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47
“난…….”
뜨거운 감정에 입을 여는 순간 섬뜩한 현실이 페르미의 뇌리를 관통했다.
‘안 돼.’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갈 시간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엘이 옷매무새를 만졌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니까, 이따가 만나. 반드시 털어놓게 만들 테니까.”
‘그래. 넌 그런 여자지.’
자신의 감정만큼 남의 감정을 존중하는 사람.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 동물이 아닐 거라고, 페르미는 생각했다.
“세리엘.”
그녀가 돌아서자 페르미가 말했다.
“졸업 시험에서 에이미를 떨어뜨린 건, 네가 견제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어.”
“흥.”
페르미를 향해 중지를 세운 세리엘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다시 홀로 남은 공간에서, 페르미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
가장 넓은 시야를 가졌던 욜가.
‘어떻게 버티셨나요.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을 보면서, 어떻게 참으셨나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시작하자.”
벌떡 일어선 페르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욜가의 아들이니까.”
율법 요동 (4)
***
황도12궁이 머무는 밀실로 옮겨진 키트라의 관이 덜컹하고 열렸다.
“전하.”
키트라가 상체를 일으켰다.
“음.”
심장이 뛰지 않는 이유는 이미 사물의 율법을 가진 오파츠이기 때문이다.
“때가 도래했다.”
끝없이 밀려드는 시간파가 세계 각지에 세워진 피라미드의 율법을 바꿨다.
거대 조정.
피라미드 내부에 새겨진 개념을 바꾸는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린 이유는.
‘사티엘과 레이엘.’
2명의 대천사가 태양의 코어에서 기존의 율법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8명의 대천사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힘은 전체의 8분의 2. 즉, 4분의 1.’
무시할 수준은 아니지만 거대 조정의 우주적 변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가 되었다.”
키트라의 눈에 불이 켜지자 거대 조정 장치가 회전하면서 외피에 균열이 생겼다.
그 사이로 빛이 뿜어지더니 시커먼 구체가 외피를 집어삼키며 탄생했다.
“으, 으아아아!”
밀실에 있는 모든 기물이 빨려들었고 황도12궁의 일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르릉, 우르릉.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중력파를 들으며, 키트라는 검은 구체를 응시했다.
‘저 안에 무無가 있다.’
역설적으로,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담겨 있다.
“신이여, 오소서.”
제단에서 일어난 키트라가 두 팔을 벌렸다.
“최종 조정.”
세계 각지에 세워진 피라미드의 내부에 새겨진 글귀가 푸른 빛을 뿜었다.
파도처럼 질주하던 빛의 흐름이 점차 빨라지자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피라미드 주위에 직경 80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전자기장이 형성된 것이다.
“응? 뭐야?”
평범한 가정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남편이 미약한 전류를 느꼈다.
“갑자기 닭살이…….”
그 순간, 그는 집 안의 풍경이 다른 풍경과 중첩되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대저택, 허름한 단칸방, 영업하는 술집, 심지어 무덤 속에 파묻힌 관까지.
‘이게 무슨 조화야?’
멍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그는 자신과 풍경의 상관관계를 직감했다.
‘내 마음에 따라…….’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여보, 뭐 하고 있어?”
대저택의 풍경에서 걸어오는 여자는 현실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가 살았던 현실이 오히려 허상이 아니었나 싶었다.
“너, 너는…….”
남편은 여자를 기억해 냈다.
열두 살 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동창으로, 그가 살면서 처음으로 해 본 짝사랑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야한 생각했어? 깔깔!”
배꼽을 잡고 웃는 모습도 어린 시절 그대로였으나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시공간을 초월해 율법이 뒤틀리면서 인과의 논리가 재구성되었다.
‘아, 맞다.’
10년 뒤 동창회에서 만났을 때 고백을 했고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맞아, 맞아. 내가 그렇게 했잖아.’
마치 정말 과거로 회귀해서 살아온 것처럼 모든 기억이 뇌리에 스며들었다.
‘대체 뭐가 진짜야?’
하지만 현실의 아내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확률처럼.’
수학에는 문외한이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정의하는 말이었다.
‘현실의 아내가 60퍼센트, 지금의 아내가 40퍼센트 정도의 현실감으로…….’
중첩되어 있다.
“여보, 우리 쇼핑하자. 전에 자기가 사고 싶다고 했던 옷 있잖아. 내가 사 줄게.”
현실의 아내가 더욱 옅어지자 남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지금의 아내가 더 좋다고.’
아니, 그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또다시 풍경이 중첩되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여자는…….’
스물여섯 살에 만났던 직장 동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왜? 왜 없지?’
수많은 풍경이 중첩되고 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사건은 인지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싫었나?’
그가 원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는 것이었다.
‘정말 좋아했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고 잘사는 직장 동료와 결혼을 했었다.
‘나에게 권력과 돈이 있었더라면.’
동시에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는 자신이 느껴졌다.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오감을 통해 확률적으로 전개되는 사건 속에 그녀가 차갑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미팅 시간입니다.”
남자는 실망했다.
‘고작 비서인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어떤 수를 써서도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괜찮을 거야. 그래, 어차피 또 바꿀 수 있잖아?’
남자는 사장의 권위를 이용해 그녀에게 키스했고, 잠시 후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수치심을 느낀 여자가 테이블의 금속 트로피로 남자를 후려친 것이다.
“꺄악!”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건들이 사라지고 오직 어둠이었다.
‘죽는 거야.’
그가 간과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오직 자신에게만 일어났으리라는 착각이었다.
“살, 살려 줘, 여보.”
이제 1퍼센트만 남은 아내를 부르자 그녀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흑. 흐윽.”
그가 사망할 확률이 99퍼센트를 넘자 머릿속에서 자식들의 기억이 사라졌다.
‘안 돼. 갑자기 왜……?’
애써 본래의 가정을 떠올려 보지만 이미 그들은 각자의 욕망을 찾아 떠난 뒤였다.
‘살자. 죽는 것만은 안 돼.’
그러자 어둠이 걷히면서 몇 개의 선택지가 다시 그의 인지에 파고들었다.
물론 여태까지 그가 경험했던 아름다운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사람 살려!”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빈민굴의 허름한 집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허억! 허억!”
모두가 각자의 욕망대로 삶을 선택했기에, 그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살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여전히 풍경은 오색찬란한 아지랑이로 뒤덮여 있었다.
‘크크. 크크크.’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불과 몇 번의 중첩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괜찮아. 또 바꿀 수 있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거지 같은 현실도 천국이 될 거라고.”
율법이 요동치고 있었다.
***
위저드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하비츠가 입을 열었다.
“무승부.”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작이 괜찮군. 이번에는 네가 먼저 제안할 차례인가? 한번 들어 보지.”
위저드는 목적에 충실했다.
‘먹혀들었어.’
제타로가 제안한 게임의 관건은 하비츠가 얼마나 즐거워하느냐에 달렸다.
‘입맞춤이 효과가 있다면…….’
결코 진실을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사탄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저는…….”
위저드가 말했다.
“오늘 하루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
“그리고 저는 오늘 하루 당신을 증오하겠습니다. 하루의 기준은 자정까지. 이게 제 명제예요.”
둘 중의 하나는 사실이어야 한다.
“게임의 룰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행위나 증거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죠. 만약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다시 입맞춤을 합니다.”
“증오하면?”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리겠습니다.”
손가락 정도야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하비츠는 깨달았다.
‘죽을 수도 있겠군.’
게임이라는 전제하에서 위저드는 하비츠의 배니싱을 인지할 수 있다.
반대로 하비츠는 위저드의 초공, 즉 사라진 1프레임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최소 2프레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
각성한 위저드를 상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둘 중의 하나는 증명이 되겠지. 입을 맞추거나,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아직도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위저드의 따듯한 촉감이 남아 있었다.
“승인하지.”
위저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시, 당신은…….’
이 게임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르고 있어.
“그럼 내 차례로군. 나는 시로네를 죽인다. 또한 우오린을 죽인다. 네가 제시한 자정까지.”
암살 게임을 병행해야 하기에 시간의 텀을 길게 잡았으나, 그런 만큼 초강수였다.
위저드는 생각했다.
‘내 마음을 들킨 것은 어제 일전에서 딱 한 번뿐. 정보의 유출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하비츠가 시로네를 노리면 위저드는 하비츠를 증오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상식적인 판단의 기준을 잡기 위한 명제. 내 진실을 알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거지.’
하비츠, 사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