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24
“아아.”
마치 화면이 분할된 것처럼 샤갈의 거짓 기억이 향수에 스며들었다.
폭력단이 풀잎 서커스단을 공격한 날이었다.
“단장님! 티아!”
수많은 시체 속에서 티아를 찾아냈고, 모두를 죽인 라이덴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말했다.
“라 에너미.”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나 현재의 샤갈은 퍼뜩 깨달았다.
‘알고 있었던 거야.’
최면에 걸린 것처럼 거짓 기억 속에 살면서도, 후각은 이상함을 감지했던 것.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라이덴이 튀어 나갔다.
“라 에너미!”
속사검과 속사검의 대결이 펼쳐지고, 샤갈은 자신의 스승 라이덴을 죽였다.
현실의 샤갈은 비로소 싸늘하게 식어 있는 자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었다.
‘라파엘.’
스승님.
일곱 살까지의 기억 동안 그가 사건을 초월해 전달해 준 하나의 가르침은.
“용서해라.”
너의 인생을 망친 모든 것들을.
“으아아아!”
현실의 샤갈은 머리를 잡고 절규했다.
‘용서하라고?’
이십몇 년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갔는데도, 그것을 용서해야 한다고?
‘왜?’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어째서 용서해야 하지? 잘못한 건 내가 아니잖아!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샤갈의 분노를 사슬로 전해 받은 에텔라가 황급히 마음을 다스렸다.
“진정해요! 여기서 폭주하면…….”
“으아아아!”
에텔라의 말조차 듣기 싫은 샤갈이 소리를 치는 순간, 기억의 냄새가 변했다.
“아…….”
기억 속에서 라이덴을 죽인 이후로, 샤갈은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라 에너미를 추적했다.
밑사건의 향수가 여전히 살아 있는 그가 라파엘을 만난 건 어쩌면 필연.
‘강하다.’
음양파동권의 직전 계승자는 이미 세계적인 살인자가 된 샤갈을 몰아붙였다.
라파엘은 혀를 찼다.
‘샤갈이라. 끔찍하게 뒤틀린 자로구나. 내버려 두면 세상의 독이 될 인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럼에도 죽일 수 없는 이유는, 샤갈을 본 순간부터 느껴지는 가슴의 고통.
‘모르겠다.’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잊어버린 거야.’
마치 전생의 인연처럼, 고이 간직하던 어머니의 유품에 얼굴을 묻었을 때처럼.
‘그랬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라파엘은 샤갈이라는 존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된 것이었더냐, 샤갈?’
라파엘이 말했다.
“어느 길을 가든, 되돌아오는 길은 자네의 뒤에 있다네.”
속사검이 라파엘의 심장에 박히고, 거의 동시에 몇 차례의 칼질이 이어졌다.
“하아. 하아.”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샤갈은 쓰러진 라파엘의 시체를 응시했다.
물론 상대가 봐줬다고 확신할 만큼 샤갈의 실력은 서투르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느낌.
“마지막 순간에 멈춘 건가?”
실수라고 보기에는, 짧은 순간의 판단 하나로 목숨을 잃게 된 상황이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별 시답잖은…….”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던 그 말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아마 라파엘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분노를 억누르고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이 개자식들아!”
눈에 핏발이 선 샤갈은 공기를 전부 빨아들이듯 향수를 들이마셨다.
에텔라를 만난 기억, 그녀를 티아로 착각한 기억,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농간이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농락당한 분노가 샤갈의 이성을 완전히 불태웠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샤갈은 후천적 살인마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여 버릴 거라고!”
그리고 그는…… 악 중의 악이었다.
카르마 관리부의 문이 열리고, 소란을 들은 에이전트들이 들어왔다.
동료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네놈들이…… 컥!”
속사검이 박히고, 문가에 서 있던 에이전트들의 급소에 전부 구멍이 뚫렸다.
“키이이이! 키이이이!”
세상을 향한 무차별적인 적개심이 에이전트에게 집중된 위력은 가히 끔찍했다.
“샤갈! 안 돼요!”
에텔라가 사슬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버텼으나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허억!”
가슴에서 사슬이 더욱 빠져나오고, 샤갈은 문을 뚫고 복도로 달려갔다.
‘계속 늘어나고 있어.’
태극의 작용이 확장되면서, 두 사람을 연결하는 사슬도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지?’
샤갈을 붙잡기 위해 복도로 나서려던 에텔라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스승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한 가지의 의문에 대한 해답.
‘희생하신 거군요, 샤갈을 위해.’
그것이 선.
여전히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사슬을 지켜보던 에텔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스승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잠시 아랫배의 온기를 느껴 보던 에텔라는 눈을 번쩍 뜨고 밖으로 나갔다.
육뇌는 샤갈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
토르미아와 남방의 코드 원.
근위대장 라이가 호위하는 가운데, 시로네와 루피스트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깊은 산중이었고, 남방의 전사들이 맹수의 눈빛으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족장님, 시로네가 왔습니다.”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으로써 루피스트의 발언권은 사라진 셈이었다.
“반갑습니다. 시로네입니다.”
족장 은타라는 야윈 얼굴의 노인이었으나 그를 대하는 부족민은 공손했다.
그것만으로도 남방의 부족들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야훼여.”
은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나, 목소리만으로 예의를 표하는 능력이 있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왜죠?”
물론 시로네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살을 막았지?’
속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은타라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은 만나고 싶었소. 야훼는 통합적 정신 체계를 추구한다고 하더군요.”
두 가지 질문에 동시에 답한 기분이었다.
“세계에 비해 낙후된 남방이 성전에 참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족에 의한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오. 물론 그 일등 공신은 가올드라는 사람이지.”
그의 폭주로 남방 대륙의 마족들이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간 전적이 있었다.
“가히 가공할 인간의 극치. 하지만 거대한 남방을 홀로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오. 우리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지.”
은타라가 눈에 힘을 주었다.
“엘리키아.”
시로네는 듣고 있었다.
“남방의 모든 부족들은 각기 다른 신을 믿고, 그 신을 추앙하기 위해 밤새도록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오. 문명의 언어로 하자면, 트랜스 상태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엑스터시에 도달하는 것이오.”
“그렇군요.”
시로네는 은타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엘리키아는 남방의 모든 부족들이 합심하여 만든 하나의 군무이자 노래.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 세계의 율법을 바꾸는 기술이라오.”
물론 울티마하고는 다르다.
엑스터시를 이용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는 감정적인 통합에 불과.
‘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인류가 현실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울티마는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보여 드리지요.”
은타라가 고개를 돌리자 천막이 열리고 횃불 속에 일단의 무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70명이었다.
“엘리키아.”
선두에 선 남자가 중얼거리자 70개의 입에서 동시에 저음이 새어 나왔다.
“오오오. 오오오.”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상체를 튕기던 그들이 허리를 숙이고 스텝을 밟았다.
십자의 동선을 왕복하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쿵쿵 하고 땅이 울렸다.
토르미아의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이만이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오오오. 오오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70명의 부족민이 무아지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율법이 변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스피릿 존을 통해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지 않으면, 양자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 결국 트랜스 상태라는 거야.’
스텝이 더욱 빨라지면서 급기야 모두의 눈에 선명한 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신호.’
어떤 신호인가.
“후! 하! 후!”
땅을 빠르게 쿵쿵 뛰던 부족민들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고 막사를 노려보았다.
“크아아앙!”
빛의 아지랑이가 뭉친 거대한 맹수가 시로네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명백한 적의가 담긴 공격에도 시로네는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무형의 장벽이 있는 것처럼 맹수의 환영이 시로네의 앞에서 동전처럼 납작하게 뭉개졌다.
짝! 짝! 짝!
느린 박자로 박수를 치는 은타라의 목에는 어느새 라이의 장검이 걸려 있었다.
“적대 행위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진즉 죽이지 못한 이유는 시로네의 능력이 장검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위대장의 말이 옳아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얘기를 듣는 게 좋겠어요.”
시로네의 말이 떨어지자 라이가 검을 거두고 날렵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은타라의 눈이 갈매기처럼 휘어졌다.
“대단하군요. 남방의 필살기인 엘리키아를 막아 내다니. 역시 마음에 통달하신 분.”
“대단한 위력도 아니었는데요.”
시로네의 도발에도 은타라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지요. 고작 이 정도의 위력이랍니다. 서투른 솜씨를 자랑해서 미안하군요.”
보다 못한 루피스트가 끼어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남방에는 이걸 할 수 있는 부족민이 700만 명이 넘는다는 거요.”
“…….”
이번만큼은, 시로네도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내가 살을 막았는지 알고 싶으시오? 700만 명의 통합. 거기에서 나오는 마음의 힘. 나는 이 힘을 야훼, 당신에게 주고 싶소만.”
은타라가 시로네를 가리켰다.
“마음의 기술에 통달한 자가 엘리키아를 사용하는 건, 야훼에게 날개를 다는 격이지. 울티마…… 내 생각에도 요원하지만, 남방의 능력으로 최소한 700만 인人을 선물로 준다는 뜻이오. 단, 그 전에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남방에 무엇을 줄 수 있느냐는 건가요?”
은타라가 웃었다.
“껄껄! 예상보다 과격하시군. 뭐, 합리적인 질문이기는 하지. 하지만 틀렸소. 정답이 딱딱 정해져 있는 것들은 물을 필요가 없는 거니까.”
“그렇다면 알고 싶으신 게 뭐죠?”
적극적인 협상 태도를 드러내자 은타라가 테이블에 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