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3
“시로네는…… 가끔 희미해질 때가 있어.”
“호오? 그거 참 시적이네.”
에이미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했기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사실이야. 마법학교에 큰 사건이 있었어. 전교생의 목숨이 위험했던 사고였지. 시로네가 아니었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나도 그렇고.”
“전교생? 무슨 일인데?”
에이미는 아케인 사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시로네가 마지막에 모두를 위해 희생한 일도.
“…….”
테스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과연 누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 시로네가 보여 준 마법보다도 그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시로네의 목소리를 들었어.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그때 시로네는 아주 희미했다고. 금방이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아니, 세상에서 없어질 것처럼.”
“그게 어떤 것일까?”
“시야.”
에이미는 당시를 회상했다.
“지금도 종종 생각을 해. 시로네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모두를 위해 희생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로 세상을 보잖아. 1인칭시점으로 말이야. 그렇기에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때로는 그 시점을 탈피해서 남을 돕거나 배려하지.”
“남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배려할 수 있으니까.”
“맞아.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 그날 시로네가 모두를 위해 희생한 행동은 그런 것과도 달랐다고. 시로네의 시야는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아.”
“높은 곳이라면?”
“아마도 전지적 시점이 아닐까?”
에이미가 천장을 가리켰다.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시로네는 희미해져. 자신조차 점이 되어 버리는 극단적으로 높은 시야. 그래서 시로네의 희생에는 차별이 없었고…….”
“네가 아닌, 모두를 구했구나.”
소중한 몇몇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추락하는 학생 중에는 모르는 자도, 시로네를 싫어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로네는 만인을 위한 선택을 했다.
모든 생명의 무게를 똑같이 인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살았기에, 우리는 정상적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대가로 시로네는…… 정말로 돌아오지 못할 뻔했어.”
에이미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낀 테스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로네에게 화가 났냐고? 아니. 어떻게 화를 내겠어? 사실 호객꾼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 시로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도 끝까지 싸웠을 거야.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에이미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는 또다시 시로네가 우리 곁을 떠나 버리는 건 아닐까?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나도 남들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 그저 하나의 점이라면…….”
‘그런 거였구나.’
테스는 에이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 시로네는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어. 그래서 커플 여행인 줄 알면서도 너에게 부탁을 한 거잖아. 너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과 달라. 시로네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미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에이미, 차라리 시로네에게 말해. 왜 그때 내 편을 안 들어 줬냐고. 너무너무 서운하고 분통이 터져서 잠이 안 올 거 같다고.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에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시로네도 알고 있을 거야. 내 말에 반박하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고. 너무 걱정하지 마. 조만간 풀릴 테니까. 그래, 맞아. 솔직히 네 말대로 처음이라 어색한 거야.”
테스의 입장에서는 답답했다.
어떤 식으로 설득해도 서로가 서로를 안다는 말로 끝날 뿐이었다. 마법사는 입을 열지 않고 교감하는 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후우, 마법사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모르겠어.’
***
시로네와 리안은 잡화점 골목에 도착했다.
필요한 재료가 달랐기에 미로처럼 이어진 상가를 둘이 돌다가는 밥때를 놓칠 듯했다.
시로네가 말했다.
“여기서 따로 움직이자. 각자 물건을 사고 별장으로 돌아가면 될 거 같은데.”
“그럴까? 하지만 혼자 들 수 있겠어?”
시로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힘이 없기로서니 마늘, 양파, 후추도 못 들까?
기사 서약을 했다지만 장바구니까지 걱정하는 건 사양이었다.
“됐어!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너나 길 잃어버리지 마. 요리 대결인 거 알지? 지는 사람이 설거지하는 거야.”
“좋아! 에이미랑 사이좋게 설거지하게 해 주지. 제발 지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이 기회에 에이미랑 화해하고 싶으면 말이야.”
“화해는 무슨. 싸운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야? 항구에서 대판 했잖아. 그래서 지금은 서로 어색해하는 상황이고.”
시로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미는 그렇게 속이 좁지 않아.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야. 서로의 의견을 내놓다 보면 충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하! 바보야, 그걸 싸웠다고 하는 거야.”
“…….”
시로네는 말을 말아 버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리안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자괴감이 심했다.
“아무튼 됐고. 나는 일단 채소부터 사러 갈 테니까, 너도 빨리 구해. 이따 별장에서 보자.”
“좋아! 그럼 나는 고기 끊으러 가야겠다.”
시로네는 정육점을 향해 돌진하는 리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눈빛만 봐도 얼마나 많은 고기를 끊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후우, 어쨌든 나도…….”
시로네는 에이미가 준 쪽지를 확인했다.
무슨 요리인지는 모르지만 구하기 힘든 재료는 없었다. 다만 가짓수가 리안보다 많았기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할 듯했다.
30분 정도를 돌자 대부분의 재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관광도 겸했는데, 휴양지여서 그런지 가게들도 이색적이고 신기했다.
상품을 걸고 게임을 하는 좌판이 흥행했고 거리 행진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엄청 번화하구나.’
상업 지구 전체가 유흥에 치중한다는 건 관광객이 쉬지 않고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대륙에서는 들을 수 없는 자유분방한 웃음소리가 남국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재밌는 게 많네. 내일은 여기서 놀아야겠다.’
마지막 재료까지 구입한 시로네는 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눈앞의 상점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여성이 떠밀리듯 바닥에 쓰러졌다.
“꺄응!”
“꺄응?”
이상한 비명 소리였다.
돌아보자 20대 중반의 여성이 땅을 짚고 있었다.
단발머리였고 앞머리를 일자로 냈는데 새침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로 가슴께를 가렸다.
“왜, 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요?”
건물에서 뚱뚱한 남자가 나왔다.
“크크크, 이거 왜 이래? 같이 놀자는데?”
“저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관광지에서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면 물어보나 마나지. 나랑 놀자니까?”
남자의 이름은 가모스로, 갈리앙트섬의 재력가였다.
엄청난 거구였지만 근육과는 거리가 멀어서 전신이 비계였고 특히 복부 비만이 심각했다. 하지만 돈의 힘은 무시무시한 모양인지 좌우에 건장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좋게 말할 때 따라와. 너도 뺄 입장은 아니잖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가모스가 여자를 끌고 가는 와중에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관광객은 타지에서 위험한 일에 엮기기 싫어했고, 현지인들은 가모스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시로네가 소리쳤다.
“이봐요! 그만두세요!”
가모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주제도 모르는 놈이 덤비나 했더니 아직 스물도 안 된 소년인 데다가 양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섬. 갈리앙트(5)
가모스가 물었다.
“뭐야, 넌?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끼어들어?”
“그 여자분 풀어 주세요. 사람들도 다 보고 있고, 금방 경비대가 올 거예요.”
“푸하하! 경비?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누군 줄 알면 뭐가 달라져요?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내가 직접 가서 경비를 불러오겠어요.”
“흐음…….”
가모스가 잡은 손을 풀자 여자는 곧바로 달려 시로네의 등 뒤로 숨었다.
유약한 소년이지만 그녀가 기댈 사람이라고는 인파 중에서 시로네뿐이었다.
“살려 주세요. 저 사람이 나를…….”
가모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별 거지 같은 게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군. 어이, 꼬마야. 나는 이곳 갈리앙트섬의 무역상이다. 저 여자는 내 물건을 훔치려고 했단다. 그것도 고급 도자기를 훔치려다가 깨트려 먹었다고.”
“네? 도자기요?”
만약 가모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뒤에 숨어 있는 여자는 도둑이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그걸 빌미로 같이 좀 놀아 보려고 했지. 물건을 파손했으니 내 입장에서도 변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 경비를 불러 봤자 잡혀가는 건 저 여자라고.”
시로네가 뒤를 돌아보자 여자가 시선을 피했다.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이에요?”
“네.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그 도자기가 꼭 필요했어요! 정말이라고요!”
“하하하! 도자기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세상에 없단다. 필요하다면 돈이겠지. 나는 돈을 벌게 해 주려던 것뿐이야. 이제 알겠지, 꼬마야? 저런 여자하고는 얽히지 않는 게 좋다. 나 정도는 되어야 휘두를 수 있는 거야.”
시로네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친구랑 놀러 온 모양인데, 산 거로 맛있는 요리나 해 먹으렴. 어른들 사정에 함부로 끼어들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단다.”
여자가 시로네의 팔을 흔들며 사정했다.
“제발 가지 마세요! 당신이 가면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차라리 자수를 하는 건 어때요? 경비에게 말하면 이런 수모는 안 당해도 될 텐데요.”
“절대로 안 돼요. 저 인간은 이 섬을 꽉 잡고 있다고요. 제발 저를 믿어 주세요.”
‘어떡하지?’
심정적으로는 가모스가 더 괘씸하지만, 여자 또한 사달을 일으킨 원인이자 주범이었다.
둘 다 신고를 한다고 해도 여자의 말대로 가모스가 섬의 유지라면 오히려 여자만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경비대로 가죠.”
시로네가 말했다.
“다 같이 경비대로 가요. 대신 제가 이 여성분을 따라갈 테니 법적인 절차를 밟도록 하죠.”
“흠.”
가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자를 따라가겠다는 것은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인간의 배려라는 것도 결국 자기중심적, 섬에 놀러 온 학생이 여기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는 특별한 속셈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껄껄! 그렇군. 너,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구나? 애송이가 어디서 이런 미녀를 만나 봤겠어? 그럼 오히려 나에게 잘 보여야지.”
시로네가 미간을 구겼다.
“사람들이 다 당신 같은 줄 알아요?”
“아니면 왜 나서는 거냐? 저 여자는 도둑질을 했다. 경비에게 넘겨 버리면 그만이야.”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럴 자격도 없고.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바랄 뿐이에요.”
애초에 법을 만든 이유는 인간에게 타인을 심판할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순간 여자의 눈이 빛났다.
‘호오? 제법…….’
반면에 가모스는 코웃음을 쳤다.
“좀도둑 상대하는데 뭐가 그리 거창해? 어디서 책 좀 읽은 모양인데, 현실은 다르단다, 애송아.”
“뭐가 다르죠?”
“흐음.”
가모스는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그도 경비대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경비대장과도 막역한 사이지만, 여자에게 한 짓이 있는지라 영 면이 상했다.
“좋아. 변상은 필요 없다.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
“뭐죠?”
“네가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멋진 사나이라는 건 알겠다. 그럼 대신해서 나에게 사과를 할 수도 있겠지? 모두 보는 앞에서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거다.”
구경꾼들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좋게 풀린 셈이지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좋아요, 그걸로 용서해 준다면.”
“말만 하지 말고 고개를 숙여. 아주 정중하게 나에게 사과를 올리란 말이야.”
시로네는 허리를 구부렸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거만하게 시로네를 내려다보던 가모스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어퍼컷을 날렸다.
“흡!”
눈앞에서 솟구치는 주먹에 시로네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코끝에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가모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아라. 피했잖느냐? 넌 진심으로 사과를 한 게 아니야. 네가 주먹을 맞았다면 저 여자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피했다. 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지? 현실은 만만하지 않아. 너는 그저 착한 척 가식을 떠는 것뿐이라고.”
“그게 뭐가 문제죠?”
현실은 다르다고? 설령 가식이라고 해도 나쁜 짓을 하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이 녀석이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혼자 고고한 척 굴지 말란 얘기다. 저 여자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그만 물러가는 게 좋을 거야.”
여자는 조소를 지었다.
이토록 당당하게 현실을 말할 수 있는 이유도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자를 도와주지 않았던 구경꾼들은 가모스의 말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내심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릿속의 옳고 그름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결국 인간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
어쨌거나 기회였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이목을 집중시키는 지금 빠져나가지 못하면 결국 가모스의 넓은 인맥에 발이 묶이게 될 터였다.
그녀가 슬그머니 벽을 타고 인파의 뒤로 빠져나가는 사이 가모스의 경호원이 나섰다.
말을 듣지 않으면 조금 전의 어퍼컷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였으나 시로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협박은 통하지 않아요. 어떤 판결이 내려지는지 확인할 때까지 책임질 겁니다.”
“그래?”
가모스의 눈빛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