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06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시로네의 파벌에 속해 있는 그는 옳은 판단을 할 터였다.
‘누님.’
라스카는 미네르바의 말을 떠올렸다.
“씽의 말이 옳다고요?”
인류안전집행부는 시로네를 따르기로 했지만, 그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래. 태성은 바깥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관리자야. 그녀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이상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씽도 알고 있지. 악역을 맡은 셈이야.”
“그럼 씽의 파벌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
미네르바는 침묵했다.
“시로네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우리는 세상을 혼란하게 했던 자들이다. 이런 판단에 의견을 낼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
“쳇, 누가 뭐래요? 그러니까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그걸 하면 되잖아요.”
“나는 그저…….”
미네르바가 라스카를 돌아보았다.
“시로네가 바라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쓸데없이 마음이 여려.’
몸을 돌린 라스카는 외벽으로 걸어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금속 마법을 시전하자 드르륵 갈리는 소리가 나며 깨끗하게 구멍이 뚫렸다.
태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스카.”
“미안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끼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당신들이 하는 얘기 뭔지도 모르겠고.”
미네르바가 걱정되었다.
“걱정하지 마쇼, 마족들은 내가 막을 테니. 여기서 사이좋게 소꿉장난이나 하라고.”
블리자드의 장막을 바라보던 그가 강철의 굉음을 내며 튀어 나갔다.
“라스카!”
태성이 불렀으나, 돌아오는 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뿐이었다.
시로네는 빠르게 탑을 내려갔다.
보르보르가 사망한 뒤로, 씽을 따르는 상아탑의 주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추모.’
그들 나름의 추모였다.
-바알이 80층까지 올라왔어요. 누적 사망자 수는 764명입니다.
미카의 말에 시로네는 이를 악물었다.
별을 달지는 못했어도 상아탑의 주민 중에는 세계적인 강자가 즐비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
딸랑딸랑,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맑은 종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렸다.
“풍경風磬.”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시로네는 핸드 오브 갓을 내밀었다.
112층 전체가 폭풍에 휩싸이더니 인공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에 흰옷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아르테 씨.”
균형부 소속 3성급 주민 아르테, 어깨 위에는 위성 토케이가 앉아 있었다.
“이럴 시간 없어요. 바알이 상아탑의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올라오고 있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시로네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보르보르는…….”
“알아요. 탄주라 씨에게 들었습니다. 오대성을 그냥 보내달라고 했다더군요.”
부채를 내린 아르테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가 죽음으로 요청했다면, 몇 시간 정도는 제 주관을 굽힐 수 있습니다.”
불개미를 닮은 토케이의 얼굴 표정이 슬퍼졌다.
“마족인 내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이었소다. 그런데 이렇게 떠나 버리다니.”
시로네가 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막아선 이유가 뭐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민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마치…… 오대성께서는 바알의 검에 죽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네?”
“제가 막아선 이유는, 이대로 내려갔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
물론 바알의 강함은 알고 있다.
‘지옥의 군대.’
그것도 제1군단장이라는 것은 이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는 뜻이다.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싸울 수밖에 없잖아요. 도망칠 수는 없어요.”
“아뇨. 도망쳐야 합니다.”
토케이가 말했다.
“시로네, 분명 너를 상대로 승률이 50퍼센트가 넘는 존재는 없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라. 바알의 마계를 생각해야 한단 말이깜.”
“데들리 크로스.”
아르테가 말했다.
“바알의 무력은 지옥 최강.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만약 오대성이 놈을 소멸시키려고 하면, 반드시 마계를 개방할 겁니다.”
그 결과는 운석 충돌, 인류의 역사를 순식간에 끝장낼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끌면서 상대할 만큼 약한 적도 아니죠. 마계에 대한 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겁니다.”
“생각해 둔 작전이 있나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설명하죠.”
시로네가 몸을 돌리자 동심원의 동공을 가진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실제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만 망원시를 장착했다면 상아탑에 한 사람뿐이었다.
“비파 씨.”
상아탑의 무기 시스템 감독관이었다.
“바알이 싸우는 것을 직접 봤어요. 악마의 능력, 강의剛毅. 전투에 절대적인 건 없지만 상아탑의 별들이 덤벼도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시로네는 순순히 수긍했다.
‘강의는…….’
일종의 신적초월이다.
베고자 하는 의지가 그대로 검에 투영되는 것으로, 이론적으로 한계는 없다.
‘본래 히든 코드는 논리를 파괴하는 수준의 전투 편의성을 마족에게 제공하지만…….’
바알은 다르다.
‘이건 치트가 아니야. 오히려 엄청난 의지가 있기에, 최강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진짜 검사라는 것.
능력치의 고하를 떠나서, 바로 이 부분이 시로네가 바알을 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였다.
비파가 설명을 이었다.
“바알은 1층부터 주민들을 전부 죽이며 올라오고 있어요. 그런 방식으로 꼭대기에 도착하면, 상아탑을 궤멸시킨 것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죠.”
판단이 단순한 것도 검사다웠다.
“덕분에 시간을 얻었어요. 전략의 핵심은 99층. 상아탑 내부 동력 기관실입니다.”
비파가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68톤짜리 대형 배터리 3,200개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100층부터 199층까지 환경 순환 시스템에 쓰이는 전력이에요. 이 시스템을 역전시켜서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어 낼 생각입니다.”
시로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탑이 멀쩡할 리가 없어요. 68톤짜리 탄환을 쏘는 레일건이 되는 셈이라고요.”
“맞아요. 탑은 멀쩡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99층을 날려 버릴 생각이거든요.”
“…….”
“자기장을 강화하면 3,200개의 배터리가 360도 전방으로 동시에 튀어 나갈 겁니다. 펑! 바알도 날아가겠죠. 99층의 외벽이 72퍼센트 이상 소실되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상부 탑이 내려옵니다. 28퍼센트의 저항이 충돌 순간의 진동을 잡아 줄 거고요. 쿵. 그렇게 100층이 98층에 정확히 꽂히게 되는 거죠. 쿠우우우우.”
탑을 내리찍은 자세를 취한 비파가 열 손가락을 흔들며 팔을 퍼트렸다.
그 모습에서 시로네는 깨달았다.
‘미친 거 아냐?’
만약 조금이라도 계산이 잘못되면, 탑은 그대로 기울어 땅에 처박힐 터였다.
“바알을 죽일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가장 좋은 건 바깥으로 날려 버리는 거죠. 명확한 정답이잖아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황당한 말을 아주 태연하게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톱니바퀴 마크.”
하이 기어의 튜토리얼 관리자, 비파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딱히 현실에 관심은 없지만, 내 집이 날아가는 것은 기분이 나쁘니까요.”
아르테가 끼어들었다.
“그 작업에 얼마나 걸리죠?”
“최소 30분 이상은 필요해요. 메인 시스템을 해킹해야 하니까요. 그 안에 바알이 올라오는 것을 막아 주세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요.”
시로네가 입을 열었다.
“미카.”
-바알의 현재 위치는 82층입니다. 탄주라가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으로 이동속도는 증가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소 시간에 막을 수 있는 위치는 86층입니다.
86층이라.
‘그렇다면 13개의 층이 남아 있는 거네.’
시로네가 말했다.
“지금 출발할게요. 30분 동안 바알을 막을 테니 작전을 성공시켜 주세요.”
제발 미친 짓이 아니기를.
순간 이동의 섬광이 층을 빠져나가자 아르테가 비파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느 쪽입니까? 씽? 아니면 시로네?”
“당연히…….”
비파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 줄기의 섬광이 상아탑의 외벽을 따라 나선의 형태를 그리며 내려왔다.
86층에 도착하자 건너편 입구에서 보랏빛 장검을 든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알.’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는 인간보다 아름다운 외모였다.
“야훼여.”
가증이란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사탄의 명에 따라 상아탑을 세상에서 지우겠다.”
“왜 하필 지금 상아탑이지?”
바알이라고 한들 사탄의 의중을 읽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악은 지성에 의해 정의된다.”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이라는 것도 그저 순수한 혼돈에 불과.
“우리는 재앙이 아니다, 야훼여.”
바알이 보랏빛 기운을 뿜어내자 86층의 식물들이 모조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강의剛毅.’
그 기운이 검에 담기는 것과 동시에 바알이 시로네에게 검을 휘둘렀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느리게 보이는 동작이었고, 시로네는 헥사로 치받았다.
‘핸드 오브 갓!’
두 가지 기운이 충돌하면서 주민들이 빠져나간 86층이 초토화되었다.
황금빛 섬광이 퍼지고, 그 사이사이로 자색 섬광이 거미줄처럼 지나갔다.
‘빠르다.’
논리를 벗어난 히든 코드의 정점이 신적초월과 닮은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바알은 진짜야.’
리안의 일격에 준하는 위력이 미라클 스트림에 휩싸인 시로네를 위로 쳐올렸다.
쾅! 쾅! 쾅!
천장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시로네의 머릿속에 카운트가 세어졌다.
‘87층. 88층. 89층.’
넋을 놓고 있다가는 99층까지 밀릴 것 같아 시로네는 브레이크를 걸었다.
‘벌써 여섯 층이나 밀렸어.’
92층에서 멈춘 시로네가 핸드 오브 갓을 띄우고 포톤 캐논을 시전했다.
뚫고 나온 틈 사이로 바알의 모습이 포착된 순간.
‘저기다.’
포톤 캐논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층의 중심부에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바알은 사력을 다해 강의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크으으으으!”
91층, 90층, 89층, 88층…….
“이야아아!”
보랏빛 섬광이 수직으로 그어지자 포톤 캐논이 둘로 쪼개지며 흩어졌다.
“푸우!”
크게 숨을 내쉰 바알이 입구 쪽을 돌아보며 자신이 있는 층을 확인했다.
85층.
“야훼…….”
그의 얼굴에 비로소 악마가 보였다.
율법 전쟁 (4)
***
화자원관리공사-시스템제어 지부.
이면 세계의 규모만큼이나 시스템제어 지부의 면적 또한 엄청나게 넓었다.
창고, 기관실 등 수많은 건물이 즐비한 곳 너머로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
리체라가 말했다.
“저기가 시스템제어 지부 사옥일 겁니다. 조심하세요. 관리자들이 많습니다.”
손유정이 두 자루의 여의를 휘둘렀다.
“흥. 관리자고 뭐고, 박살을 내 버리겠어. 감히 내 친구를 납치했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