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9
“……응.”
에이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팔코아의 얼굴이 수치심에 달아올랐다.
핏덩이들이 몰려와서 소란을 떨더니 이제는 마음대로 돌아가겠다고?
‘천하의 팔코아가 이 정도까지 떨어졌나?’
대륙의 추적자를 피해 단원 전체가 섬에 숨어든 지도 어언 5년째.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늘 전장을 다녔던 그에게는 모든 게 지루할 뿐이었다.
덕분에 뇌는 약물에 절었고 피밖에 모르던 정신에도 기름이 끼었다.
하지만 5년 전만 해도 대륙을 누비며 수많은 전투를 승리한 팔코아였다.
“어이, 설마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희들은 오늘 죽어.”
에이미가 팔코아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소란을 부리면 당신도 곤란할걸. 지하의 손님들은 전부 약물중독자인 데다 당신의 최고 자금줄일 테니까. 고소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하지만 우리 쪽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 가게는 문을 닫게 될 테고.”
“크크, 고작 그거 믿고 설치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 섬에서 나를 건들 사람은 없어.”
“내륙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에이미의 두 눈이 붉게 타오르자 팔코아는 비로소 심각성을 인지했다.
‘홍안. 카르미스였어?’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카르미스 가문을 팔코아가 모를 리 없었다.
특정 시점의 상태를 저장해 두었다가 언제든지 복구시킬 수 있는 능력.
‘그래서 약효가…….’
대부분의 정신 계열 마법에 면역이고, 심지어 마약으로도 중독시킬 수 없다.
카르미스 가문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였다.
‘처음부터 루프는 통하지 않았다는 건가? 저 계집, 전부 다 알고 따라온 거로군. 이상하게 이 바닥 생리를 잘 알고 있어. 그것도 카르미스라서 그런가?’
게다가 귀족 서열 제1계급이니 가문에서 손을 쓴다면 5년 동안 공을 들인 자신의 왕국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루프를 유통시켜 벌어들이는 자금은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팔코아라도 돈에는 민감한 이유는, 돈이 없으면 루프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팔코아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말했다.
“크크! 건방진 계집애. 이 굴욕은 반드시 갚아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보든지.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학교 신경 안 쓰고 제대로 놀아 볼 생각이거든.”
테이블을 나선 에이미는 친구들과 합류했다.
“걱정시켜서 미안. 이제 가자.”
잠시라도 이곳에 더 있기 싫은 그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지상으로 올라왔다.
길목마다 종업원이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주점을 나서자 공기가 확연하게 달라진 게 느껴졌다.
테스가 밤공기를 빨아들이며 팔을 벌렸다.
“아, 기분 좋다. 에이미 덕분에 관광 제대로 했네. 갈리앙트섬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왕궁을 꼭대기부터 지하까지 전부 돌아봤잖아.”
리안이 동의했다.
“하하하! 그거 듣던 중 맞는 말이네. 게다가 백사장도 갔고, 항구도 들렀다가 상업 지구까지 왔으니 유적지 빼고는 다 가 본 셈인가?”
깜짝 놀란 에이미가 물었다.
“뭐? 너희 항구까지 갔다 왔어?”
“응. 시로네가 조직원을 붙잡는 게 빠르다고 해서. 정신없이 달렸지. 열정 넘치는 마부 아저씨 아니었으면 시간에 못 맞출 뻔했어.”
에이미는 시로네와 눈을 마주쳤다.
지하에서의 일로 살짝 낯이 간지러웠으나, 덕분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응어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시로네가 말했다.
“에이미, 늦어서 미안해. 돌아가면서 얘기해 줄게.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어.”
“흥, 별로 궁금하지 않거든? 내가 왜 그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밥도 굶고 이게 뭐야?”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이미 화는 풀렸지만, 에이미는 차라리 이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이런 핑곗거리도 없이 시로네를 대하면 정말이지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이건 똑바로 해 두자고. 도와주러 온 건 고맙지만 나는 붙잡힌 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으로 따라간 거야. 네가 안 도와줘도 그딴 놈들은 상대도 안 된다고.”
“하하! 당연하지. 우리 중에 유리한 졸업반인 카르미스 에이미를 누가 걱정하겠어?”
“흥, 뭐…… 알면 됐어. 그냥 그렇다는 거야.”
테스는 웃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성격이 답답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신중한 마법사의 조심성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라안이 배를 만지며 말했다.
“배고프다. 가는 길에 야식이나 사 먹을까?”
물론 테스는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온 마음을 담아 리안을 끌어안았다.
“야식? 좋아! 너무 좋아! 야호!”
***
지스는 주점을 치우느라 자정이 넘은 시간에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얻어맞고 긴장하고 노동까지 했더니 철근을 등에 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견딜 수 있는 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안도감 덕분이었다.
에이미는 팔코아의 마수에서 무사히 벗어났고, 자신도 별다른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다. 시킨 일을 제대로 했을 뿐이니 팔코아라도 명분이 없었을 터였다.
‘그 애가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수도 있겠지.’
지금도 에이미의 얼굴이 실물로 본 것처럼 선명했다.
여태까지 그가 만난 사람 중에서 그녀만큼 예쁜 사람은 없었지만,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나를 도와줬을까?’
그녀에게 지스는 그저 섬의 불법 호객꾼 중의 1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좋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진 사이였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주점 왕궁으로 쳐들어왔던 금발의 소년이었다.
‘시로네. 그 애도 평민이라고 그랬지.’
당시에는 겁에 질려 끼어들지도 못했지만 시로네가 했던 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출신 학교를 들먹이면 결국 한 걸음 물러서던 다른 귀족들과는 분명 달랐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은 알 듯했다. 어째서 에이미가 시로네와 파트너가 되어 섬에 오려고 했는지, 고작 호객꾼에 불과한 나를 도와주려고 위험을 무릅썼는지.
“쳇!”
지스는 길가의 돌을 걷어찼다.
“되게 멋있는 척하네.”
가장 속이 쓰린 건 마차에서 에이미가 지었던 슬픈 미소였다.
눈치 100단인 지스가 확신하기로는 시로네는 그 미소의 의미를 절대 모를 것이다.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의 앞이기에 드러냈을 속마음이었다.
“뭐, 잘됐으니 됐지. 이제 다 잊을 거야.”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 안 잤어?”
마루 깊은 곳에 촛불이 켜져 있는 걸 보아하니 여동생이 여태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낭비가 없는 그녀는 꿈을 꾸면서도 촛불은 꼭 끄는 아이니까.
우선하는 것(6)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유나야, 왜 안 잤어? 내일 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럼 오빠가 여태까지 안 들어오는데 잠을 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좀 바빴어.”
지스는 유나의 앞에 앉았다.
혈육이어서가 아니라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배운 건 없어도 현명하고 심성이 착했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유나는 지스의 자부심이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초라한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성공 따위는 바라지도 않지만, 얼마든지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인생을 꾸릴 수 있는 아이였다.
“근데 오빠, 얼굴이 왜 이렇게 수척해? 솔직히 말해.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여.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내일 아침밥 안 해 준다?”
“하하하! 아이구, 무서워라. 그냥 좀 피곤한 일이 많았어. 자존심도 상했고. 이제는 괜찮아.”
“어휴, 그놈의 자존심은 맨날 상해? 이제 썩어서 먹지도 못하겠네. 아무튼 일단 씻어. 오빠한테서 땀 냄새 장난 아니야.”
지스의 눈길이 따스해졌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가족이기 때문일 터였다.
설령 남들처럼 대단한 삶이 아닌들 어떠한가? 유나만 있다면 그의 삶도 누구 못지않게 완전했다.
“넌 아무 걱정 마. 오빠가 있으니까.”
지스가 끌어안자 유나가 질색을 하며 소리쳤다.
“아우, 냄새! 일단 씻으라니까.”
“유나야, 오빠는 꼭 항구의 지배자가 될 거야.”
“치! 아직도 그 소리야? 항구의 지배자가 뭔데? 그래 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잖아.”
“하하, 그렇긴 하지.”
“…….”
잠시 생각하던 유나는 피식 웃으며 지스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사실은 오빠의 땀 냄새가 싫지 않았다. 한 방울의 땀조차도 그녀를 위해 흘린 것일 테니까.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
지스는 창문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직업병인지, 밤 구경하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유적(1)
시로네 일행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여자들이 씻는 동안 남자들은 집을 청소했고, 남자들이 욕실로 들어가자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온 시로네와 리안은 여자들의 방을 확인하고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에이미와 테스가 여전히 거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으쓱한 시로네와 리안은 할 수 없이 먼저 아침을 먹었다.
어젯밤에 시내에서 사 온 음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울 무렵에야 동이 텄다.
여자들은 그제야 옷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방문을 들락거릴 때마다 의상이 확확 바뀌었다.
멀찌감치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시로네와 리안은 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것으로 갈아입어 놓고 잠시 후에 또 입고 나오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정말로 한번 해 보자는 것인가?
이건 보는 사람의 기억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아, 그냥 아무거나 좀 입어. 드래곤 잡으러 가냐? 방어력도 없는 헝겊 쪼가리에 왜 그렇게 신경을 써?”
테스는 경악한 얼굴로 리안을 노려보았다.
“어우, 진짜 저질! 너희가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쓰니까 우리가 더 꾸미는 거잖아! 다 너희 좋으라고 하는 거니까 입 다물고 있어.”
에이미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시로네, 이거 이상하지 않아?”
“아니, 예쁜데. 너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래? 흐음.”
에이미는 딱히 귀담아듣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으나 테스는 그녀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제발 시로네 좀 보고 배워라. 어휴, 밉상.”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테스가 문을 쾅 하고 닫고 들어가자 리안이 시로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잘 피해 가는 거냐? 나도 방법 좀 가르쳐 주라.”
“응? 그런 거 없어. 뭘 입어도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으하하하하!”
리안이 배꼽을 잡으며 뒤로 넘어졌다.
오전 11시.
외출 준비를 끝낸 시로네 일행은 배낭을 점검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과 나이프, 나침반과 로프까지 꼼꼼히 챙겼다.
테스가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됐어! 유적 탐사 준비 완료!”
“그럼 이제 자자. 내일 아침에는 꼭 출발하자고.”
리안의 뼈 있는 농담에 테스가 얼굴을 붉혔다.
“야! 내가 얼마나 늦었다고 그래? 그리고 에이미도 같이 준비했단 말이야.”
“에이미가 무슨 인질이냐?”
“그러는 너야말로 후줄근한 외출복에 무식한 대검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멀리서 보면 완전 원시인 같거든! 분수를 알아야지!”
에이미가 인질로서 사명을 다했다.
“리안, 미안해. 사실은 내가 늦은 거야. 테스는 나보다 빨리 준비했어.”
“하하, 괜찮아. 에이미는 오래 준비한 티가 나니까.”
테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뭐야? 그럼 나는 하나도 안 예쁘다 이거야?”
“흐음, 어디…….”
리안은 테스를 살폈다.
글쎄, 원래부터 예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꼭 부산스럽게 치장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심미안이 없는 리안이 보기에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그래, 뭐. 예쁘다고 말할 정도는 되네.”
“응?”
짓궂은 말을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던 테스의 머릿속이 한순간 창백해졌다.
리안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얼굴이 빨개지고, 얼굴이 빨개졌다는 사실에 더욱 얼굴이 빨개졌다.
“내, 내가 뭐 너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어서 꾸민 줄 알아? 멍청이! 원시인!”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여기서 좀 나가자. 해 떨어지면 구경도 못 한다고.”
리안이 친구들을 바깥으로 떠밀었다.
그리하여 일행은 일어난 지 5시간 만에 관광을 나설 수 있었다.
시로네의 처음 계획은 에이미와 단둘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이었으나, 친구들이 예상보다 가까워지면서 이제는 따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백사장에 늘어선 마차 중에 아무거나 잡은 그들은 동쪽으로 향했다.
섬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야 했기에 꽤나 고단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마차에서 수다를 떠느라 그들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어? 얘들아, 저기 봐!”
시로네가 창밖을 가리켰다.
차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숲이 울창한 산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