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20
“허억!”
긴고아가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마치 실이 끊어진 듯 손유정이 쓰러졌다.
“아우, 잘못했어요. 제발…….”
레테는 꿈틀대는 손유정, 정확히는 허리에 달린 리체라의 얼굴을 보았다.
‘짜증 나.’
지옥에 빠삭한 탈주자의 머리통만 없었어도 시로네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터였다.
‘이것도 운명인가.’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는 시로네, 리안, 에텔라와 샤갈을 하나씩 훑었다.
‘야훼, 게헨나, 태극. 대체 업이 몇 년이야?’
초특급 VIP였다.
“안녕하세요. 화공사 사장 레테라고 합니다. 결국 이렇게 모이게 되네요.”
대답은 없었다.
손유정을 큰 보폭으로 뛰어넘은 그녀는 시로네의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좋아요, 제가 양보하죠.”
오랫동안 눈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레테가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저를 바치겠습니다. 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라면 불만은 없을 겁니다.”
“장난칠 기분 아니야.”
레테가 테이블을 쳤다.
“아니, 그럼 어떡하란 거예요! 진성음은 해방시킬 수 없다니까요! 시스템상 불가능하다고요!”
“가능해. 지옥을 정화하면.”
“그럼 마족들이 전부 소멸하는데? 당신, 이면 세계 관리자의 직무를 뭐로 아는 거야? 내가 여기를 얼마나 힘들게 관리하는지 알아?”
레테는 잔뜩 흥분했다.
“야훼고 부처고, 솔직히 현실에서는 딱히 좋은 취급 못 받잖아. 사상이니 신념이니 잔뜩 헤매고 있을 거면서, 왜 지옥에서만 깡패야? 왜 여기 와서 행패냐고!”
인간과 싸우는 건 사탄. 그녀는 오직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었다.
“내 생각도 좀 해 줘요. 태성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듯, 나는 마족을 위해 존재해요. 당신이 하는 말은 그냥 싸우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태성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시로네는 그 말이 참으로 듣기 좋았다.
“이렇게 해요. 현실에 있는 마계는 없애 줄게요. 대신 당신들은 여기서 업을 감당하는 거예요. 당신들의 업이라면 이면 세계의 모든 마족이 1만 년 동안은 먹고살 수 있는 양이니, 거래의 여지는 충분하죠.”
“마계는 없애. 하지만 진성음은 포기할 수 없어.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
레테가 눈을 깜박거렸다.
“응?”
“시옥을 통해서 빠져나갈 수 있잖아. 지금 한 자리 비어 있을 거야. 내가 죽였으니까.”
“…….”
정확히는 얼마 전에 위저드가 1명을 더 죽여서 두 자리가 비어 있다.
“하아.”
레테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답답하네, 진짜. 물론 컴퍼니에서 시옥 관련 코드를 만들기는 하지만, 대체 시옥이 뭔지는 알아요?”
“광신도.”
“그러니까 그 광신도라는 게……. 아니, 됐고. 직접 보여 드리죠. 어때요?”
구석에 앉아 있던 손유정이 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타싱어도 만날 수 있겠지?”
“모르타싱어? 아, 물론이죠. 시옥 후보군에 있거든요. 솔직히 좀…… 재능이 없는 것 같지만.”
레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시스템제어 지부, 컴퍼니를 견학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레테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아가페의 마음을 가진 야훼는 이면 세계에서 폭군이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
‘사탄의 율법이 해 줄 거야. 현실에서 그를 끝장내면, 이면 세계는 무사하다.’
기요르기에게 생각이 있다고 했다.
“그럼 출발하죠.”
속마음을 감추고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레테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정장을 입은 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같은 에이전트라도 입구에서 샤갈이 해치운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었다.
“이들은?”
레테가 소개했다.
“화공사의 이사진이에요. 컴퍼니의 지부장도 있죠. 이들이 안내할 겁니다.”
백발의 노신사가 고개를 숙였다.
“지부장 베니스토프입니다. 히든 코드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가 앞서는 가운데 시로네 일행과 이사진이 열을 맞추어 복도를 걸었다.
“에이전트.”
시로네가 중얼거리자 레테가 말했다.
“5대 시스템 중에서 관리자가 가장 많은 곳이 여기예요. 감정을 처리하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할 수 있죠. 존재의 시작부터 히든 코드를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감정이 곧 논리라는 거군.”
“네. 에이전트를 바깥 세계의 관점으로 정의하면,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자율적 프로세스. 그들은 인간이 중력을 느끼는 만큼이나 히든 코드를 자연스럽게 여겨요.”
바깥 세계의 관점을 들먹인 이유는 시로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일 테지만.
“…….”
위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는 불판의 농도를 조절하는 곳으로…….”
견학이라는 목적에 맞게 베니스토프는 각 부서를 지날 때마다 설명을 덧붙였다.
‘레테의 지시겠지.’
시로네에게 이면 세계를 이해시키면 차후 협상이 훨씬 수월할 테니까.
베니스토프가 계단을 가리켰다.
“바로 12층으로 가시죠. 시옥 후보자들이 테스트를 받는 곳이니까요. 그곳에 가면…….”
“잠깐.”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저 문은 뭐지?”
부서의 명칭조차 새겨져 있지 않은,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문이었다.
“저 문은 각 층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12층에도 똑같은 문이 있지요.”
허튼 거짓말이 독이 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관심을 돌리려는 기색이 여실했다.
“그러니까 뭐냐고?”
“……기관실로 향하는 문입니다.”
“기관실?”
베니스토프가 레테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설명 대신 그는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는 구체의 승강기에 탑승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더니 일행을 태운 구체가 무서운 속도로 가라앉았다.
곧게 뻗어 있는 터널의 초입에 서자 끔찍한 백색소음이 벽을 사이에 두고 전해졌다.
마치 수십만 명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저 벽 너머에는 지옥의 모든 마를 처리하는 중앙 연산장치가 있습니다.”
“그렇군. 정말로 별것 아니었네.”
시로네가 흘겨보자 레테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데려왔잖아요. 특별한 의도는 없어요. 핵심 장치이긴 하지만, 그냥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만 있어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건, 오히려 당신을 위해서예요.”
이면 세계의 장치는 생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터였다.
“직접 봐야겠어.”
한숨을 내쉰 레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니스토프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곳입니다.”
인간의 도시 하나는 들어갈 법한 계곡 사이에 거대한 뇌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아니, 뇌가 아니야.’
손톱 크기부터 사람 팔뚝만 한 것까지, 수많은 태아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온갖 잡소리를 내며 울어 대는 모습에 대범한 리안마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긴…… 대체 뭐야?”
레테가 말했다.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보다시피 저건 태아들이야. 그중에서도 낙태당한 아이. 인간과 같은 논리는 없지만, 감정은 똑같이 가지고 있어. 그 죽음의 공포에 의해서 이면 세계로 넘어오는 거야.”
시로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중앙 연산장치…….”
“네. 오직 태아만이 이면 세계의 마를 연산할 수 있어요. 이곳에 컴퍼니가 세워진 이유도 율법의 지형에 따라 그런 마가 흘러들기 때문이죠. 논리는 없고, 오직 감정만 있는 혼돈의 마魔예요.”
일행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덜 자란 몸을 꿈틀대는 태아를 지켜보았다.
계곡 아래는 불이었다.
‘불쌍한 아이들.’
후미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에텔라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윽!’
자궁 쪽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손이 저절로 아랫배로 향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태극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샤갈이 굳은 표정으로 에텔라를 돌아보았다.
“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샤갈의 관심을 매몰차게 차단한 에텔라는 섬뜩한 진실 앞에 좌절했다.
‘분명 이곳에 온 뒤로 월경은 안 했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생육신의 상태로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응……아! 응……아아아!”
버림받은 태아들이 울고 있었다.
5대 시스템 (1)
에텔라는 배를 강하게 압박했다.
‘큰일이다.’
율법의 지형에 따라 이곳은 비논리적인 마가 흘러드는 곳일 터였다.
‘반응하고 있어.’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복부가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팠으나, 그보다는 공포가 더 컸다.
‘이대로는 유산한다.’
아마도 샤갈의, 선의 추종자인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남자의 아이가.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해야…….’
여전히 판단은 어렵지만, 여자의 본능이 이 자리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선은 지키는 수밖에.’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부끄러웠지만 그녀가 용기를 내려는 그때, 샤갈이 나섰다.
“쳇! 뭐 하는 거야?”
모두 샤갈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똑같은 아귀일 뿐이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아귀들. 나는 이 엿 같은 사슬을 끊으려고 온 거야. 이딴 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오래 봐서 좋은 풍경은 결코 아니기에 시로네 일행은 곧장 샤갈을 뒤따랐다.
“…….”
오직 에텔라만이 사슬을 통해 전해지는 감정을 잠시 동안 음미할 뿐이었다.
1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베니스토프는 화공사의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화공사가 운영하는 이면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화공사 예하 지부, 둘째는 마족들이 사는 도시, 마지막으로 흑승이 관리하는 물류 창고죠.”
시로네와 리안은 그곳을 모두 경험했다.
“컴퍼니가 특별한 이유는 조금 전에 보신 육뇌, 중앙 연산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비논리적이지만 인과가 없지는 않아요. 현실이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면, 우리는 감정적 인과를 다루죠. 이를 업이라 합니다.”
시로네가 물었다.
“육뇌를 정화하면 진성음은 해방되나?”
“흐음. 이면 세계가 마비되겠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가정일 뿐이에요. 실제로 육뇌는 정화시킬 수 없으니까요.”
“왜지?”
“육뇌를 이루는 태아는 림보라는 종족으로 분류됩니다. 그들에게는 업이 없어요. 따라서 정화되지 않습니다.”
베니스토프가 검지를 들었다.
“꼭 낙태당한 태아만 림보가 되는 건 아닙니다. 기준은 업이에요. 세상에 태어났으나 논리를 모르는 아이도 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림보는 섭식을 쫓아 바깥으로 빠져나가지요. 바라마온 7구역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졌을 당시 에텔라와 샤갈은 ‘등뼈의 무덤’에서 그들을 보았다.
“조심하는 게 좋아요. 힘은 약하지만 잔인하니까요. 아니, 그런 개념조차 없다고 보는 게 맞겠죠. 림보족이 존재하는 원동력은 오직 생에 대한 집착입니다.”
시로네가 다시 물었다.
“만약 육뇌를 파괴하면?”
대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상상도 해야 하는 법이다.
“림보는 시옥과 마찬가지로 율법입니다. 구성원이 사라진다고 해도 개념은 사라지지 않죠. 태아를 불태운다고 해도 새로운 육뇌로 대체될 겁니다. 물론 심각한 오류가 생기겠지만, 시스템 전문가로서 말리고 싶군요. 야훼께서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베니스토프가 강조했다.
“파괴는 좋은 해결법이 아닙니다. 걸려 있는 게 많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현실과 이면 세계, 둘 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겁니다. 고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정밀한 기계를 해머로 치시겠습니까? 물론 고쳐질 수도 있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고철이 될 확률이 높을 겁니다. 돌이킬 수 없어요.”
“…….”
시로네는 생각에 잠겼다.
‘거짓말이 아니야. 진실이 아니라면 육뇌를 순순히 보여 줄 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수께끼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였다.
12층에 도착한 순간 복잡한 생각이 날아갈 만큼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사탄을 숭배하라!”
콜로세움처럼 웅장한 공간이었고 10층과 11층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인간의 귀를 여러 개 붙인 마이크를 붙잡은 마족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오오! 사탄이시여! 기쁨을! 쾌락을! 성공을 주소서!”
그러자 사방에 달린 수백 개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증폭되었다.
제단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마족의 말을 따라 했다.
“믿습니다! 사탄을 믿습니다!”
시로네가 물었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