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08
속사검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처참하게 훼손된 사체들이었다.
“샤갈, 샤갈…….”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 에텔라의 손이 벌벌 떨리고, 샤갈의 눈에 피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괜찮아요?”
“…….”
두 사람의 태극이 어떤 식으로 증폭되는지 깨달은 시로네는 비로소 확신했다.
‘지옥이다.’
에텔라가 샤갈을 용서하면 샤갈은 더욱 큰 분노로 그녀를 짓밟을 것이다.
‘그것의 무한 반복.’
역치는 계속 커지게 되고, 그 거대한 감정만이 그들의 업을 지우는 듯했다.
“아주 거하게 하셨군요.”
흑승을 대동하고 걸어오는 에이전트는 다른 에이전트와 기질이 달랐다.
“시스템제어 지부, 정화 팀장 마큘라입니다. 미리 기별했으면 사원들이 실수할 일도 없었을 텐데.”
리안이 물었다.
“들여보내 주겠다는 건가?”
“그럼요. 우리 컴퍼니의 VIP인데요. 저를 따라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자세로 몸을 돌린 마큘라가 멀어지자 리안은 시로네에게 의중을 물었다.
“어떡하지?”
“무슨 속셈이든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사옥으로 들어가자.”
시로네를 따라 일행이 움직이자 에텔라와 샤갈도 천천히 일어섰다.
“…….”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격발 (1)
상아탑 95층에서 85층 사이는 이제 하나의 층이 되어 거대한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수백 미터 높이에서 바알을 내려다보는 시로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핸드 오브 갓의 포톤 캐논이 여지없이 작렬하고, 잠시 후 파공음이 터졌다.
바알의 일격, 강의의 기운이 포톤 캐논을 찢으면서 탑의 내벽을 할퀴어 댔다.
“크윽!”
미라클 스트림이 흔들리는 가운데 시로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96층.’
처음으로 95층이 뚫린 상태였다.
“길을 열어라, 야훼여.”
“…….”
바알의 안색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여력이 남은 듯했다.
시로네는 생각했다.
‘상아탑을 궤멸시킨다고 했지. 그렇다면 놈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건 태성이다.’
많은 별이 상아탑에서 한세상을 풍미했지만 구심점은 언제나 태성이었다.
그녀가 다그치고, 그녀가 달래고, 그녀가 결정하며, 그렇게 지켜 온 것이 인류였다.
‘악을 정의하는 것은 지성이다. 기준이 사라지면 악은 정당성을 갖게 돼.’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악은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지성이 될 것이다.
미카가 정보를 전달했다.
-30분이 지났습니다. 비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로네를 기다리고 있어요.
짧은 순간 전류가 흐른 것만으로도 바알은 적의 낌새를 눈치챘다.
“뭔가 노리고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상아탑 저층에서 필사적으로 막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마계를 견제하고 있다.’
데들리 크로스가 발동되면 상아탑은 물론 북반구 전체에 재앙이 닥칠 터였다.
‘상아탑 바깥으로 나를 밀어내는 게 최상의 결과겠지.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그의 의지가 상아탑에 뿌리내려 있는 한, 어떤 힘도 그를 밀어낼 수 없을 터였다.
“야훼여.”
바알이 머리 위로 장검을 치켜들자 서늘한 검기가 칼날에 기름처럼 번질거렸다.
아마도 마계에 준하는, 목숨을 건 결의가 강의의 능력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데들리 크로스가 아니라도 상아탑은 궤멸시킬 수 있다.”
‘그렇겠지.’
시로네가 바알에게서 느끼는 기운은 97층, 98층을 관통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게 마지막 공격이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 밀리는 순간 두 번의 기회는 없어.’
핸드 오브 갓이 전방을 가로막는 가운데, 바알의 눈빛이 깊은 심연에 잠겼다.
“간다.”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자를 대고 그린 듯 풍경에 수직선이 그어졌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그 선을, 또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빛의 손이 움켜쥐었다.
“크으으으!”
마치 손바닥이 베인 듯, 수직선을 따라 빛의 파편들이 분수처럼 터져 나갔다.
‘97층.’
힘을 조절하지 않았어도 반드시 양보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위력이었다.
‘98층!’
마지막 한 층을 남겨 둔 상태에서 시로네는 핸드 오브 갓에 힘을 불어 넣었다.
‘붙잡는다!’
야훼의 의지와 바알의 의지가 충돌하면서 98층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충격파가 터지고, 시로네의 육체가 98층의 천장에 박혔다.
“큭!”
그 상태로 아래를 살피자 악마의 얼굴을 가진 바알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야아아!”
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전심을 다한 강의剛毅였다.
시로네의 눈이 커졌다.
‘꼭대기까지 올라갈 생각이야.’
소름이 돋을 정도의 힘은 또한 각오였기에, 적이지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핸드 오브 갓에 충돌하자 황금 빛과 자색 빛의 경계선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바알의 의지가 강해졌다.
‘뚫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라클 스트림에 담긴 시로네의 의지 또한 강해지고 있었다.
‘막는다!’
몸이 조여 오고, 뱃속의 압력이 폭발할 듯 커지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이것이 야훼인가?’
마족에게 얼마나 가증스러운 존재인지는 바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약한 존재만이 칭얼거리는 법. 야훼가 무엇이든, 뛰어넘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넘을 수 없는가?’
바알의 의지가 시로네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류 전체를 끌어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엄청난 약점이 될 테지만…….’
야훼의 의지만큼은 이 세상의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좋겠구나, 인간이여.’
다른 마족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꺾고 싶다. 내 모든 의지를 불태워 제대로 야훼의 기운을 느껴 보고 싶다.’
육체가 짓이겨지기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바알은 불타는 호승심을 외면했다.
‘사탄이시여.’
모든 마족은 그에게서 나왔기에, 그들의 힘도 사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 시점인가?’
마계를 열어 데들리 크로스를 상아탑에 직격시키면 임무는 완수된다.
운석의 충돌은 지옥이 가진 최고의 무기지만, 상아탑이라면 교환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시로네는 핸드 오브 갓의 진동을 통해 바알의 의도를 짐작했다.
‘안 돼.’
인류가 울티마에 도달하기 전에 마계가 열리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크으으으!”
찰나의 시간 어떤 생각이 시로네의 뇌리를 스치고, 바알의 눈이 커졌다.
억눌려 있던 강의가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그의 검이 시로네를 향해 쇄도했다.
‘물러서는 건가?’
데들리 크로스의 발동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자포자기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함정인가.’
시로네의 능력 중에 마음을 율법처럼 조작하는 기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야훼는 마음을 다루는 자. 내 마음까지 변화시키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
바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속지 않아.’
그 무엇도 확신하지 않은 상태로 그는 시로네를 향해 전력으로 검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뭐야?’
바알의 장검이 시로네의 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진짜로 칼에 찔렸…….’
동시에 깨달았다.
‘아차!’
하지만 이미 시기는 늦었고, 핸드 오브 갓(손의 기술)이 둘을 쓸어 담았다.
“…….”
쿵쿵, 쿵쿵, 기관실의 금속음이 들리는 99층에서 바알은 전방을 살폈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시로네가 배를 가린 채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방법이…….’
100퍼센트 성공하는 마술이 있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마술을 선보이고 싶으면 실제로 손가락을 잘라 버리면 되는 것.
결국 장검을 복부에 찌르는 순간만큼은 그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이니까.’
바알은 시로네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넌 치명상을 입었고, 나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어.”
상처를 치료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곧바로 장검을 쳐들었다.
“죽어라.”
동시에 통제실의 비파가 버튼을 눌렀다.
“자기장 역전.”
68톤의 배터리가 튀어 나가는 순간 떵 소리를 내며 바알의 육체가 사라지고.
“……!”
충격에 휩싸인 그의 눈에 똑같이 배터리에 얻어맞은 시로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였나?’
엄청난 속도로 상아탑에서 멀어지자 바알이 강의를 극한으로 키웠다.
“크으으으!”
하지만 충격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손가락조차 까닥할 수 없었다.
점차 멀어지는 시로네의 모습이 점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바알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아아!”
분노의 일갈이 눈보라에 파묻혔다.
99층의 외벽이 무너지면서 탑의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아래로 쏠렸다.
“으아아! 내려간다!”
자유낙하의 아찔한 느낌 속에서 토케이가 비명을 지르고 비파가 입술을 깨물었다.
남은 외벽이 충격을 완충시킬 테지만, 어디까지나 건물의 기준이었다.
100층이 98층에 꽂히자 엄청난 진동이 그들의 뼈마디를 욱신거리게 했다.
‘제발, 제발!’
규모 대비 1퍼센트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탑은 지상에 처박히게 될 터였다.
“섰, 섰다.”
토케이가 중얼거리고, 비파는 제어 화면에 떠 있는 탑의 균형을 살폈다.
수직을 유지하는 듯했던 탑의 기울기가 0.1도에서 0.38도까지 늘어나고 있었다.
“쓰러지고 있어! 바람 때문이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앞에 3성급 주민 아르테가 부채를 들었다.
“풍경.”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탑 주위로 엄청난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계속 기울고 있어요!”
0.6도에서 0.72도.
상아탑은 세계 최대의 건축물, 1도 이상 기울어지면 태풍으로도 막을 수 없다.
“아르테! 회전을 높여!”
유체역학을 계산하는 토케이가 지시를 내리자 바람이 더욱 거칠어졌다.
후오오오오오!
“세워진다! 조금만 더!”
플러스마이너스 0.5도를 왕복하던 탑이 중심을 되찾자 아르테가 숨을 내쉬었다.
“거의 진공입니다. 탑의 연결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해야겠군요.”
블로 계열의 최강자인 마법사가 있었기에 미세 조정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씽을 돕지 못하고 통제실에 발이 묶이게 되었으니 언짢은 결과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가느다란 눈으로 흘겨보는 아르테의 시선을 느끼며 비파는 어깨를 으쓱했다.
“임기응변이죠, 임기응변.”
한편 바알과 마찬가지로 시로네 또한 배터리의 관성에 붙잡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