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22
“괜찮아요, 내버려 둬도?”
당장이라도 긴고주를 외우면 손유정은 꼼짝없이 다시 불려 올 테지만.
“그녀가 선택한 일이야.”
시로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천둥벌거숭이라도, 친구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것은 진심일 테니까.”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제 그만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어때요?”
시로네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진성음이 시옥을 통해 현실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쉽게 체념할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머릿속에 미지근한 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육뇌. 거기서 놓친 게 뭐지?’
리안이 대직도를 뽑아 들며 말했다.
“시로네, 저기.”
13층의 계단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일단의 무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시옥.”
교만의 1시가 비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야훼.”
레테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시옥은 내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하지만 야훼를 상대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시로네가 하비츠를 죽일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마魔를 도려낸 야훼는 위저드처럼 하비츠를 대할 수 없었다.
‘정면 대결은 시옥에게 승산이 없어. 그런데도 여기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은…….’
당연히 사탄을 위해.
‘하비츠, 아니 사탄 녀석, 대체 현실에서 얼마나 밀리고 있는 상황인 거야?’
시로네의 몸에서 미라클 스트림이 퍼지자 무파의 얼굴이 본색을 드러냈다.
“크으으으!”
입구 쪽에 포진해 있을 신도들에게서도 거대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시로네가 말했다.
“무슨 생각이든, 얼마든지 해봐. 사탄의 유혹 따위, 나에게는 소용없으니까.”
‘그건 사실이지.’
따라서 시옥은 야훼의 주변 인물들을 유혹하여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리안, 에텔라, 샤갈.’
효과적인 카드였고, 그중에서도 리안은 무력으로도 야훼에 뒤지지 않았다.
‘한 번만 걸리면 된다.’
사망한 2명을 제외한 10명의 시옥이 리안을 향해 히든 코드를 발동했다.
에텔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도 싸워요.”
그 순간 태극의 사슬이 출렁이면서 그녀의 몸에서 힘이 쭉 하고 빠져나갔다.
“허억!”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샤갈이 그녀를 안고 출구로 달리고 있었다.
“멈춰요!”
그 어떤 대꾸도 없이 10층의 문을 부순 샤갈이 복도를 빠르게 질주했다.
시로네가 있는 곳에서 굉음이 터지자 에텔라가 사지를 버둥거렸다.
“내려놔! 날 내려놓으란 말이야!”
샤갈은 미로처럼 복잡한 길목을 한참 우회한 뒤에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사실은 에텔라도 알고 있었다.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태극의 업에서 샤갈을 막아 내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어.”
그녀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착각하지 마. 이런다고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
어쩔 수 없이 악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에텔라의 마음을 괴롭혔다.
“죽을 수 없는 게 한이야. 허튼 기대는 하지 마. 당신이 바라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쁜 말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자명했다.
샤갈이 감정대로 내뱉었다.
“그래? 선이 어쩌고 하더니, 고작해야 너도 그 정도였군.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관심 없었으니까.”
‘쓰레기 같은 인간.’
에텔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고 또다시 복부에 통증을 느꼈다.
“아아.”
샤갈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따라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는 방법이야. 이 개 같은 인연만 끊으면 피차간에 고생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에텔라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해야 돼.’
복부의 고통이 사라졌으나 더 이상 샤갈과 반목하는 건 위험할 듯했다.
“뭐, 뭐야, 당신들은?”
모퉁이를 도는데 사탄교의 신도가 화들짝 놀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잘됐군. 이곳에 살면 지리에는 빠삭하겠지?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라. 거짓을 말하면…….”
샤갈의 주위에 환영이 아른거리더니 한 자루의 속사검이 손에 붙들렸다.
“죽는다.”
“……크크크크.”
허파를 들썩인 신도가 두 손을 들자 2미터가 넘는 창이 실체화되었다.
“고작 단도? 내 히든 코드는 창을……!”
샤갈의 손이 신도의 이마를 붙잡더니 그대로 벽을 향해 밀고 들어갔다.
반동을 이용해 순식간에 일곱 차례 뒤통수를 벽에 찍자 신도가 반쯤 의식을 잃었다.
그러다가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의 감촉이 스며들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히익! 살, 살려…….”
“마지막 기회다. 업을 관리하는 부서가 어디야?”
“흐윽!”
겁에 질린 신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카르마 관리부.
커다란 모니터가 빼곡히 설치되어 있는 곳에 전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 자식…… 억!”
불과 3분 만에 소란은 종료되었고, 쓰러진 20명의 에이전트가 소멸했다.
“짜증 나게 하고 있어.”
에텔라는 모니터로 향하는 샤갈을 바라보았다.
‘더 강해졌어.’
아마도 시스템제어 지부의 입구에서 에이전트를 학살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태극의 힘이 그를 강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계속 악해지고 있는 거야.’
“여기서 내 과거를 알 수 있다는 거지. 내가 뭐였는지만 알면 끝이야. 업이고 뭐고 필요 없다고.”
샤갈이 그녀를 불렀다.
“이쪽으로 와 봐.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라 에너미에 의해 조작된 인연이 궁금했기에 에텔라도 적극적이었다.
“장치는 모두 생물적이에요. 피를 사용하는 걸 보니, 여기에 당신의 피를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샤갈이 단도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죽 하고 그었다.
피가 떨어지자 화면에 마족의 언어로 무언가가 적히기 시작했다.
해석은 할 수 없었지만 그다음의 영상부터는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서커스단이 공연을 하는 장면, 샤갈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
비록 그 화면에 샤갈은 없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엄마.”
샤갈을 닮은 사나운 인상의 여자가 공중 곡예를 하며 박수를 받고 있었다.
‘원인. 샤갈이 존재하는 원인부터 나오는 거야.’
화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곧이어 그들은 생소한 냄새를 맡았다.
‘샤갈의 기억…….’
냄새는 과거의 정보를 담는다.
더 이상 화면이 필요 없이, 그들은 샤갈이 존재했던 시간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샤갈의 어머니는 서커스 공연을 보러 왔던 어떤 갑부의 아들과 눈이 맞았다.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임신한 순간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응애! 응애!”
누구도 돌봐 주지 않는, 썩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샤갈은 그렇게 태어났다.
3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어머니는 샤갈을 데리고 으슥한 골목을 찾았다.
“하아. 하아.”
골골하게 잠든 아기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잔혹하게 일그러지고.
“쓸모없는 것.”
마치 물건처럼 샤갈을 땅에 패대기쳤다.
“흐흐. 흐흐흐흐.”
샤갈은 마치 즐거운 공연을 보는 것처럼 웃었다.
‘그래, 이래야 나답지.’
결코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지옥에 떨어진 입장에서는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샤갈을 버린 어머니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달아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기의 울음소리.
한참이나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입술을 깨물고 아기에게 달려갔다.
“잘 살아.”
그러고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동전 몇 푼을 모포에 넣고는 영영 떠나 버렸다.
“흐! 흐윽! 흐흐흐! 흐으으으!”
아기에게 동전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염병할!’
웃는 얼굴로 눈물을 쏟아 내는 샤갈을 바라보며, 에텔라도 마음이 무거웠다.
‘불쌍한 사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아원에 맡겨진 샤갈을 데려갈 사람이 나타났다.
“어?”
두 사람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에텔라의 스승이자, 샤갈이 직접 그의 손으로 죽인, 카르시스 수도회의 라파엘이었다.
5대 시스템 (3)
***
리안의 대직도가 굉음을 일으키자 사탄교의 집회장이 초토화되었다.
시옥은 믿을 수 없었다.
“왜 히든 코드가 들어가지 않지?”
10명의 시옥이 동시에 능력을 발동했으나 리안의 동작은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통했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증거였다.
현재 그에게 시로네는 가족을 몰살한 원수, 사랑하는 모두를 고문한 악인.
“통했지만, 상관없는 거야.”
리안의 시선은 오직 시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시로네의 검이다.”
시로네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스스로 약속한 맹세를 지키는 것이 기사이기에.
아집의 3시가 말했다.
“……바보야?”
대직도가 땅을 내리치자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충격파가 밀려들었다.
교만의 1시가 선택을 되돌려 시옥의 위치를 바꾸었으나 섬뜩함은 남았다.
‘바보도 저 정도면 재능이다. 이럼 계획이 틀어지는데. 차라리 야훼를…….’
그녀가 흘끗 옆을 살폈다.
리안이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시로네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레테를 위시한 컴퍼니의 간부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그를 포위한 상태였다.
시로네가 차갑게 물었다.
“싸우겠다고?”
“말했듯이 우리의 제1원칙은 협상이에요. 하지만 시옥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초고대 문명이 개방될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바깥 세계와 연결되는 순간 관리자의 권한은 더욱 강해질 터였다.
‘사탄이 해 줄 거야. 현실에서 야훼를 제압하면 오파츠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오파츠란 파라스의 국왕 키트라였다.
베니스토프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내리시지요. 우리의 조건에 따른다면 서로 인상을 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로네는 컴퍼니의 이사진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관리자.’
마족과 달리 아가페의 마음은 그들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않을 터였다.
‘무력과 무력의 대결.’
아가페의 감정이 사라진 헥사의 연기가 불꽃처럼 시로네를 불태웠다.
레테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결국 타협은 할 수 없다는 건가요? 어리석군요. 마와 싸우는 게 야훼의 전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