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05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슬펐기에 일단 부정했으나 심적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줄루 씨는 인류를 위해 싸웠잖아요. 지금도 시로네를 도와서 이곳에 왔고요. 그런 사람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생각이 없다는 뜻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본질은 애정이지. 네 말대로라면…… 인人도 움직이니 살아 있는 것인가?”
“그, 그건…….”
“생명의 기본은 사랑이다요.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사랑하기에 살아 있는 것이니까. 그 철학을 우주 전체로 끌어올리면 야훼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시로네를 돕는 것입니까?”
“아니.”
줄루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느 것에도 애정을 갖지 않아. 나 자신도. 만약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을 가진 것이다요. 영원히 너의 기억에 머물 테니까. 반대로 네가 지금까지 만난 무수한 인간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것이다요.”
지나간 시간은 기억에 담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든 존재하지 않았든, 우리는 그저 기억을 쌓아 가는 것일 뿐.
아레스는 생각했다.
‘그런 건가.’
인의 파동에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어떤 삶에도 애정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줄루가 상의를 가슴 아래까지 올렸다.
“윽!”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려던 아레스는 줄루의 배에 붙어 있는 생물을 발견했다.
“그게 뭐죠?”
“철갑충 아모로스. 내 소환수다요.”
갑각이 겹겹이 쌓인 생물이었고 뱀처럼 긴 꼬리가 줄루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 생물의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줄루의 배꼽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모로스는 생물의 장기에 독을 주입하지. 그 독을 만드는 과정에서 특이한 화학물질이 나온다요. 그걸 줄 테니 마셔.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줄루 씨는…….”
“괜찮아, 익숙하니까. 아모로스는 피라미드 안에서만 서식해서 밖에서 소환하는 게 불가능해. 참 특이한 일이지. 이 생물은 아주 오랫동안 진화하지 않았어. 아마도 고대의 피라미드가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줄루가 아모로스의 꼬리를 잡고 끌어내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상체가 나왔다.
“윽!”
아모로스의 주둥이에 엄지손가락을 넣은 줄루가 마치 차를 따르듯 반대편 손에 기울였다.
연녹색의 점액질이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
일단 좋은 거라고 하니 먹기는 하겠지만 모양새가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저기, 이걸 어떻게…….”
“혀로 핥아.”
“아, 네.”
먹는 순간 코가 시큰할 만큼 독소가 느껴졌으나 이내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호오, 이건?”
홍안이 번쩍이며 몸의 변화를 분석했다.
‘엄청나다. 성분조차 분석할 수 없지만, 이건 혁명이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줄루가 말했다.
“아주 오래전엔 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지도 그렇게 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무언가를 이해하고 떠났겠지.”
파라스 왕국에 세워진 피라미드의 수많은 복제 건물들이 그 증거였다.
“아모로스는 그때 당시 피라미드에 서식했던 종일 거라고 추정된다요. 인의 파동, 혹은 율법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겠지. 그 이후로 진화가 없다는 것은…….”
시공간의 변화에 적응했다는 뜻일 것이다.
“가자. 아모로스의 체액을 다른 사람에게도 먹여야 해. 많이는 못 만들 거야.”
줄루의 낯빛은 창백했다.
“다음에는 저에게 아모로스를 붙이세요. 아마 고대에는 특정 제물을 바쳐서 이 액체를 얻었을 겁니다.”
줄루는 고개를 저었다.
“실험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어. 나는 피라미드에서 자라며 고대의 체질을 가지게 되었지. 오직 나만이 아모로스를 다룰 수 있다요.”
아레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죠? 아무리 체질이 바뀌어도 생명을 죽이는 갑충이에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줄루는 순순히 시인했다.
“괜찮아. 나는 나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애정이 있든 없든, 자신의 몸을 바쳐 남을 구하는 행동은 이타적이라고 믿었다.
“이리 와요. 일단 치료부터 해요.”
가방을 뒤진 아레스는 줄루의 배에 약을 바르고 잘록한 허리를 붕대로 감았다.
“지혈을 했으니 당분간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특별한 감흥 없이 기다리고 있던 줄루가 먼저 몸을 돌려 어둠으로 향했다.
아레스가 불렀다.
“잠깐만요.”
그리고 줄루가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다가가 그녀의 입에 키스를 했다.
‘두 번 실수는 안 해.’
인의 파동에서 배운 것은, 할까 말까 망설이느니 해 버리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줄루는 마치 인형처럼, 심지어 호흡조차 떨리지 않고 서 있었다.
오기가 생긴 아레스는 몇 초를 더 버텼으나 결국 낯짝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섰다.
줄루가 말했다.
“가자.”
“이봐요, 내가 지금 당신에게 입을 맞췄잖아요. 뺨을 때린달지, 아니면 뭔가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기억나지 않아.”
그녀의 마음은 텅 비어 있으므로.
“…….”
아레스는 어둠으로 사라지는 줄루의 뒷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의 정의 (2)
***
“전하.”
미카스 왕국에 아레온의 시체가 도착했다.
왕자의 수족 피스크는 보이지 않았고 돌아온 것은 싸늘한 아들의 주검뿐.
“어어…….”
왕좌에서 일어선 미카스의 국왕 델키도는 힘이 빠진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어?”
창백한 아레온의 얼굴이 공개되자 신하들이 주저앉고, 시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형제들은 담담했다.
‘평소부터 오만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들의 속마음이야 알 길이 없지만, 장남의 죽음을 목도한 아버지의 심정은 달랐다.
“어어, 어어어…….”
결국 왕의 체신도 잊고 무릎을 꿇은 델키도는 아레온의 시체를 끌어안고 고개를 쳐들었다.
“오오오오!”
비통한 울음소리였을까.
“오오오오!”
아니면 미카스 왕국의 급소를 찌른 누군가에 대한 극한의 분노였을까.
“잡아라.”
델키도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전부 다 잡아.”
그랜드 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네!”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라한의 꿈을 꾸고 있는 시로네는 무의식중에서도 직감하고 있었다.
한 인간의 평생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음을.
‘최초의 요라.’
섭식과 번식의 원죄 속에서 사랑을 깨달은 자.
그리고 그 하나의 정의로 인간의 몸에서 요르교의 신이 된 사람의 마지막을…….
‘나는 지켜봐야 한다.’
이것은 이야기.
“아르망!”
오메가의 기록에서 말소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라한!”
불타는 숲속을 무장 병력이 질주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랴! 이랴!”
하지만 미카스 기마대가 둘로 나뉘면서 서로의 시선은 점차 멀어졌다.
‘제길!’
국왕 델키도는 아들을 죽인 자를 잡기 위해 미카스의 전 병력을 투입했다.
정복 전쟁마저 포기할 정도로 아들을 애틋하게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럴 테지만, 광적으로 복수에 집착하는 모습에서는 손상당한 제왕의 자존심이 엿보였다.
포박당한 채 이동식 감옥에 내동댕이쳐진 요라한은 가슴으로 기어 밖을 살폈다.
벌써 몇 번이고 옮겼던 화족의 근거지가 또다시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어째서…….’
인간은 이다지도 집요할까.
미카스의 왕은 요라한과 화족 일행에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가했다.
요라한은 독방에 갇혔다.
사지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채, 그는 날마다 바깥에서 울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왜……?”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이리 잔인할 수가 있지? 어떻게 다른 존재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지?’
물론 타인의 손톱을 뽑는다고 해서 자신의 손톱이 아픈 것은 아닐 테지만…….
또한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타인의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오직 나라는 존재에 갇혀…….’
자기 자신만을 도모할 수 있을 뿐.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요라한은 나라는 존재가 갖는 이기심에 대해 생각했다.
‘나. 나를 벗어나는 사랑…….’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접었지만, 또한 이제는 바꿀 수도 없을 테지만, 사지의 힘줄이 끊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방의 문이 열리고 미카스의 왕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독한 놈.”
앙상하게 말라붙은 델키도의 눈에는 탁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화족이 당하는 소리를 듣고도 아직도 안 미쳤나? 하긴, 어차피 나야 좋지.”
그는 채찍을 팽팽하게 당겼다.
“네 사지를 끊은 내가, 어째서 눈과 귀, 입은 놔뒀는지 아느냐?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비참하게 울부짖으라는 뜻이다. 내 심정의 만분의 1이라도 느껴 봐.”
복도에서 비명 소리가 터졌다.
“…….”
모두가 무사할 거라는 기대는 이미 없었고, 그저 편하게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 인간의 복수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아들도 화족을 죽였습니다.”
“으아아아!”
델키도는 채찍을 휘둘렀다
“감히 너 같은 놈이 내 아들을 평가해? 일국의 왕자였다! 화족의 목숨과 비할 바가 아니야!”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요라한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명에 지위 고하는 없습니다. 가족을 잃은 당신의 마음, 화족들도 똑같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들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내가 왜!”
채찍을 버린 델키도는 요라한을 발로 찼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내 아들이 죽었다고! 내 아들!”
나, 나, 나.
결국 인간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요라한에게서 반응이 없자 델키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노려보았다.
“흥.”
이 가증스러운 놈을 절망에 빠트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끝까지 담담하겠다 이거지. 부부가 똑같군. 좋아, 내가 직접 보여 주지.”
델키도가 지시를 내리자 큼지막한 화분을 실은 수레가 독방으로 들어왔다.
“어…….”
요라한의 표정이 멍해졌다.
화분에 심겨 있는 것은 꽃이 아닌 화족,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르망이었다.
“어때, 마음에 드나? 분재라고 하던가? 이것저것 잘라 내고, 움직이지 못하게 관절을 굳혔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사람을 식물처럼 다루다니.
“요라한.”
남편의 얼굴을 본 아르망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으나 이내 슬픈 눈이 되었다.
‘저렇게 몸이 상하다니.’
굳이 소세계창유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은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요라한이 물었다.
“괜찮아?”
“응.”
아르망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도모하는 것만이 델키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슬슬 질린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