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91
‘모두가 조금만 양보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세계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대격변을 맞이할 텐데.
“방법을 말씀드리죠.”
“토르미아에 투표권을 넘기겠네.”
즉각적인 교환.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였으나 또한 이미 결과가 정해진 문제이기도 했다.
“돌아서 갈 필요는 없겠지. 말해 보게. 내 딸을 어떻게 데려오겠다는 건가?”
시로네가 검지를 들었다.
“파마광천성.”
***
토르미아 섹터.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알비노와 루피스트는 차를 마셨다.
“1시간 뒤면 피날레가 시작되겠군. 그것으로 공식적인 성전 행사는 끝나는 거지.”
세계 각국의 예인들이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들었다.
“긴 것도 같고 짧은 것도 같군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봐야겠죠.”
“그래. 무슨 변수가 더 생길지 나조차도 모르겠구먼. 인간은 멀리 보는 것 같지만 실상 1초 뒤를 보려고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지. 우리는 모두 맹인이야. 1초, 1초를 손으로 더듬어 가며 나아가는 게지.”
“자이브가 코드 원을 거절했습니다.”
기습처럼 내뱉은 말에 알비노가 흐흐 웃었다.
“자네도 땡깡을 부릴 줄 아나? 아서게. 자네는 너무 컸고, 나는 너무 늙었으니.”
루피스트는 차를 홀짝였다.
“마법협회장님이 이렇게 센티한 건 또 처음이군.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겐가?”
“느낍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뿐이죠. 플루는 유능한 인재예요, 이렇게 쓰기에는 아까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자를 죽이는 걸세. 그 정도면 국가를 위해 충분히 희생하는 거 아닌가?”
“……그렇겠죠. 시로네가 각국의 표를 모으고 있는데 받아먹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명분도 필요한 시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플루는 잘 해낼 거야. 우리에게 남은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
“…….”
알비노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그 처자가. 혹시 다른 감정이라도 느끼는 건가?”
“아뇨.”
루피스트는 태도를 고쳤다.
“부하 직원을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 그녀가 왕국의 핵심 부속품이라는 거죠.”
“마치, 제인처럼?”
전 마법협회 비서실장의 이름 앞에서 루피스트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한편 업무를 마친 기스는 휘파람을 불며 자이브 섹터로 향하고 있었다.
‘끝났어. 이겼다.’
내일이면 세계를 지배한다.
물론 페르미가 보낸 공문이 각국에 도착하면 상황은 달라질 터였다.
창문으로 뿌린 정보들도 성전의 하녀들과 청소부들 사이에서만 소문이 돌고 있을 뿐 각국 관리, 특히 왕에게 도착하기란 아직 요원했다.
어쩌면 그것이 왕과 시민의 거리일 것이다.
“여어, 페드라.”
복도 끝에서 마주친 아라크네의 총리를 보고 기스는 두 팔을 벌려 다가갔다.
“그동안 수고했어. 자네에게 쓴 돈이 아깝지 않군. 어때, 세계의 총리가 되는 기분이?”
“뭐, 그야…….”
이미 알비노와 모종의 협약을 한 페드라는 기스처럼 현재를 즐기지 못했다.
“표정이 왜 그래? 자신감을 가져. 다 끝났다고. 자이브 정보국에서도 낙승을 예상하고 있다고.”
“하하, 그렇죠.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데이트.”
기스가 옷깃을 털며 윙크했다.
오후에 그렇게 뒹굴고도 힘이 넘치는 모습에 페드라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오늘 오줌도 안 나올 것 같습니다. 그 축복받은 여자가 누굽니까?”
“왜 있잖아, 토르미아 마법협회 비서실장.”
“라비드…… 플루요?”
“뭐 오래 끌 거 있나? 내일이면 여자가 아니라 인류 전부가 내 발 아래 엎드리는데. 후딱 해치워야지.”
‘토르미아라고.’
미인계를 주력으로 하는 페드라는 이 상황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것들 봐라?’
기스가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페드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꽤 깐깐해 보이던데,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서요.”
“하하! 다 나만의 야수성이지. 여자는 말이야, 거칠게 다루어 줘야 한다고.”
“부럽습니다, 대단한 자신감.”
“크크, 나중에 소개시켜 줄게. 아무튼 나는 가네. 이따가 피날레 때 보자고.”
“네, 살펴 가십시오.”
기스를 따라 허리를 숙였던 페드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래. 살펴 가라, 기스.’
멀리는 못 나간다.
자이브 섹터의 입구에서 벽에 기대어 있던 플루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기스가 말했다.
“뭐야, 벌써 와 있었나? 의외로 성격이 급하군. 아니면 기다릴 수 없었던 건가?”
“성격이 급한 건 전하죠. 아직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내 잘못인가? 일정이 앞당겨졌잖아. 그 하비츠라는 놈이……. 아니, 그 얘기는 됐고. 1시간 뒤에는 피날레에 참석해야 한다고. 시간이 없어.”
플루는 직감했다.
‘날 버리겠다는 거네. 최저야.’
어차피 그녀가 원하는 것도 한 번의 기회였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좋아요. 저도 공식 행사에는 참석해야 하니까.”
기스는 과감하게 플루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미리 준비한 침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이브 근위대 신장이 완전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소문대로네.’
의심이 많은 기스는 여자와 동침을 할 때도 늘 곁에 근위 기사를 둔다.
기스가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괜찮지? 처음엔 좀 이상해도 적응될 거야. 그냥 장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네.”
플루는 주저하지 않았다.
“하하! 마음에 들어. 미래를 설계할 줄 아는 여자가 내 이상형이거든. 그럼 바로?”
“씻을게요.”
플루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크크, 까칠하기는.”
어차피 여기서 무를 남자는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씻었다.
‘근위대 신장.’
발도술의 정점에 오른 1군단을 상대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 터였다.
‘죽는구나, 나.’
따듯한 물이 머리카락 끝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그녀는 소녀처럼 미소 지었다.
‘괜찮아.’
거울의 습기를 닦은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라비드 플루.”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토르미아 마법협회 비서실장이다.
최초의 요라 (3)
***
시간은 밤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전의 기관실, 창고, 혹은 들쥐들의 아지트가 있는 지하실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인간과 다른, 고블린의 피 냄새였다.
“키이이이!”
양날 창을 넓게 붙잡은 키도는 호박색 동공을 번뜩이며 바닥을 굴렀다.
등으로 회전하는 모습이 수십 개의 칼날이 달린 개미지옥처럼 보였다.
“진천 요술.”
안찰의 마정안이 번뜩였다.
“괴력거인.”
천장의 벽돌이 물방울처럼 우묵해지더니 거대한 발이 되어 키도를 내리찍었다.
키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그의 육체가 흙에 찍힌 듯 안으로 들어갔다.
나타샤가 움직였다.
‘막았어.’
그녀가 노리는 것은 키도가 아닌,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우오린이었다.
‘저것만 죽이면 되잖아?’
음속으로 돌진한 그녀가 우오린의 목덜미를 향해 수도를 찌르는 순간.
“크으!”
거인의 발을 밀어낸 키도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샤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박령의 힘으로 밀려나지는 않았으나 음속의 충격파는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우엑!”
나타샤는 고개를 틀어 키도의 핏물을 피했다.
“……진짜 신기한 동물이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키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투기를 증명했다.
“크으으으!”
“나보다 느린데, 어떻게 나를 잡지?”
그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우오린이 땅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죽었다고 생각했다.
워낙 빠른 속도였기에 나타샤의 수도가 목을 관통하는 통증까지 느꼈던 것.
‘그런데…… 착각이라고?’
전투가 시작되고 수십 번이나 같은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나는 살아야 해.’
시로네.
“키도.”
앙다문 이빨 사이로 말이 새어 나오는 순간 라이가 키도의 옆구리를 베었다.
“큭!”
키도의 동공이 흔들렸으나, 라이는 손맛이 미적지근한 점이 불쾌했다.
‘베지 못했어.’
칼날이 들어가는 순간 엄청난 유연성을 발동해 검의 궤적을 흘린 것이다.
‘나보다 더 예민하다고?’
아니, 거인의 괴력을 막아 내고, 눈으로 좇기 힘든 나탸사의 속도마저 포착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 괴물이다.’
우오린이 물었다.
“키도, 괜찮아?”
“……그래.”
“살려 줘. 나는 반드시 살아야 해. 알지?”
“……그래.”
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시로네만이 살고 있기에 실망감은 들지 않았다.
다만.
‘물…….’
또다시 목이 말랐다.
‘왜 이러지?’
안드레의 미궁을 지켰을 때처럼, 무언가를 채우지 않으면 말라 버릴 것 같은 느낌.
“하악!”
거의 본능적으로 키도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잡고 있는 나타샤의 팔을 물었다.
“쭙! 쭙!”
송곳니로 살을 찢고 흘러나오는 피를 빠는 동안 나타샤는 미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키도가 번들번들한 입술로 고개를 들자 천천히 물러서며 물었다.
“……맛있어, 내 피?”
“어리석기는.”
라이가 검을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놈은 타인의 기억을 먹는다. 저 녀석의 실력은 수많은 자의 재능으로 이루어진 거야. 네 화신술을 쉽게 갖다 바치다니. 앞으로 전투가 더 어려워질 거다.”
“그래?”
나타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궁금했는걸. 내 몸이 다른 생물에게 먹힌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차피 국적이 다르기에 협력할 이유는 없지만 라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호기심 때문에 네 재능을 넘겨준다고?”
“하하! 그런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여긴 라이는 한숨을 내쉬며 키도를 돌아보았다.
‘역시 흡수했는가?’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고, 실제로 나타샤의 피는 키도의 혈관을 타고 기억을 전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