좋은 처자를 사귀었구나.”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친구야.”
테스는 리안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리안과 여행을 떠나려면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리앙트섬으로 휴가를 간다고?”
“어. 검술학교에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심신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아, 이따가 시로네도 올 거야. 여기서 바로 출발하려고. 가도 되지?”
“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정말로 열심히 한 거냐? 개인 과외까지 시켜도 말을 안 듣던 놈이 그런 소리를 하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비쇼프는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하하! 그런 얘기 할 거 같아서 가져왔지. 자, 드디어 나도 스키마를 열었다고!”
리안은 회심의 물건을 꺼냈다.
성적표는 레이나에게 빼앗겼지만 근력 강화 검사를 통과한 검증서는 가지고 있었다.
물론 플라세보효과라는 게 밝혀진 이상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였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비쇼프에게는 먹힐 터였다.
“흐음, 진짜로 통과했구나. 축하한다.”
성격대로 비쇼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부모라면 누구나 못난 자식이 더 눈에 밟히는 법이다. 그렇게 애를 써도 성공하지 못한 스키마를 보란 듯 해냈으니 속으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자. 이제 약속대로 허락해 줘. 할아버지가 스키마를 터득하면 준다고 한 검, 그거 가져가도 되지?”
“물론이다. 스키마를 열었으니 이제 너도 오젠트 검술을 훈련해야겠지. 그런데 성적표는 어디 있냐? 자신만만한 걸 보아하니 꽤나 괜찮은 모양인데.”
“아…… 성적표? 그건 누나가 가지고 있어.”
“레이나가 왜? 가지고 오지.”
“나도 몰라. 할아버지 보여 준다고 뺏어 갔어. 그 마녀 성질을 내가 어떻게 이겨? 아무튼 빨리 검이나 줘. 그거 가지고 싶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리안이 간절하게 원하는 검은 오젠트의 가풍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할아버지의 대검이었다.
장검보다 2배는 무거운 데다가 클럼프 정도로 키가 훤칠하지 않고서는 다룰 수도 없을 만큼 날이 길었다.
리안은 어릴 때부터 그 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보통은 가주가 물려받게 되지만 흑발인 비쇼프는 딱히 대검을 애용하지 않았다.
그가 오젠트에게 물려받은 것은 강직함을 상징으로 하는 검술뿐이었다.
클럼프 또한 은근히 막내 손자가 자신의 검을 물려받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친손 중에서 청발의 혈통을 이어받은 건 레이나와 리안이었는데, 음악에 소질이 있는 레이나를 빼면 자신의 검을 다룰 사람은 리안뿐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4)
“할아버지 방에 있다. 놀러 간다면서 갑자기 검은 왜? 테스야 먼 길을 왔으니 그렇다 치지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아무튼 가지고 올게.”
리안은 할아버지 방으로 올라갔다.
스카마를 열지 못한 그가 다루기에는 과분한 검이었지만 이번 여행에는 반드시 챙겨 갈 생각이었다.
시로네의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대직도.’
리안은 벽에 장식된 대검을 황홀하게 올려다보았다.
오젠트 가문의 혼이 담긴 형태와 크기. 스키마 없이는 휘두르기조차 어렵지만 리안은 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묵직하다. 하지만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상상 스키마라는 판정을 받고 속이 쓰렸지만 리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스키마든 아니든 근력 강화 검사를 통과한 이상 무력은 같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훈련을 버틸 만하다는 입장이었다.
“검집이 여기 어딘가…….”
워낙에 무겁고 커서 허리에 차고 다닐 수는 없었다.
리안은 소가죽으로 만든 그물 형태의 검집을 등 뒤에 매고 직도를 수직으로 꽂았다.
이런 차림이라면 사람들의 눈에 띄겠지만 어차피 검을 소지하는 게 불법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지정한 특별 구역을 제외하면 보안 규정에 따라 검을 찰 수 있는데, 평민은 섹터 레벨 C, 귀족은 섹터 레벨 B, 왕족은 섹터 레벨 A라는 식이었다.
검을 챙긴 리안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집사장 루이스가 홀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주님, 시로네 도련님이 왔습니다.”
에이미를 데리고 저택에 들어온 시로네는 비쇼프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학교생활만이 아니라 부모님 살림에도 미흡함이 없도록 신경 써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건강하셨죠?”
집사장의 말에 의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지만 아들이 온다는 말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래. 잘 다니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이번에 클래스 포로 진급하게 되었어요.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비쇼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클래스 포라니.
마법학교에 입학한 지 반년 만에 클래스 포에 들어가려면 대체 재능의 크기가 얼마여야 될까?
‘리안하고는 천지 차이군.’
물론 자식을 비교하지는 않는다.
다만 1명의 검사로서, 기사 서약을 한 리안이 시로네의 성에 차지 않을까 우려스러울 뿐이었다.
“네가 열심히 한 덕분이지. 어쨌거나 지원을 한 보람이 있구나. 이번에 리안이 주제도 모르고 아리따운 숙녀랑 여행을 간다던데. 너도 가는 거냐?”
“네. 함께 가기로 했어요.”
“옆에 계신 숙녀분은 파트너고?”
비쇼프는 붉은 머리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낯이 익기는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카르미스 에이미입니다.”
비쇼프의 눈이 반짝였다.
리안과 테스는 물론 집사장 루이스까지 놀란 표정이었다.
제1계급 귀족 카르미스 가문.
왕국 최고의 권위는 아니지만 자유분방한 성향과 홍안의 재능은 국경을 넘어 대륙 전체에 퍼져 있었다.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업적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증거였다.
비쇼프 또한 귀족 서열이 가문의 권력을 정확히 측정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아첨과 비열한 수단으로 높은 계급에 오르는 귀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정통성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가풍마저 바꾸며 출세에 목을 맨다.
하지만 엘자인이나 카르미스는 그런 부류와는 격을 달리했다.
정통성이란 신념에 의해서만 세워지는 법.
왕국이 탄생한 이후로 오로지 한길만을 택했던 그들의 자긍심은 돈이나 권력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리안이 초조하게 말했다.
“자, 자.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일단 가자고. 배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출발해야 된다니까.”
아마도 지금쯤 레이나가 보낸 급행 우편이 화살처럼 날아오고 있을 터였다.
성적표가 공개되는 순간 천국은 멀어지고 지옥도가 펼쳐지리라는 건 자명했다.
“아빠, 그럼 갔다 올게. 한 10일 정도 걸릴 거야.”
“그래. 그동안 훈련하느라 고생했으니 푹 쉬다 오거라. 아, 그리고 이건 여비에 보태.”
비쇼프가 묵직한 주머니를 던졌다.
안을 들여다본 리안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아버지에게 이토록 많은 금화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실제로 비쇼프는 기분이 좋았다.
기사 서약을 했을 때만 해도 아들 하나 망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안 되던 스키마를 연 데다 좋은 친구도 사귀었다.
무엇보다 리안의 주군이 될 시로네도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착착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훈련 또한 실전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반년 동안의 임금을 지불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물론 리안의 죄책감은 끝을 모르고 커졌으나, 지금은 그런 마음조차 사치였다. 오직 살아서 이 집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알았어. 그럼 친구들이랑 갔다 올게. 아, 테무란. 항구까지 가는 마차 좀 대기시켜 줘.”
“알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리안을 배웅하는 테무란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0분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도련님.’
테무란은 품속에 넣은 봉투를 지그시 눌렀다. 수도에서 막 도착한 레이나발 급행 우편이었다.
***
오늘따라 집사들의 업무가 많아서 노는 마차가 한 대도 없었다. 전용 마차는 있었지만 안장을 얹고 정비를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리안은 정비 따위 필요 없다고 했으나 수레바퀴의 나사 조임만큼은 검사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칫 사고라도 나면 모든 죄는 마차 관리인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차를 정비하는 동안 네 사람은 마구간 근처에서 기다렸다.
한동안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서로 초면일 때 흔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반면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탐색이 오가고 있었다.
테스는 시로네를 살폈다.
마법사 지망생이라는 건 들었지만 리안이 기사 서약을 했다기에 피 끓는 열혈남아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의외로 여리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에이미도 흥미로웠다.
대륙의 스타라고 불리는 카르미스 가문. 과연 어떤 성격일까?
결국 테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적어도 마차에서는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통성명이나 할까? 엘자인 테스라고 해.”
“난 카르미스 에이미. 만나서 반가워.”
“아, 나는 아리안 시로네.”
테스는 시로네하고도 악수를 나누었으나 성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외교 가문답게 어지간한 귀족의 성은 전부 외우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아리안이라는 가문은 스쳐 지나가듯 들은 적도 없었다.
“아하, 아리안이구나. 음, 저기…… 본가는 크레아스에 있는 거야?”
상대방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돌려서 묻자 그녀의 생각을 읽은 시로네가 솔직히 말했다.
“나는 본가가 없어. 평민이거든.”
“어? 평민이라고?”
테스의 눈이 똥그래졌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안이 평민에게 기사 서약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에이미를 돌아보았으나 표정 변화가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리안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리고 에이미는 또 왜? 카르미스 가문이나 되는 사람이 어떻게 평민의 파트너로 따라올 수가 있어? 이거 커플 여행 아닌가?’
시로네를 겪어 보지 못한 테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시로네에게 놀란 만큼이나 리안의 결정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설령 시로네가 대단한 능력을 갖춘 아이라도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냥 친구도 아니고 기사 서약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리안답기는 하네.’
테스가 한참이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자 시로네가 먼저 말을 건넸다.
“미안해. 불편하다면 차라리…….”
“아, 아니야. 실례는 내가 했지. 솔직히 너무 깜짝 놀라서 경황이 없었어. 그런데…… 내가 이상한 건가? 모두 태연하니까 꼭 내가 나쁜 애 같잖아, 호호호!”
테스는 황급히 분위기를 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