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4
사람 좋은 상인의 탈을 벗은 그의 표정은 실로 흉흉했다.
“그럼 이것도 책임질 수 있겠냐?”
대치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가모스의 목소리를 듣고 진검을 뽑아 들었다.
“…….”
살기는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 관념을 상상할 수 있는 한 인간을 압도하는 무력이기도 했다.
예리하게 벼린 장검이 자신을 겨누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 해? 빨리 쫓아 버려!”
지시가 떨어지자 경호원들이 좌우에서 압박하듯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여차하면 베어 버릴 태세였다.
“위험해!”
경호원의 눈에 흙먼지가 팍 튀었다.
이어서 돌멩이가 날아와 다른 경호원의 이마를 때렸다.
“큭! 누구야!”
시로네가 돌아보자 골목 모퉁이로 피신한 여자가 돌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뭐 해? 이쪽으로 와! 빨리!”
경호원에게 연거푸 돌팔매질을 한 그녀가 시로네의 손을 붙잡고 달렸다.
“따라와!”
“어? 잠깐만요! 저기……!”
장바구니를 챙기지 못한 시로네가 브레이크를 걸려고 하자 여자가 소리쳤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저 녀석들하고 얽히면 골치 아파진단 말이야!”
어떤 게 더 중요한지는 시로네도 알았기에 두 사람은 복잡한 골목길을 내달렸다.
여자가 길을 꿰뚫고 있는 덕분에 손쉽게 경호원을 따돌릴 수 있었다.
시장 쪽에서 가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뭣들 하고 있어? 전부 가서 잡아 와! 그 녀석들, 아주 요절을 내 버리겠어!”
***
창고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지스의 위로 팔코아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아! 아! 살려 주세요!”
맞을 때마다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디를 맞았는지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뇌에 들어오는 쇼크만이 공포를 유발하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자식. 맞으니까 기분 좋지? 응? 기분 좋을 거야. 그러니까 더 맞아라.”
무릎을 꿇고 있는 지스의 친구들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손바닥을 비볐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저희가 나가서 벌어 올게요! 이러다가 진짜로 죽겠어요!”
“아, 그래? 이제부터 너희가 맞을래?”
“으으…….”
친구들의 몸이 굳었다.
짝눈을 살벌하게 뜨고 있는 팔코아의 얼굴이 악귀처럼 보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지스를 죽일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어차피 항구의 양아치들 몇 명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찾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팔코아는 일부러 얼굴은 때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소름 돋게 두려웠다.
“야, 일어나 봐.”
팔코아가 머리채를 들어 올리자 힘이 풀린 상태에서도 지스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맞은 것도 아니건만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살,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아프냐? 아파? 말해 봐. 아파? 아파?”
팔코아는 뺨을 가볍게 때렸다.
딱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지스는 경련을 일으켰다.
친구들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저 미친 자식. 이러다가 진짜 사람 잡겠네.’
팔코아는 지스를 쓰러뜨렸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입에 넣은 루프의 약효가 떨어지는 게 느껴져서랄까?
“자존심 때문에 5골드를 내팽개쳤다고? 잘났군. 정말 잘났어, 지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스 또한 밖에서는 알아주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귀족에게 대들다가 얻어터졌을까.
하지만 팔코아는 그런 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몸에 늘 피 냄새가 배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5골드를 잃었단 말이야. 줬던 걸 도로 가져가는 게 제일 나쁜 거지. 손해배상을 해야 될 거야.”
팔코아가 지스의 허리를 밟았다.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척추가 끊어져 버릴 터였다.
“끄으으으!”
“아프냐? 이건 좀 아플 거야. 나 힘 엄청 세거든.”
“살, 살려 주십시오!”
“내가 안 아프게 해 줄까? 이걸 씹어 봐. 그럼 하나도 안 아플 테니까.”
지스의 시야에 나무뿌리가 들어왔다.
‘루프.’
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알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각성제인 루프는 본래 접신을 하기 위해 쓰였던 만큼 중독성이 여타의 마약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케르고 문명도 루프의 과다 사용으로 멸망했다는 설이 있지 않은가?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것만은…….”
지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일단 루프에 중독되면 인생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시궁창 인생을 전전할 것이고,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도 결국에는 길바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코아는 지스에게 건넨 루프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중독성이 어쨌다는 것인가? 루프 없이 못 산다면 평생 달고 살면 그만인 것을.
섬. 갈리앙트(6)
“천하의 겁쟁이로구먼. 이건 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아무튼 어떡할 거야? 데려올래?”
“네? 누구를요?”
“그 빨간 머리 계집애 말이야. 받을 건 받아야 하지 않겠어? 제대로 복수해 줄 테니까.”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족에게 복수를 하겠다니. 루프에 절인 뇌가 아니고서야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팔코아는 프리먼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다. 프리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내린 강령 중에는 민간인과 충돌하는 것을 엄금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형님 조직에서 민간인을 건들면…… 아욱!”
징이 박힌 구두가 지스의 턱을 돌렸다.
“너 따위가 감히 조직을 운운해? 그래서 뭐야? 내가 프리먼보다 못하다는 거야?”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똑똑히 들어. 조직을 먹여 살리는 건 나야. 대장이 아니라 나라고. 우리가 거느리는 입이 몇 개인 줄이나 알아? 너 같은 양아치가 내 고충을 아냐고.”
“죄송합니다! 큭!”
지스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린 팔코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니면 뭐야? 네 여동생 데려올래?”
지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형, 형님.”
지스에게 여동생은 유일한 혈육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그녀는 오빠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왜? 네 식구는 못 팔겠냐? 이제야 내 고충이 이해가 좀 돼? 그러니까 데려오라고, 빨간 머리 계집애. 안 그러면 너부터 인생 조지는 줄 알아.”
루프를 씹는 팔코아의 입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
시로네와 여자는 30분 동안 골목을 달린 끝에 경호원들을 따돌렸다.
단련한 자들답게 집요했으나 심리전으로 뺑뺑이를 돌린 게 주효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얼마나 달렸는지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여자가 시로네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의외로 체력이 좋네? 곱상하게 생겨서 뛰다 포기할 줄 알았더니.”
“포기하면 잡히잖아요. 힘들어 죽겠어요. 그런데 저기…… 정말 괜찮아요?”
가모스 앞에서 벌벌 떨던 것과 달리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게 의외였다.
“난 마르샤야. 도망치는 일은 이골이 나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어디 들어가서 쉬자. 목이 말라서 맥주라도 마셔야겠어. 답례로 한잔 살게.”
“네? 맥주요?”
따돌렸다고 해도 지역 유지가 쫓고 있으니 한가할 틈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 돈이 있다는 얘긴데, 애초에 물건은 왜 훔친 것일까?
“아, 저는 그만 가 봐야 할 거 같은데요.”
“어차피 지금은 못 움직여. 내가 아는 가게에서 기다리자. 1시간만 버티면 놈들도 포기할 거야. 가모스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섬 전체를 뒤지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친구들이…….”
“사실 내가 무서워서 그래. 잠시만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 정말로 맥주 살게.”
마르샤가 눈을 찡긋했다.
애교에 넘어간 건 아니지만 시로네의 입장에도 추격자를 달고 숙소로 돌아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듯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그래. 가모스의 부하들이 포기할 때까지만 기다리자. 따라와. 별로 안 머니까.”
마르샤는 골목을 돌고 돌아 으슥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누가 이런 곳까지 찾아와 술을 마실까 싶었지만 의외로 안쪽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네.”
“자주 다니던 곳 아니었어요? 아까 아는 술집이라고…….”
“아, 예전에는 자주 왔었지. 갈리앙트섬은 3년 만이야. 이곳에 친구가 있거든.”
“그랬군요. 길을 너무 잘 알아서 현지인이라고 생각했어요.”
“호호! 한번 본 길은 절대 잊지 않지. 도망치는 건 내 인생의 일부거든.”
마르샤와 시로네가 바에 앉자 가게의 험상궂게 생긴 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성인 여성과 소년의 조화가 이질적인 탓이리라.
“사람들이 쳐다보네요.”
“신경 쓰지 마. 여기는 섬의 문제아만 오는 술집이거든.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이곳으로 정보가 접수되지. 가모스가 언제 포기하는지도 알 수 있을 거야.”
마르샤는 술을 주문했다.
“그럼 오히려 위험한 거 아닌가요? 가모스의 부하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잖아요.”
“가모스는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지 사고뭉치는 아니야. 그러니까 이곳은…… 정치적 레지스탕스 같은 곳이거든. 발을 들여 봤자 좋을 게 없어.”
납득이 되면서도 의문은 남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정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시스템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가능한 경우라면 불가침에 대한 협약이나 규율. 하지만 어째서? 유력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시로네의 눈빛을 본 마르샤가 웃음을 지었다.
“어휴, 너 정말 대단하구나. 그래, 맞아. 여기 술집은 갈리앙트 자치 정부와 결탁하고 있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설령 치안대장이라도 눈감아 주게 되어 있다고. 그래서 가모스도 접근하지 못하는 거고.”
“정부가 왜 그런 짓을 하죠?”
마르샤는 손가락을 비볐다.
“당연히 돈이지. 자금 세탁, 비자금 조성, 로비 자금 유통 등. 아일랜드 게이트라고 부르는 거야. 오래전에 협의가 있었어. 음지에서 자금을 세탁해 주는 대가로 범죄자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거지. 폐쇄적인 섬의 특성이라고 할까? 뭐,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겠어? 히히!”
마르샤는 칵테일에 나온 나뭇가지를 이빨 사이에 물고 까닥거렸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 뭐야? 범죄자를 처단하자고 말은 많지만, 실상 그들의 배를 불려 주는 건 범죄자거든. 삼킬 수 없는 큰돈을 잘게 부수어서 소화시키기 쉽게 해 주는 거지. 사회의 미생물 같은 존재랄까? 미생물이 없으면 생물은 죽어.”
아직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은 시로네로서는 판단하기 애매한 문제였다.
“너무 심각한 얘기만 했네. 시로네라고 했지? 섬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친구들이랑 놀러 왔어요. 해수욕도 하고, 유적지도 구경하고 싶어서요.”
“케르고 유적지? 예전에 가 본 적이 있지. 아아, 그때는 어렸는데, 벌써 스물일곱 살이야. 이러다가 노처녀로 늙어 죽을지도 몰라. 너는 몇 살이야?”
“열여덟 살요.”
“어머, 생각보다 많네? 너 동안이구나.”
“누나도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데요. 아,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 다 누나에서 시작하는 거지. 나중에 애인이 되면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깔깔대며 웃는 마르샤의 모습에서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꽤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시로네는 항구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아, 길바닥 호객꾼에게 걸렸구나. 악질이긴 하지. 그래도 5골드는 좀 심했다.”
“네. 결국에는 친구랑 의견 충돌이 나서 기분이 좋지 않아요. 지금도 요리 재료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돌아가면 혼나겠네요.”
마르샤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가모스는?”
“…….”
바텐더가 못 들은 사람처럼 컵만 닦고 있자 마르샤는 은화를 놓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텐더의 입이 열렸다.
“10분 전에 들어온 소식으로는 대로변을 중심으로 쫙 퍼졌다고 하더군. 아마 40명 정도가 길목을 전부 틀어막고 있을 거야. 조금 더 기다려.”
“으, 아직도? 그 인간 참 끈질기네.”
“원래 가모스 경보는 금방 꺼지는 편이야. 오늘따라 뚜껑이 열렸나 보지.”
마르샤가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었다. 가모스의 머리 뚜껑을 날린 장본인이 옆에 있었다.
시로네는 억울했다.
“모르겠어요,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당연히 할 말을 했을 뿐인데요.”
“가모스처럼 권력이 있는 자들은 훈계당하는 걸 싫어해. 네가 훈계를 했다는 게 아니라, 옳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가르치려는 듯 보이게 되지. 사실 나도 꽤 놀랐어. 네가 나를 그 정도로 도와줄 줄은 몰랐거든.”
“어떻게 모르는 체해요? 가모스가 얼마나 위세가 높은지 분위기만 보고도 아는데. 아마 그대로 누나를 보냈다면 잠도 안 왔을 거예요.”
‘선이라.’
마르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튼 돌아와서, 길바닥 호객꾼은 적당히 상대하고 피하는 게 좋아. 나름 조직에서 관리를 받는 애들이거든. 일단 얽히면 뒷감당이 힘들어져.”
“아,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요.”
“후후, 알 필요가 있나? 어차피 즐기려고 오는 거잖아? 다만 너희들의 즐거움 밖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섬은 좁고 폐쇄적이야. 제한된 재화를 나누려면 내륙보다 치열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마. 그냥 즐기면 되는 거야.”
앞으로 10일 동안 섬에 체류해야 하는 시로네로서는 새겨들을 얘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로네는 문득 마르샤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