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리안이 빨래판 복근을 벅벅 긁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시로네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시로네, 너 여기서 뭐 하냐?”
“아니, 저기…….”
리안과 친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큰일이었으나 레이나가 선수를 쳤다.
“뭐야? 너희들 아는 사이였어?”
“시로네? 어, 내 친구야.”
“리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하하! 괜찮아. 저 마녀는 성질머리는 고약해도 이런 쪽으로는 전혀 신경 안 쓰거든.”
과연 그럴까?
그녀가 개방적인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있었다.
“이름이 시로네였구나. 걱정하지 마. 리안이 친구라면 친구인 거니까. 애가 좀 한심하기는 해도 자기가 내뱉은 말에 책임은 지니까.”
시로네는 의심을 거둔 표정이 아니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레이나는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다.
진정한 신뢰란 의심 속에 싹트는 법이니까.
“근데 너 되게 특이하더라. 조금 전에 그 연주는 어떤 생각으로 한 거야?”
“뭐야? 시로네가 친 거였어? 난 또 누나의 히스테리가 발동했나 했는데.”
시로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예쁘고 다정한 누나에게 마녀나 히스테리라는 말을 붙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리안,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누나는 상냥하고 좋은 분이신데.”
“시로네! 절대 속으면 안 돼! 이 여자는 마녀야! 언젠가 널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리안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시로네도 대꾸하지 못했다.
레이나가 말했다.
“후후, 미안해. 동생이 워낙 철이 없거든. 그래도 시로네 같은 친구가 있어서 안심이 되네. 잘 챙겨 줘.”
“아, 아니에요. 제가 뭐…….”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시로네의 모습에 레이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열여섯 살이면 알 것은 다 알 나이인데도 참으로 순수한 아이였다.
“너, 되게 귀엽다.”
테이블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리안이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귀여우면 데리고 살지그래. 시로네가 가족이 된다면야 나야 좋지. 으하하하!”
리안의 농담에 시로네는 더욱 부끄러웠으나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레이나는 동생의 말에서 깨달았다.
“호오, 누나까지 내줄 정도로 친한가 보네.”
리안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물론 시로네는 형제나 다름없지만 너 같은 마녀는 아무한테나 줘 버려도 상관없다고. 오히려 시로네가 아깝지.”
“아하, 그러셔?”
말이 끝나는 순간 레이나가 사람의 키를 가볍게 넘길 정도로 뛰어올랐다.
시로네가 놀라는 사이 리안의 앞에 착지한 그녀가 동생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아파! 아파앗!”
“귀엽게 봐줬더니 머리끝까지 올라오려고 해?”
“아파! 아프다고!”
지금은 음악가지만 레이나 또한 한때 라이에 맞먹는 검술의 재인이었다.
손가락에 가한 힘은 엄청났고, 리안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로네! 도망쳐! 이 마녀에게 걸리면 너도 끝장이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으나, 리안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악의는 없었을 거예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로네와 리안을 바라보던 레이나가 거칠게 귀를 잡아당겼다가 휙 놓아주었다.
“아야!”
“친구 때문에 목숨 건진 줄 알아. 어휴, 너도 네 친구 반만 닮아 봐라. 애가 철이 없어.”
“쳇! 급소를 잡혀서 그런 거야.”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며 구시렁거린 리안이 다시 레이나를 돌아보았다.
“대체 집에는 왜 온 거야? 휴가는 전에 냈었잖아?”
“응? 너 아직 못 들었어? 라이 소식.”
“우리가 언제 신경 쓰는 거 봤어?”
“이번에 라이가 공인 검사 시험을 보거든. 그래서 데리러 온 거야. 할아버지랑 같이 출발했는데, 할아버지는 중간에 친구 좀 만나고 오신다고 해서.”
“공인 시험?”
리안의 눈이 충격에 잠겼다.
물론 형은 천재였으니 실력의 차이는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벌어졌단 말인가?
공인 자격증은 검사와 마법사를 막론하고 모든 귀족의 꿈이자 서열의 기준이었다.
시험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지원자의 숫자는 천 명에 이르고 그중에서 공인을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은 채 30명도 되지 않았다.
물론 비공인 자격증도 있었다.
왕성에서 지정한 기관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크레아스에서는 알페아스 마법학교가 대표적이다.
마법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으로 비공인 10급의 마법사가 되고, 이후에는 협회나 길드를 통해 여러 업적을 달성하며 급수를 올리는 것이다.
비공인 중에도 공인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가 있지만 사람이란 돈과 명예가 따르는 곳에 몰리는 법이기에 전체적인 수준은 공인이 훨씬 높은 게 사실이었다.
“흥, 형은 좋겠네. 역시 천재는 달라. 집에서도 팍팍 밀어주잖아.”
레이나는 리안의 머리를 헝클었다.
재능이 있든 없든 귀여운 막냇동생. 이번 일로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일단 나는 저녁 준비하러 가야겠다. 왕궁에서 공수한 해산물이라 직접 손질해야 하거든. 시로네,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보면 인사하자.”
시로네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히 가세요.”
레이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올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그녀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했던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래서일까, 내일이면 저택을 떠나야 하는 시로네는 큰 용기를 냈다.
“리안, 혹시 너희 누나 말이야.”
“응?”
“혹시 남자 친구 있어?”
말을 꺼내자마자 엄청난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이미 말은 내뱉어진 뒤였다.
눈을 깜박이던 리안이 하얗게 웃었다.
“시로네, 너 설마?”
“아, 아니야! 그냥 잊어 줘! 난 그냥…….”
“하하하! 누나! 누나!”
방을 뛰쳐나간 리안이 2층 난간을 움켜쥐자 시로네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누나! 시로네가 누나 남자 친구 있냐고 물……!”
“아우! 좀 그만해!”
아슬아슬하게 입을 틀어막은 시로네가 용을 쓰며 리안을 방으로 끌고 갔다.
“응? 무슨 소리지? 남자 친구?”
주방에서 일을 하는 시녀들이 2층을 올려다보았으나 레이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애들끼리 장난치는 거예요. 자, 이제 찌기만 하면 돼요. 독은 제거했으니 요리해 주세요.”
“네, 아가씨.”
본격적으로 요리가 시작되자 시녀들은 다시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저택의 업무를 총괄하는 남자는 여전히 2층에 주의를 기울였다.
집사장 루이스.
타고난 계산 실력과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젊은 나이에 집사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때가 5년 전인데도 아직 서른 중반이었고, 차가운 인상에 무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시로네라고?”
시녀들이야 가물거리겠지만 집사장인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도서관 이전 작업을 위해 테무란이 데려온 계약직 소년이었다.
‘어째서 막내 도련님과……?’
오젠트 가문의 번영에 인생을 바치기로 한 그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평집사를 향했다.
“테무란 씨에게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지금 당장.”
***
꼭두새벽부터 기합 소리가 퍼졌다.
라이가 공인 시험을 치른다는 얘기를 들은 리안은 평소보다 훈련 강도를 높였다.
“타하! 타하!”
반드시 따라잡고 만다.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었고, 카이트는 제자의 검무를 살피며 확신했다.
‘실력이 늘었어.’
체력, 기력, 기술, 모든 면에서 그랬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도시 인근의 산적 패거리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식으로 검술을 익힌 사람끼리의 대결이라면 여전히 멀고도 멀었다.
‘문제는 스키마야.’
저돌성은 리안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이번에는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검술은 너무 우직해.’
때로는 차가운 정신으로 뒤를 돌아봐야 할 때도 있는데 오직 전진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냉정하지 못하다는 단점 따위는 저 뜨거운 화력 앞에 비할 바가 아니지. 이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해.’
“타하! 타하! 타하!”
장검보다 2배나 무거운 곤봉을 오직 완력만으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스키마를 깨닫기만 하면 효율이 얼마나 극대화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만! 10분간 휴식!”
곧 죽을 듯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리안이었으나 눈빛은 불처럼 뜨거웠다.
‘그때도 그랬지.’
1년 전의 어느 날에도 이런 눈을 했었다.
금세 꺼지긴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라이가 왕궁으로 간다. 리안의 불꽃은 시들지 않을 터였다.
“막내 도련님! 막내 도련님!”
그때 평집사가 달려왔다.
목을 축이는 리안의 앞에 도착한 그가 숨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내뱉었다.
“큰일 났습니다. 레이나 아가씨께서 빨리 저택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누나가? 무슨 일인데? 형 때문이라면 관심 없어. 알아서 하라 그래.”
“그게 아니고, 시로네라는 계약직 소년이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리안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 버렸다.
“푸우!”
시로네가 위험에 처해 있다니.
이제 몇 시간 후면 떠나는 친구를 배웅할 참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시로네가? 왜? 무슨 일인데?”
“그게, 저기…….”
“빨리 말해! 무슨 일이냐고!”
“루이스 집사장이 가주님에게 보고를 올린 모양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도련님과 시로네라는 집사가 친구처럼 지낸다고…….”
“이런 젠장!”
리안이 바위에 말린 옷을 황급히 주워 입는 것을 보며 카이트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시로네는 또 누구고?”
“친구예요. 평민이라서 알리지 않았는데 루이스가 아버지에게 보고했나 봐요.”
카이트는 아주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마주쳤던 소년을 떠올렸다.
눈빛이 좋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개 집사였기에 관심을 껐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된 건가?’
옷차림을 말끔히 한 리안이 말했다.
“스승님,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내죠. 아버지를 만나야 해요. 저택에 가 봐야겠어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리안이 황당한 얼굴로 카이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친구가 위험한데.”
“평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무슨 상관이죠? 스승님, 그런 분이셨어요? 스승님도 그러셨잖아요!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카이트는 혀를 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제자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가서 뭘 어쩔 생각이냐? 질질 짜기라도 하게?”
“스승님!”
“리안,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 간의 일이야.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 오젠트 가문의 입지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해결하려고 하겠지. 네 어리광 따위가 통할 상황이 아니야.”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요? 제가 먼저 시로네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으음.”
카이트는 제자의 눈을 응시했다.
‘참으로 좋은 눈이다.’
거짓이 없고 열정적이며, 무엇보다 순수했다.
꿈을 향한 첫걸음(5)
‘눈빛으로 대검호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고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는 아이였다.
“자, 받아라.”
카이트는 자신의 검을 리안에게 건넸다.
진검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담겨 있는 뜻은 명백했다.
정말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다면, 리안 또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검을 차고 저택에 간다면 보내 주마. 하지만 그 정도의 각오가 아니라면 여기서 움직이지 말거라.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야. 이미 네 손을 떠난 일이다.”
“스승님.”
매서운 눈으로 카이트를 바라보던 리안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양손을 내밀자 카이트는 말없이 검을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