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71
기관실의 문을 열자 거대한 절벽 사이에 육뇌가 떠 있었다.
“하아! 하아!”
가슴에서 빠져나온 사슬이 육뇌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속사검을 쏟아 내며 절벽을 도약했다.
“나와!”
단도를 찌르자, 눈두덩이 부풀어 오른 태아가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나오란 말이야!”
마치 쓰레기를 던지듯 단도에 박힌 태아를 절벽 밑으로 패대기친 샤갈은 두 팔을 휘둘렀다.
육뇌가 갈기갈기 해체되는 와중에도 심장은 초조하게 뛰고 있었다.
‘어디야? 어디냐고!’
내벽에 박힌 단도가 별다른 저항 없이 반대편 벽을 뚫고 나왔다.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샤갈은 자신이 들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없어.’
눈에 보이는 육뇌는 하드웨어일 뿐, 에텔라는 이미 이면 세계의 전체 시스템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왜 없어!”
미친 듯이 육뇌를 난도질하던 샤갈이 순간 움찔하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으아아아!”
태극의 사슬을 통해 끔찍한 절망에 빠진 에텔라의 감정이 전해졌다.
-남은 정화 시간 87해 2,875경 3,241조 1,203억 1만 9시간입니다.
듣기 싫은 메시지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들렸다.
‘왜,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거야. 말을 하면 되잖아! 이렇게 할 거라고,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 협박을 하면 됐잖아! 왜 굳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나온 시간, 에텔라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를.
“아! 아! 아! 아!”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샤갈이 단도를 들고 허벅지를 찔렀다.
‘나라는 존재를 부숴 버리고 싶다.’
아니, 기계에 갈아 버리고 싶다.
“죽어! 죽어!”
카르마가 정화되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는 숙명 속에서, 샤갈은 온몸에 칼을 박았다.
“죽으란 말이야!”
속사검의 껍질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도, 자아는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흐으으으.”
몸을 난도질해서 고통을 주면 예전처럼 에텔라가 나를 말려 주지 않을까 하고.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태극의 업에 따라 샤갈의 고통 또한 사슬을 타고 에텔라의 마음을 직격했다.
“엄마. 엄마.”
젖을 빨지 못해, 아귀처럼 몸을 뜯어 먹는 태아들은 이제 터널을 가득 메울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가자.”
에텔라는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너희들을 구해 줄게.”
샤갈이 소리쳤다.
“다 집어치워!”
몸에서 칼날을 뽑아낸 샤갈이 육뇌의 구멍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복수하겠다는 거지?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아? 아니, 추격해 주마! 내가…… 반드시 너를 찾아서……!”
다시 지옥에 끌어다 앉힐 거야.
‘평생 내 곁에 있게 만들 거야!’
숨을 크게 들이마신 샤갈은 사건의 향수를 발동했다.
‘냄새가 나지 않아.’
에텔라가 프로세스가 되었다면 이면 세계에서 사라졌거나 모든 공간에 있다는 뜻이었다.
‘찾을 수 있어.’
샤갈의 후각이 끝을 모르고 예민해지고, 마침내 프로세스의 특정 위치를 감지했다.
동시에 태극의 사슬이 뻣뻣하게 일어서더니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뻗어 나갔다.
“간다.”
피를 철철 흘리는 상태에서도 몸을 날린 샤갈은 사슬을 따라 벽을 뚫었다.
‘죽여 버릴 거야. 만나자마자 뺨부터 때려 주지. 천천히 괴롭힐 거야. 비명을 지를 때까지!’
에텔라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나.
-남은 정화 시간…….
그의 고통은 여전히 카르마로 환산되고 있었다.
***
종족 전투에 참전한 12사도는 유리엘을 사방에서 몰아붙였다.
금룡 메티라가 유리엘의 극락곤을 막아 내자 독룡 포이네가 몸을 회전하며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녀의 뒤차기에 거구의 대천사가 나무를 부러뜨리며 날아갔다.
바위를 깨고 밀려난 유리엘이 우직하게 중심을 잡자 포이네가 눈웃음을 지었다.
“시대가 변하기는 했나 보오. 대천사도 이제 유행이 지난 게지.”
물론 사실과 다르기에, 단순한 도발이었다.
뇌룡 블리츠가 전장을 살폈다.
‘우리가 왔는데도 엘프와 요정의 전투는 박빙이다. 유리엘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고 봐야 해.’
각기 다른 속성의 정점에 도달한 12사도지만 드래곤의 진정한 힘은 본체로 변했을 때 나오는 법.
‘브레스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크다.’
12사도 전원이 본체가 되어 싸우면 제아무리 넓은 수해라도 초토화가 되어 버릴 터.
블리츠는 메시아에게 받은 지령을 떠올렸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멸종 직전의 엘프와 화족을 지키는 것.’
그들이 멸종하면 아포칼립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변수는 완전히 사라진다.
‘지금도 상당한 숫자의 엘프를 잃었어. 더 이상은 안 돼. 여기에서 지켜야 한다.’
12사도의 눈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한편, 그린 오션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페어리의 임시 막사가 있었다.
“크라운 님.”
페어리의 간부가 2명의 엘프를 포박한 채 실험실로 끌고 들어갔다.
“놔! 우릴 어쩔 생각이야!”
남녀 한 쌍의 엘프가 들어오자 크라운이 몸을 돌렸다.
“호오?”
“차라리 죽여라! 고문한다고 내가 굽힐……!”
호기롭게 소리치던 엘프는 방 안의 풍경을 본 순간 비명을 질렀다.
크라운이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쉬. 애들이 놀라지 않나.”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린 오션에 서식하는 생물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하나같이 머리가 열린 채로 뇌를 드러내고 있었다.
“응? 무슨 짓이라니? 그냥 좀…… 살펴본 거야.”
크라운이 테이블 위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있지 말고 와서 앉아. 앞으로 우리는 생명의 미래라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까.”
2명의 엘프가 요정의 능력에 이끌려 테이블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생명의 미래라고? 이건 살생이야. 생명을 죽이는 짓이란 말이야!”
크라운은 차분했다.
“본래 엘프는 페어리였지.”
“…….”
“우리와 같은, 그러니까 나에게 복종하는 수족이었단 말이야. 그러다가 인간과 결합했고 지금의 종족이 되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니, 좀 묘해서. 번식이라는 거,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우리를 다른 동물과 똑같이 생각하지 마. 엘프는 순수한 사랑의 결실로 탄생한 종족이다.”
“알고 있어. 아가페라고 한다지? 처녀 수태,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동반하지 않는 생명 창조는 본래 대천사이신 카리엘 님만의 특권이었지. 생각을 해 봤어. 대체 뭘까?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적 끝에 말이 이어졌다.
“모르겠더라고.”
크라운의 눈웃음을 본 엘프들은 불안해졌다.
“내 생각인데, 생물 이전에 생이라는 개념 말이야.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관성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후세를 만들고 자신은 소멸하는, 그런 비극적인 메커니즘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
그는 특별한 관성의 핵심이 아가페라고 보았다.
“우리를 풀어 줘.”
엘프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죽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크라운이 테이블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 메커니즘을 부정한다.”
그리고 벽에 걸린 곰에게 다가가 큼지막한 뇌에 작은 손을 집어넣었다.
곰이 눈을 뒤집고 경련했다.
“이 짐승에게 내 뇌를 이식하면, 나는 곰이라는 생물이 되는 거지. 수많은 곰으로 번식할 것이다. 그러다 노화되면 또 다른 생물로 갈아타면 돼. 호랑이든, 독수리든, 인간이든…….”
크라운이 광기의 미소를 지었다.
“엘프든.”
“아아아아! 아아아아!”
묶인 상태에서 두 엘프는 오열했다.
“에녹스. 내가 엘프의 수장의 몸에 탑승하면, 아가페 따위는 필요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전에 꽤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서 말이야.”
크라운이 엘프들에게로 돌아섰다.
“너희들은 내 실험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포칼립스의 미래를 지배했던 페어리 바이오미메틱스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마음과 오류 (1)
멜키두의 코르코라스에서 요한 카르텔을 장악한 시로네는 수장 아리아의 안내를 받아 어둠의 조직과 접선했다.
모든 칸이 분리되어 있는 곳에 갑자기 선박이 등장했을 때는 일행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다.’
매수 프로그램이 코어로 가는 정석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물론 이 선박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데스페라도, 레드 유니온의 갱들이 그들을 습격했으나 시로네 일행의 무력 앞에서는 어떤 무기도 무소용이었다.
휴전회담에서 각 조직의 수장들은 시로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떠난다고?”
코르코라스를 시로네가 장악할 것이 아닌 이상 원하는 것을 주고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었다.
“좋아, 이번에는 양보하지. 하지만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면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사라지는 거야.”
물론 사라지는 쪽은 갱단이겠지만 그들의 호전성도 요한 카르텔을 통해 증명된 바였다.
“이쪽이야.”
선박에는 현실에서는 구할 수 없는 화기가 즐비했다.
“1억 2천만 포인트.”
선장이 제시하자 아리아는 쉽게 승낙했다.
시로네는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코어로 들어가는 100억 포인트를 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아가 코르코라스를 지키는 이유는 현실에 있는 요한 카르텔을 위해서일 거야. 현실의 범죄자들이 쉽게 이곳으로 숨어들 수 있게 하기 위해.’
굳이 미제 사건을 만들지 않더라도 코르코라스에서 은신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악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다.’
인류를 구하는 사명을 지닌 시로네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옮겨.”
아리아의 지시에 갱단이 무기를 옮기기 시작하자 선장이 시로네 일행을 가리켰다.
“저 피라미는 뭐야? 못 보던 얼굴인데.”
아리아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매수 프로그램을 알고 있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호오?”
내부 트랙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해도 어둠의 조직과 접선하기 위해서는 3대 갱단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대단하군. 포인트는 충분하겠지?”
어차피 선장도 관리자. 포인트와 주사위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흔들지 못할 터였다.
“네. 친구가 수도 파르메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에요. 그쪽을 만나면 수가 생길 거라고 하던데요.”
선장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연이야 대 줄 수 있지. 하지만 파르메라니 좀 그렇군. 거기 경비대장은 보통내기가 아니야.”
시로네가 말이 없자 선장이 화물칸을 가리켰다.
“정상적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빈 상자가 많으니까 거기에 숨어 있어. 밀항 비용은 1천만 포인트.”
‘1천만?’
왕도 입성 아이템보다 훨씬 비쌌다.
만약 다른 사용자라면 ‘설득’을 할 필요가 없으니 지불할 의향이 있겠지만 시로네에게는 딱히 메리트가 없었다.
‘커티스 씨는 최소 5천만이라고 했지. 매수 프로그램에 대해 완벽하게 조사한 게 아니니 추가 비용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포인트가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현재 시로네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금액은 최소 요구치의 2배, 1억 포인트 정도였다.
“꽤 비싸네요.”
시로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아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지불할게.”
포인트가 차감되자 선장이 항해실로 올라가며 말했다.
“짐 내리면 바로 출발할 거야. 지금 상자에 들어가 있어. 밀봉해야 되거든.”
화물칸으로 가기 전 시로네는 아리아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흥!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주는 거야. 이것으로 내 할 일은 끝났으니까.”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도 찾아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 정도면 싸게 막은 거지.’
덕분에 1억 2천만짜리 물자를 손쉽게 공급받았으니 1천만 포인트는 줄 수 있었다.
“다음에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