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92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허탈감이 분노로 변하자 관리들은 타깃을 바꾸었다.
자이브 왕국의 기스였다.
“자이브에 묻고 싶습니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이유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기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자이브가 아니오! 천사들의 힘이 무력화되었다고 하던데.”
아픈 데를 찌르자 기스가 이빨을 드러냈다.
“확실하지 않은 사건으로 여론을 흔들지 마시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공표하겠소.”
알비노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자 일간신문에 이상한 기사가 떴더군요. 뭐, 도의적인 비난이야 제 몫이 아닐 테지만, 이런 식의 야합은 신뢰를 깨트리는 게 아니오?”
‘영감탱이. 다 알면서.’
그렇게 물꼬를 틔우자 타국의 관리들도 너도나도 한목소리로 거들었다.
“바로 그겁니다. 자국 제왕법에 따라 시민들이 새로운 왕을 선출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전 원칙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니 털고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기스의 반응은 키트라와 같았다.
“흠.”
“뭐라고 말씀을 좀 해 보세요!”
‘미쳤냐? 내가 말하게.’
순순히 자백하든, 아니라고 발뺌하든, 입을 연 순간부터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분위기를 주시하고 있던 아라크네의 국무총리 페드라가 기스를 지원했다.
“지금 중요한 건 피라미드입니다. 회의를 중단하고 각국이 대처할 시간을 갖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의 시선이 성전 총회의 의장에게 쏘아졌다.
‘끊어. 끊으라고.’
총회의장이 의사봉을 때렸다.
“3시간 휴정하겠습니다. 정보 수집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진행하도록 하죠.”
관리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이미 넘어갔군.’
아라크네가 제공한 은밀한 연회에 총회도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루피스트는 턱을 괴었다.
‘이래서 밤의 정치가 무서운 거야.’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는 것은 어떤 서류보다 강력한 동맹 체제를 구축하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도 기회다.’
가장 먼저 기스가 자리를 뜨자 생각에 잠겨 있던 플루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응?’
시로네는 문을 나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 있나?’
딱히 바쁜 몸짓은 아니었지만, 루피스트에게 보고하지 않은 건 이례적이었다.
문을 나선 플루는 기스를 눈에 담았다.
“아우, 속 타. 커피 좀 가져와. 얼음 가득 넣어서.”
미인계를 사용하는 건 처음이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차가워졌다.
‘나는 프로다.’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것.
몇 시간 전에 회의실에서 들었던 알비노의 조언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라크네만큼 섬세하게 접근할 수는 없겠지. 정석대로 가자고. 우선 충돌이야. 우연을 가장한 충돌.”
알비노가 말했다.
“고전적이기는 해도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거든. 이걸로는 눈치채지 못할 거야.”
“정말 그럴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알비노 씨라면 눈치챌 수 있잖아요?”
“아니, 못해.”
알비노가 미소를 지었다.
“남의 일이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인지의 한계 때문이야. 인간은 자신을 볼 때는 원인을, 남을 볼 때는 결과를 생각하거든.”
“흐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야. 다른 사람의 실수에는 아량을 베풀지 못하지만, 자신의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이유지.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 대해 좀 침묵할 필요가 있는 거지만…….”
알비노는 수염을 만졌다.
“어쨌거나 자네가 걱정하는 이유는 정해진 결과로 기스를 보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기스는 결과를 모른다고.”
플루는 이해했다.
“저에게는 특정한 사건이지만, 기스에게는 무수한 우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군요.”
“바로 그거야. 매 순간 벌어지는 우연에 전부 의미를 부여했다가는 미쳐 버릴걸. 흔히 멍청한 실수를 했다고 하지.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전혀 멍청한 게 아니야. 그저 인과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것뿐이지.”
인간人間.
“…….”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일까?
“나, 참.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회의장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플루는 투덜대는 기스에게 걸어갔다.
‘걱정할 필요 없어.’
급하게 복도를 달리기 시작한 플루가 기스의 어깨를 치자 커피가 쏟아졌다.
“아, 뭐야? 짜증 나게.”
기스에게는 수많은 원인 중의 하나일 테지만.
“어머, 죄송합니다.”
플루에게는 유일한 결과였다.
“넘길 서류가 있어서 급히 가다가 그만……. 괜찮으세요?”
기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여기서 혼자 바쁜가? 중요한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서 질서 좀 시킵시다.”
회의장을 나온 관리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플루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관리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여자, 토르미아 마법협회 비서실장이잖아?”
“커피를 쏟았다는데.”
그들의 말에 기스의 귀가 솔깃했다.
‘마법협회 비서실장?’
게다가 토르미아라면 야훼를 필두로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국가였다.
‘흐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인물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란 쉽지 않을 터.
‘하긴. 자이브의 이름값이 있지.’
기스의 어깨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통할 거야.’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플루는 바닥을 바라보며 알비노의 말을 상기했다.
-아름답다는 말 싫어하는 여자 없고, 강하다는 말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하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상은 관계없어. 이건 유전자 레벨에서 작용하는 거니까.
‘호감을 사야 한다.’
-남자를 통제하려면 파워를 칭찬해야 돼. 돈, 권력, 직위, 그의 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것. 세상에서 가장 강한 놈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란 말이야.
기스의 표정이 풀렸다.
“뭐 이런 사소한 일로 고개까지 숙이고 그러나. 그만하게. 자네도 일국의 VIP 아닌가.”
-일단 그런 상황이 되면 남자는 대개 정신이 반쯤 떠 버리거든. 여자로 비유하자면, 여자들 사이에서 오직 자신만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으며 걷는 기분과 흡사할 거야.
플루는 이해했다.
-거기까지 성공하면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할 수 있지.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거야. 왜냐면 자신은 엄청나게 유능하고 강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때부터 시작이야.
욕망의 전쟁이.
연쇄 작용 (4)
기스는 플루의 얼굴을 살폈다.
‘흐음.’
단테가 지휘하는 부서의 정보에 의하면 기스의 취향은 상당히 하드코어하다.
-평범하게 아름답고 그런 건 별로 관심이 없을 거야. 성적 쾌락은 지배욕과 맞물려 있지. 일국의 공주라면 추녀라도 반길 놈이야.
알비노는 덧붙었다.
-물론 자네가 추녀라는 뜻은 아니네만.
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자신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싫은 티를 내지 않는 플루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마법협회의 비서실장이라…….’
물론 그의 경험도 일천하지 않기에 처음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토르미아 쪽의 마법협회하고는 아직 교류가 없구먼. 잘되고 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긴, 어려운 일이지. 이 정치라는 게 말이야, 혼자 날고뛴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네. 물론 그렇죠.”
평범한 대화처럼 들리지만 나노 단위로 말을 분석하는 관리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토르미아가 찍소리도 못 내는군.’
그 권력의 재확인이 기스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올라오게 했다.
‘아, 갑자기 당기네.’
기스가 플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쨌든 다들 세계 평화를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겠나. 잠깐 시간이 남는데, 차라도 하지.”
“영광입니다.”
기스를 따라가는 플루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어차피 오늘은 아니야.’
타국의 관리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일을 치를 만큼 조심성이 없는 자는 아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페르미는 기스와 플루를 곁눈질로 흘끔 살폈다.
‘벌써 작업 들어갔군. 예상보다 빠른데?’
일간신문에 루머가 퍼질 때부터 누가 들어가도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토르미아라니. 시로네, 그 순둥이가 하자고 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때 뒤늦게 회의장을 빠져나온 시로네가 플루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서 페르미는 깨달았다.
‘협의한 게 아니야?’
이건 좀 센데.
‘루피스트. 확실히 강적이다.’
타국이 주판을 튕기고 있을 동안 동물적 감각으로 물어 버린 것이었다.
시로네와 짧게 눈을 마주친 페르미는 무심한 표정으로 곁을 지나쳤다.
‘힘내라. 당분간 머리 좀 아프겠네.’
이것도 좋은 장사 수단이 되겠지만, 페르미에게는 피라미드가 더 중요했다.
‘우오린이 뛰쳐나갔다는 것은 아마도 율법, 시스템이 바뀐 것이겠지.’
페르미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나쁘지 않아.”
***
아포칼립스.
뮤커스가 세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에 하이 기어의 관리자 5명이 모였다.
“드디어 완성했다.”
오퍼레이터의 손바닥 위로 눈 결정을 닮은 하얀 구체가 천천히 회전했다.
“아이스 블러드.”
디지털 라의 코어에 주입하면 뮤커스를 경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코드였다.
잠시 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네?”
기별을 받고 아포칼립스에 들어온 시로네와 앵무 용병단의 간부들이었다.
마르샤가 가리켰다.
“그게 바이러스인가 뭔가 하는 거야?”
“네. 굉장히 강력해요. 일단 코어에 심으면 우리도 통제할 수 없을 거예요.”
“상관없지. 어차피 버려진 세계니까.”
시로네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더 늘어난 것 같은데요. 뮤커스의 높이가 달라요. 굴착기도 사라졌고.”
“어? 그러네?”
마르샤가 확인하자 뮤커스의 지면이 하늘을 전보다 많이 가리고 있었다.
시로네는 이유를 짐작했다.
‘피라미드 때문이구나.’
천사들의 위상이 떨어질 정도로 율법이 틀어졌으니 아포칼립스도 변한 것이다.
‘더 많은 뮤커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거지?’
부단장 프리먼이 말했다.
“일단 내려가자. 며칠 동안 채굴을 하지 못했어. 너도 상황이 급한 것 같은데.”
세계 각지에 세워진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앵무 용병단도 알고 있었다.
“네, 그렇죠.”
첫발을 내딛는 순간 진동을 느낀 뮤커스가 사납게 솟구쳐 날아들었다.
“으악! 뭐야!”
하이 기어의 관리자들이 놀란 가운데 마르샤가 단도를 그어 촉수를 잘랐다.
떨어진 촉수는 잠시 꿈틀대더니 다시 점액질이 되어 지면에 흡수되었다.
“아우, 짜증 나. 그런데 왜 이렇게 난폭하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뮤커스의 성질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