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13
정상회담을 지칭하는 단어에 루피스트와 알비노가 동시에 반응했다.
“어딥니까?”
“남방. 부족 연합입니다.”
성전이 개최된 이후 아직까지 특별한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세력이었다.
알비노가 턱을 괴었다.
“흐음. 코드 원이라고…….”
시로네의 말에 의하면 문 왕국의 살에 저격당한 대상에는 남방도 포함되어 있다.
‘토르미아의 국왕은 의식불명 상태. 남방도 다르지 않을 텐데. 설마 무사하단 건가?’
같은 생각으로 루피스트가 말했다.
“타국의 상황을 염탐하기 위한 계책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코드 투로 진행하죠.”
“아니, 그게…… 남방에서는 굳이 토르미아의 국왕이 아니어도 괜찮답니다.”
알비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남방이 제시한 조건은 시로네의 참석입니다. 그 외에는 이쪽의 편의에 맞추겠다고 합니다.”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명백한 목적이 있는 회담이다. 둘째, 남방의 수장, 은타라는 무사할 가능성이 높다.’
즉 문 왕국의 살을 막았다는 뜻이다.
‘동맹 가능성과 주술에 대한 정보. 어느 쪽이든 이번 코드 원은 필요하다. 문제는 시로네인데…….’
현재 토르미아와 선을 긋고 있기에 나서 줄지 의문이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가죠.”
시로네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포니를 구할 방법을 알려 줄지도 몰라요. 한시라도 빨리 회담을 잡아 주세요.”
“네. 그럼.”
외교 대신이 방을 나가자 알비노가 코드 원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참석하실 거죠?”
시로네의 물음에 루피스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친구를 위해서라…….’
고작 그 정도로 야훼는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전부인 것인지.
***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페르미는 작업을 중단하고 기지개를 폈다.
‘성전의 정보를 수집하고, 아포칼립스에서 채굴한 정보로 역전을 꾀한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으나 일단 각국의 급소를 파악하면 효과는 엄청날 터였다.
“응?”
그 순간 세계 최고의 정보 마법사인 람파의 마법, 골드 버드가 밀실에 침투했다.
물론 시전한 인물은 람파가 아닌 앵무용병단의 누군가일 터였다.
‘드디어.’
동시 사건이 불가능한 페르미는 아포칼립스와 성전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성전 참가를 택했으나 아무 대비 없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텔레 버드가 있으면 최단 시간에 정보를 받을 수 있다.’
마법을 넘기는 대가로 람파가 요구한 것은 당연히 아포칼립스의 채굴 정보였다.
의외로 거래는 순조로웠다.
람파는 이미 100세가 넘었고 총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었으니까.
‘골드 버드는 실시간 정보 통신 체계. 앵무용병단이 채굴에 성공했다는 뜻이야.’
어떤 정보라도 상관없다.
변화, 세계의 변화를 감지할 수만 있다면 아르디노의 광역 시야가 답을 도출할 터.
“성전을 뒤집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골드 버드에 손을 대자 암호가 풀리고 화면이 펼쳐졌다.
“…….”
그 화면에 담긴 정보는…….
“빌어먹을!”
쾅 소리를 내며 의자가 넘어가고 페르미는 곧바로 밀실을 나와 복도를 내달렸다.
‘영감탱이!’
케시아의 국왕 마놀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졸업시험에서 시로네에게 패하고 세상을 떠돌 때였다.
“젊은 놈이 여기서 뭐 하나?”
당시 오지에 있는 탄광촌에서 일을 하던 페르미에게 한 노인이 다가왔다.
석탄불을 쬐던 페르미가 고개를 들자 시체처럼 앙상한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벙어리냐? 이 어르신이 묻지 않나. 사지 멀쩡한 젊은 놈이 여기서 뭐 하냐고.”
“……일합니다.”
짧게 답하고 페르미가 다시 석탄불을 돌아보자 노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읏차.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 탄광은 수익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야. 언제라도 지반이 붕괴되어서 죽을 수 있지. 그래서 국가의 죄수들이 노역을 하거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막장들이 모이거든, 바로 너처럼.”
페르미가 숯을 휘젓다 말고 물었다.
“그래서 뭐요?”
“껄껄! 아직 눈빛은 살아 있구나. 죽고 싶은 놈에게 메키아 탄광은 최적의 장소지. 하지만 며칠 지켜보니, 너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
노인은 페르미를 지그시 응시했다.
“네가 알던 세상이 달라지기라도 한 거냐? 소중한 사람이라도 잃었나 보지?”
“오래전에.”
욜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내가 지키지 못한 거니까. 약자가 무언가를 빼앗기는 건 당연한 섭리죠.”
이번에는 노인이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영감님은 험지에서 뭐 하는 거예요. 집에서 손주 재롱이나 보시지.”
“이 탄광은 내가 관리하는 곳이거든. 어떻게 돌아가나 확인해야지 않겠나?”
딴에는 맞는 소리였다.
“후사는 없네. 먹여 살릴 식구들은 차고 넘치지만 말이야. 가끔 이런 곳에 쓸 만한 놈들이 오는 것 같아서 물색하는 중이야.”
“가업이라도 물려주시게요?”
“괜찮잖아. 실속 없는 탄광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밥은 먹고살 수 있을 거야.”
‘실속 없는 탄광.’
그 말의 진의를 곱씹던 페르미는 이내 부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잘 생각해 봐.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예쁜 색시도 얻고, 고기반찬도 먹을 수 있고.”
“왜 나죠? 똑똑한 놈들은 세상에 널렸어요. 아무나 붙잡고 시켜도 될 겁니다.”
“지식이 많다고 똑똑한 건 아니지. 아는 것을 주장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어, 아무도 듣지를 않는데. 차라리 백과사전으로 상대의 머리를 찍어 버리는 게 덜 무식해 보일 거야. 그럼 때려눕히기라도 하니까.”
페르미는 그저 듣고 있었다.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걸 생각하는 놈들은 많지 않아. 왜냐하면 무언가를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거든.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참고 또 참는 것 말이야. 바로…….”
노인이 검지를 겨누었다.
“자네처럼.”
정적이 흘렀다.
“포기하지 않았지? 관철시킬 생각이면 나에게 와. 캐낼 게 많은 탄광은 아니지만, 손해는 안 볼 걸세.”
“……3일 후에.”
페르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성으로 가죠. 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세상 꼭대기에 앉아 보고 싶다면, 최대한 오래 살아 보세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불을 내려다본 노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딱 들켜 버렸나?”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욜가의 아들.”
아르디노 페르미니까.
12시, 12국 (2)
***
페르미는 포기하지 않았다.
‘늦지 않았을 거야.’
살아가며 겪는 후회 중에서 진실로 늦었을 때는 많지 않은 법이니까.
케시아 섹터를 달리는 동안 그가 마주친 사람은 채 3명이 되지 않았다.
모두 엔젤에 절어 있을 터였다.
속도를 높일수록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페르미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케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마약을 조제하겠다는 미친 생각도 국왕 마놀카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분명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페르미에 대한 맹목적 신뢰였다.
“쳇!”
채 1초가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을 지나 페르미는 마놀카의 방문을 열었다.
“영감……!”
문 앞에서 급하게 멈춘 그의 시선이 책상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고정되었다.
시체처럼 앙상한 몰골로 잠에 빠진 모습을 보고 속아 넘어간 게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뚝뚝 떨어지는 피까지 거짓은 아닐 터였다.
늦었다는 생각을 애써 억누른 채 페르미는 마놀카에게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마놀카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허어억!”
페르미의 눈이 커졌다.
“영감님!”
마놀카의 생존을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행한 것은 회복 마법이었다.
따스한 빛이 방 안에 퍼지면서 마놀카의 고통스러운 표정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호들갑 떨지 마라. 잠깐 졸았을 뿐이야.”
“가요. 의사 친구가 있어요.”
세리엘에게 부탁하면 세계 보건 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마놀카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지 않느냐. 이건 육체의 병이 아니야. 마음의 병이지. 돌이킬 수 없어.”
페르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또다시 마놀카가 피를 한 바가지 뿜어냈다.
‘대체 뭐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면 세계의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페르미.”
마놀카는 웃었다.
“우린 꽤나 즐겁게 지냈지. 이제 그만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그게 순리야.”
“개소리하지 말아요. 이건 암살이에요.”
“네가 하려는 일을 해. 감정에 치우치지 마. 그건 정말로 너답지 않으니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감정 없는 기계? 전 세계를 마약에 오염시킨 마약왕?”
“유능한 놈.”
페르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착한 놈은 아니지. 하지만 나처럼 세상을 오래 살면 말이야, 악동도 귀엽게 보이거든.”
“나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마놀카의 손이 페르미의 멱살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악동에서 끝내라.”
“…….”
“악동에서 끝내. 악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이룰 건 없어.”
마놀카의 눈빛은 생명을 불태우는 듯 강렬했다.
“악동이든 악마든, 뭐가 다르죠?”
“……다를 건 없지.”
페르미의 멱살을 푼 마놀카가 다시 몸에 힘을 빼며 배시시 웃었다.
“넌 괜찮은 놈이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생기를 잃어 가는 마놀카의 눈동자 앞에서 페르미는 반박을 포기했다.
“세상 꼭대기에 올라가야죠.”
“꼭대기라…….”
마치 그곳이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마놀카는 천장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 말을 남긴 마놀카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폐에서 마지막 숨이 빠져나왔다.
케시아의 국왕은 사망했다.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은 쓸쓸한 방에서 페르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파라스 왕국의 공격, 세계의 율법이 변한 것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시로네가 늦은 거야. 차라리 내가 아포칼립스에 남아 있었더라면…….’
채굴이 조금 더 빨라졌을까?
‘인력이 부족하잖아. 구상부터 설계까지 전부 내 몫이야. 하나같이 마약에 취해 가지고…….’
덕분에 사탄교의 확장을 억제했지만.
‘엔젤도 적당히 써야지. 분명 2시간 간격으로 교대 순찰을 하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멍청한…….’
페르미는 생각을 멈췄다.
‘그만.’
나 이외의 그 무엇도 탓해서는 안 된다.
‘정신 차려, 페르미.’
징징대지 말라고, 새끼야.
‘할 수 없었던 게 아니야. 아예 잠을 포기했다면 순찰을 돌 수 있었을 테니까.’
매일 40분 정도의 수면을 확보해 뇌기능을 유지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
‘판단 미스다. 그래서는 안 됐어. 내가 무능한 거야. 더욱 시간을 쪼개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인력을 관리하고, 정세를 파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