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6
얼굴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도 지스를 통해 돈을 수금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처가 난 호객꾼에게 짐을 맡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선하는 것(2)
“흐음.”
에이미의 의미심장한 눈빛 앞에서 지스는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다.
“좋아.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가다려.”
지스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쉽게 승낙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반면 테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로네 때문에 속이 상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쩌려고? 저 자식을 믿을 수 있겠어?”
“믿거나 말거나, 저 녀석이 뭘 어쩌겠어?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 금방 돌아올게.”
마법학교 졸업반에 스키마까지 구사하는 그녀라면 우려할 일은 없을 테지만, 이러다가 시로네와 사이가 틀어질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
“됐어. 시로네는 알아서 하라고 그래. 리안도 배고플 텐데 언제까지 시간만 죽일 거야? 차라리 잘됐어. 나는 밖에서 먹고 올 테니까 리안하고 오붓하게 보네.”
방으로 들어간 에이미는 10분 뒤에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현관으로 나왔다.
“지스라고 했지? 가자.”
“응? 어, 그래.”
블랙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가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지스는 넋이 나가 있었다.
테스가 일렀다.
“그럼 잠깐 바람만 좀 쐬다가 들어와. 너무 늦으면 우리가 찾으러 갈 테니까.”
지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하! 알았다니까. 아, 그리고 리안, 시로네 돌아오면 아무것도 주지 마. 아예 쫄쫄 굶겨 버려.”
리안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들자 에이미는 지스를 따라 숙소를 나섰다.
썰렁한 분위기에 테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걱정되면 내가 따라가고.”
테스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됐어. 에이미도 여자야. 우리 보기 민망해서 나간 것 같은데 나중에 알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 그냥 여기서 시로네나 기다리자.”
창가로 걸어간 리안은 에이미를 태운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한 밤이었다.
***
에이미의 맞은편에 앉은 지스는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마차에 태웠으니 8할은 성공한 셈이었다.
“여기는 갈리앙트에서도 자연 녹지 공원이야. 아쉽네. 낮에 왔으면 여기 풍경이…….”
지스는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괜히 토박이가 아닌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까지 줄줄이 읊어 대고 있었다.
공원 매점 사장이 과부랑 바람이 나든 말든 알 게 뭐란 말인가?
에이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지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 그리고 여긴…….”
언제부턴가 그 사실을 깨달은 지스도 말을 멈추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에이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조금은 차가운 표정은, 낮에 화를 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팔코아라고 해도 귀족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약에 취한 눈빛을 보면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돌려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럴 경우 자신의 여동생은…….
에이미가 물었다.
“오래 걸리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공교롭게도 가장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지스는 화들짝 놀라며 말을 지어냈다.
“어, 그러니까…… 좀 멀어. 갈리앙트에서 최고로 좋은 곳이라서. 진짜야. 가 보면 알아.”
“그래? 최고로 좋은 곳이라……. 널 두들겨 팬 보스가 거기로 데리고 오래?”
지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도대체 마차에는 왜 탔으며, 여태까지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그게 말이지…….”
“지어낼 필요 없어. 눈만 봐도 아니까. 겁에 질려 사정을 하는데 모르는 게 바보지.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려. 속아 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니까.”
“속아 준다고?”
“그래. 왜 희생양이 됐는지 모르지만 이걸로 너도 이 바닥에서 나와.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야.”
지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 내가 불쌍해?”
“그럼 불쌍하지, 부럽겠니?”
“이게 진짜……!”
“너, 금화를 집어 던졌지?”
지스는 움찔했다.
분명 당시에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팔코아에게 죽도록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미가 씁쓸하게 웃었다.
“너 같은 애들은 이 바닥에서 오래 못 버텨. 지키고 싶은 게 많은 인간은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지.”
“쳇,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너야말로 부모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는 귀족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보다는 많이 알걸. 적어도 난 끝까지 올라가 봤거든.”
지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도 그녀와 같은 무게감을 갖는 건 불가능했다.
“동정하는 거야?”
“그래.”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아, 절대로.”
“그러니까 이 바닥 뜨라고. 이게 네 인생에 있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지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이미의 말이 옳았다. 만약 그녀의 동정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동생은 지금쯤 지옥을 경험하고 있을 테니까.
“쳇.”
지스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에이미는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동정만은 아니야.”
“뭐?”
“금화를 바닥에 던진 거 말이야. 무슨 일을 하든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만약 네가 그냥 뒷골목 양아치였다면, 난 절대로 이 마차에 타지 않았을 거야.”
지스는 시선을 피했다.
“제길.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이래서 귀족은 마음에 안 들어. 아까도 그랬지. 누구는 조롱하고 누구는 말리고. 순 제멋대로라니까?”
턱을 받친 에이미가 씩 웃었다.
“아, 시로네? 하지만 그 아이도 평민인데? 그래서 네 심정을 더 잘 이해했을 거야.”
지스의 눈이 커졌다.
“뭐? 평민?”
처음에는 농담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콧대 높은 귀족 여성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랑 여행을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 평민. 그게 뭐가 중요해? 아니, 중요하려나?”
“하지만…… 네 파트너 아니었어? 커플 여행이잖아. 내 눈은 못 속인다고.”
에이미는 허탈하게 웃었다.
“맞아, 파트너야. 나를 바다 건너 섬에 놔두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내 파트너.”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지스는 그녀의 눈에 담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읽어냈다.
‘미치겠네, 진짜.’
그냥 금화를 받고 떠났어야 했다. 그랬으면 지금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생판 모르는 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다고? 위험한 게 뭔지 알기는 하는 거야?’
지스가 어릴 때만 해도 섬의 상권은 여러 조직이 분할 관리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이 잦기는 해도 힘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5년 전 프리먼 조직이 갈리앙트섬에 들어온 이후로 상황이 급변했다.
엄청난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더니 고작 한 달 만에 모든 조직을 지워 버린 것이다.
‘우리 같은 양아치가 아니야.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몰라도 전문 훈련을 받은 전투 집단이라고.’
지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가 에이미가 떠나 버리면 자신과 여동생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아무것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마차는 빠른 속도로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
마르샤와 헤어진 시로네는 장을 다시 볼 생각도 없이 마차를 잡고 숙소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떨어졌으니 리안과 테스의 요리가 끝나도 진즉 끝났을 시간이었다.
또한 에이미가 기다리고 있다면 장바구니를 잃어버린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구나.’
숙소의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시로네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 왔어. 문 좀 열어…… 으악!”
곧바로 문이 열리자 시로네는 쓰러질 듯 숙소로 들어갔다. 너무 빠른 반응이었다.
“시로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온 거야? 에이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미안, 정말 미안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음식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차라리 셋이 먼저 먹었으면 했던 시로네는 더 미안해졌다.
“많이 기다렸지? 에이미는?”
“그게…….”
테스는 막상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다리다 지쳐서 놀러 갔다고 할까? 아니면 시로네에게 실망해서 지스를 따라갔다고 할까?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그러니까…… 아, 이거 난감하네.”
테스가 선뜻 말을 못 꺼내는 이유는 둘 사이에 괜한 오해를 일으키기 싫어서였다.
반면 리안은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항구에서 만났던 지스라는 놈하고 같이 나갔어.”
“응? 지스?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웠던 그 사람 말이지? 에이미가 왜 그 사람을 따라가?”
“모르지. 너를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놈이 찾아왔어. 낮의 일로 보답을 하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마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갔어.”
시로네는 턱을 괴었다.
“흠, 에이미가 순순히 따라갔다는 말이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테스가 끼어들었다.
“이유가 없기는! 이게 다 네가 늦게 와서 그런 거잖아. 에이미 혼자서 얼마나 외로워했는데.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로네는 대답을 미뤘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닌 듯했다.
“가 보자. 어딘지 알아?”
“우리야 모르지.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이럴 거면 처음부터 잘해 주든가.”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무슨 소리야? 에이미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데?”
“에이미는 다혈질이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아. 설령 나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도 나를 걱정시킬 일은 하지 않는단 말이야. 차라리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죽도록 팼으면 팼지.”
“어?”
테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여기에서 에이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시로네이니 아마도 맞을 테지만, 이제는 테스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 확실히 좀…….’
화를 잘 내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까칠한 듯 보이지만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던가?
“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호객꾼이 데려와 봤자 동네 깡패들이지. 에이미는 학교에서도 발군이라며?”
시로네도 에이미의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마르샤에게 섬의 특수성을 이제 막 듣고 온 참이기에 마음 한구석이 괜히 껄끄러웠다.
“지스 같은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랬어. 별일 아니라고 해도 섬은 폐쇄적이고 위험한 곳이야. 육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리안은 이미 검을 찬 상태였다.
“설명할 필요 없어. 에이미를 만나면 알게 되겠지. 방해하는 놈은 내가 처리할게.”
“미안. 사실 내가 늦어서 그런 건데.”
“그것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이따 듣기로 하고, 에이미부터 찾아보자고.”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무장을 끝낸 리안의 모습에서 테스는 깨달았다.
친구이기도 하지만, 기사 서약으로 맺어졌기에 가능한 광경이었다.
“잠깐 기다려. 나도 같이 갈 거야. 너희만 에이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우선하는 것(3)
세 사람은 의욕적으로 숙소를 나왔다.
그러나 막상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백사장 너머 파도 소리가 좌절감을 더했다.
“어디서 찾지? 이 시간에 지스라는 놈이 데려갈 만한 데는 상업 지구밖에 없을 텐데. 차라리 그쪽에서 흩어질까?”
“그건 안 좋은 방법 같아. 어차피 셋이서 상업 지구 전체를 돌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곳 지리도 잘 모르잖아.”
“그럼 어떡해? 찾을 방법이 없잖아? 차라리 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고 말지.”
시로네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항구로 가자. 분명 조직이 있다고 그랬으니 조직원에게 물어보면 에이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항구? 거긴 남쪽인데. 차라리 그 시간에 상업 지구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아? 어차피 에이미도 항구에는 없을 거야. 관광지도 아니니까.”
“아니, 항구로 가는 게 맞아. 에이미의 상황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야. 첫째, 에이미는 무사하다. 둘째, 에이미는 무사하지 않다. 만약 무사하다면 우리가 항구로 간다고 해도 손해는 없어. 하지만 무사하지 않다면 우리는 반드시 항구로 가야 해. 에이미가 무사하지 않다는 건 지스의 조직과 충돌할 경우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어떤 상황을 가정해도 우리는 일단 항구로 가서 조직원과 접선을 해야 해.”
“그, 그렇구나.”
시로네의 말이 워낙에 빨랐으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테스였다.
리안은 따지지 않았다. 시로네가 항구로 가자고 한 순간 이미 마차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마부에게 돈을 지불한 리안이 타라는 손짓을 하자 시로네와 테스가 달려갔다.
질주하는 마차에 몸을 던져 객실로 들어가자 마부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젊음이 좋구먼. 이 시간에 항구라니.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지?”
“네. 빨리 좀 가 주세요!”
“좋아! 그럼 오랜만에 우리 아이들도 힘 좀 써 볼까? 끼랴! 끼랴!”
밤이라 차로는 한산했고, 금화를 자원 삼아 마차는 20분 만에 항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