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16
비록 탈옥에 의해 완벽성이 깨졌지만, 여전히 신의 승률은 99.99퍼센트였다.
***
레테에게 길을 열어 준 손유정은 황야에 멍하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
우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선택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버린 상태였다.
“유정아.”
모르타싱어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넌 옳은 선택을 한 거야. 야훼가 말했잖아.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옳음을 가지고 있다고.”
“아니.”
손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옳음이 아니야. 감당할 수 없었어. 내 선택으로 우주가 사라진다는 거, 난 결정하지 못해. 그래서, 그래서 야훼에게 넘겨 버린 거야.”
“유정아…….”
손유정이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버티지?”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녀는 시로네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죽음으로도 책임질 수 없는 것을, 그 모든 존재의 무게를, 야훼는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거야?”
무엇으로 책임지는가?
존재의 무게 (3)
***
악의 전당.
선악의 탄생에 대해 들은 시로네 일행은 릴리스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얼마나 많은 악이 존재할까?”
카인이 말했다.
“이 전당에는 악의 시작부터 끝이 전부 존재하지. 순위를 매길 생각은 없지만, 일종의 랭킹이랄까? 대부분의 악은 한 줄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야.”
복도에 있는 방마다 전부 서재였고, 방의 크기는 문을 통해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정말로 강력한 악은 특별히 독방을 쓰지만, 아, 여기 하비츠도 있군. 꽤나 높네. 랭킹 7위. 이 정도면 우리 어머니에게도 비빌 만하겠어.”
일행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은 시대순으로 배열된 방에 기록되지. 지금 시대의 악을 보려면 꽤나 걸어야 할 거야.”
시로네는 또 하나의 독방에 걸린 초상화를 발견했다.
‘미네르바 씨.’
순위를 매길 생각은 없지만, 방의 순서로 따졌을 때 랭킹 87위였다.
이루키가 말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알아. 기요르기를 만나려는 거겠지. 그 녀석이 세이나라는 여자를 붙잡고 있고.”
세계가 라미교에 잠식당하고 있는 지금, 세이나는 반드시 필요했다.
‘교황청의 모든 전말을 공인해 줄 사람.’
카인이 돌아섰다.
“괜찮겠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요르기는 벼르고 있어. 너를 죽이기 위해.”
시로네가 말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야. 기요르기는 내 감정에서 태어난 악마니까.”
“책임이라.”
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확실히 닮았군. 어쩐지 기요르기는 마족 같지 않았거든. 뭐, 좋아. 나는 지켜볼 테니까.”
시대의 끝을.
“자, 여기서부터 너희들이 살던 시대야. 가만있자, 이 중에도 1명이 있었지?”
카인이 커티스를 돌아보며 방을 가리켰다.
“어쨌든 코어에 왔으니 상을 받아야지. 들어가서 지우는 게 어때, 네 범죄 기록?”
“…….”
대답이 없자 시로네가 불렀다.
“커티스 씨.”
“아니, 됐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가자고. 벌을 내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
일행이 고집스럽게 방 앞에 머물자 커티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래! 제길! 내가 죽였어! 그 꽃다운 아이들을 내가 죽였다고! 혐오스럽나? 그럼 혐오해!”
페나가 말했다.
“너, 정말로 그 여자들을…….”
“우린 사랑했어!”
무릎을 꿇은 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와 니아는 정말로 사랑했단 말이야. 그래, 불륜이지. 아내가 있는 놈이 딸의 친구와 놀아났으니,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테지! 하지만 내 삶은……!”
“왜 죽였죠?”
시로네는 본론을 물었다.
무슨 말도 합리화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커티스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에드리나, 니아, 벨리타, 데이지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 난 니아와 불륜 관계였고. 그런데 딸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니아의 잘못이었지.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는데 홧김에…… 말을 해 버린 거야.”
어쩌면 그녀도 그 기회를 빌미로 빨리 털어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여행을 가는 날이었어. 사실 나는 여행지에서 니아와 만나기로 했었어. 아내에게는 지역 순찰이라고 했지. 형사에게는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결국 에드리나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행을 가지 않았군요.”
“그래. 친구들과 헤어져서 광장으로 갔지. 게시판에 적힌 별장 주소를 보고 찾아간 거야. 그리고 거기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서 죽었다.”
“어떻게 알죠? 동료 형사의 말에 의하면 자살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매듭.”
커티스의 손이 부들거렸다.
“사냥식 매듭으로 묶은 올가미가 아니야. 거기서 한 번 더 꼬아서 고리를 거는 매듭법이지. 우선 발판을 밟고 천장 파이프에 낡은 동아줄을 묶었을 거야. 그런 다음 손으로 매달려서 줄을 끊는 거지. 다시 발판을 치우고, 창고의 문을 안에서 잠가. 그렇게 밀실이 완성되지.”
일행의 머릿속에 장면이 연상되었다.
“에드리나는 추락한 것처럼 자리를 잡고 누웠을 거야. 그리고 자신의 목에 그 매듭법으로 동아줄을 묶고 강하게 잡아당기면…….”
줄은 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떠났어. 내 딸은…….”
커티스는 또다시 상상한다.
창고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목이 조인 채 죽음을 기다리는 딸의 모습을.
그녀가 흘렸을 한 방울의 눈물을.
“내가…….”
고개를 돌린 커티스가 눈물을 쏟아 냈다.
“내가 가르쳐 준 매듭법이야.”
“…….”
“어릴 때부터 에드리나는 내가 형사라는 것을 좋아했어. 악당을 때려잡는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지. 실상은 어떻게든 남부럽지 않게 살아 보려고 온갖 잡일 다 하는 아저씨일 뿐인데.”
에드리나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순간 그가 떠올린 것은 딸이 여덟 살이던 때의 기억이었다.
“우리 딸, 이리 와 봐.”
“왜, 아빠?”
“자, 두 손 내밀어 봐. 재밌는 거 가르쳐 줄게.”
꼬맹이의 하얀 손목을 매듭으로 묶은 커티스는 한 번 더 꼬아서 고리를 걸었다.
“짜잔!”
“어? 뭐야? 이거 왜 안 풀려?”
“하하하! 어때?”
커티스가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자지러지게 웃던 에드리나가 보챘다.
“그만해! 빨리 풀어 줘! 혼내 준다!”
“자, 이것 봐.”
딸을 무릎에 앉힌 커티스는 매듭 사이에 걸린 고리를 엄지로 벗겨 냈다.
“이렇게 한 번 튕기기만 하면 풀리게 되지. 수갑법이라는 거야. 마술사들이 쓰는 거지.”
“우와! 아빠, 나도 가르쳐 줘. 응? 응?”
“좋아. 그럼 또 해 볼까?”
“……풀 수 있었어.”
커티스는 영혼이 붕괴된 느낌이었다.
“그 순간에도 마음을 바꿨다면, 손쉽게 풀 수 있었다고. 그런데 왜…… 으아아아!”
땅을 치며 오열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루키가 의문을 던졌다.
“형사들이 매듭을 발견하지 못한 건……….”
“내가 풀었어.”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때 커티스의 손은 저절로 수갑법을 해제하고 있었다.
“죄를 덮으려고 한 건 아니야. 불륜 따위, 딸이 죽은 마당에 무슨 상관이야? 모르겠어. 너무 안타까워서, 저 매듭 하나, 그냥 풀면 되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혹시라도 딸이 살아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죽였잖아요.”
에드리나의 친구 니아, 벨리타, 데이지를.
“내 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니아와 만나기로 한 여행지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또 다른 장소의 사건이다.
“따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들을 다 데리고 오더군. 짜증이 났지만, 이제 보니 딸이 없는 거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니아가 다 끝났다고 말하더군.”
커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 딸에게 딸의 친구와 놀아난 것을 들킨 아빠의 심정이. 난 불같이 화를 냈고, 니아와 말다툼을 벌였지. 니아는 내 아내를 걸고 협박했어. 내 가정을 풍비박산 내겠다고.”
불륜의 끝은 늘 그런 식이지만.
“난 우선 딸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니아를 그대로 둘 수도 없었지. 친구들도. 그래서 별장 다락방에 가둔 거야. 돌아왔을 때 없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겁을 좀 먹은 것 같더군.”
“그렇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요.”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면, 뭐. 2층이지만 창문도 열려 있었고. 하지만 그냥 그런 거였어. 어제까지 불타는 밤을 보냈고, 늘 하는 말싸움이었다고. 이번에는 가정이 걸려서 좀 심각했을 뿐이지. 니아도 기다릴 생각이었을 거야. 비싼 돈 주고 빌린 별장이니까. 친구들과 내 험담이나 실컷 하면서 말이야. 벨리타와 데이지는 흥미진진했겠지.”
시로네가 말했다.
“하지만 결국 딸을 만나지는 못했군요.”
“약속 장소였던 시프 광장으로 갔지. 아는 상인이 말하기를 게시판을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더군. 별장 임대 광고였어. 빈집이라 좀 이상했지만, 한편으로는 돈도 없는 딸이 지낼 곳은 거기밖에 없겠다 싶더라고. 형사 딸이라 그런지 겁도 없고 유별난 구석이 있었어. 그래서 내 친구 라이버를 불렀지. 자세한 얘기는 쪽팔려서 말 못 하지만, 정말로 지역 순찰을 갔다는 알리바이 정도는 꾸며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별장에서 우리가 본 건…….”
딸의 시체였다.
“그다음은 설명할 필요 없겠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을게. 처음엔 충동적이었어.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떤 유혹이 들더군.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난 그냥 살인자야. 어떻게 하면 수사망을 피할 수 있는지 빠삭한, 그런 살인자.”
벽에 기댄 커티스는 담배를 꺼냈다.
“보통의 미제 사건은 다 그런 식이야. 개연성 바깥에 있는 우연들 말이야. 삶에 대한 집착은 엄청나지.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자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었어. 어떻게 지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지 않아. 그러다가……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어.”
칙, 담배에 불이 붙었다.
-아빠의 잘못이 아니에요.
“후우.”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어낸 커티스가 말했다.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잊고 싶었을 뿐이야. 그냥 죽으면 되는데, 내가 없어져도 내가 한 짓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더라고. 그게 너무 찜찜해서, 아예 지워 버리고 싶어서 멜키두에 온 거야.”
에드리나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만 가. 나는 남을 테니까. 죗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에게 남은 건 하나니까.”
그는 기록을 말소하고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딸이 죽은 수갑법으로.
‘그러면 되는 거지, 에드리나?’
커티스는 악의 전당에 담배꽁초를 던졌다.
“사는 거 엿 같네, 진짜.”
“그러니까 살아.”
페나가 다가갔다.
“죽으면 뭐가 달라지냐? 세상에는 죽음으로 책임질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커티스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떡하라고? 감옥에서 평생 썩는다고 눈이라도 깜빡할 것 같아?”
수도 파르메의 감옥도 커티스의 죄책감에 비하면 살 만한 곳이었다.
“……모르지. 그래서 죄잖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 거.”
페나는 말을 이었다.
“네 딸이 죽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어? 넌 지금 똑같은 짓을 하는 거야. 그렇게 죽어 버리면, 널 두고 가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데? 죽을 거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죽어, 인마. 제발 책임감 좀 가지라고.”
“…….”
그녀는 시로네 일행을 돌아보았다.
“내가 남을게.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절대로 그냥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잠시 생각하던 시로네가 몸을 돌렸다.
“가자.”
카인을 필두로 일행이 사라지자 페나와 단둘이 남은 커티스가 말했다.
“좋은 연기였어.”
“뭐?”
“기록을 말소하고 도망쳐. 코어는 현실이잖아. 배든 뭐든 타고 새 삶을 찾으면 될 거야.”
솔직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됐어. 그만둘래.”
“뭘?”
페나는 커티스의 옆에 앉았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도 많겠지. 여기 와서 느낀 건, 새로운 삶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내가 바뀌지 않으면 뭐가 어떻게 되든 똑같은 인생일 거라고.”
악마를 위한 성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가만히 있자. 우리, 뭘 하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망친 거잖아. 세상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받아들이는 거야. 속죄하는 마음으로.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울음을 참으며 페나가 말했다.
“책임을 지지 못한 죄만큼은 책임져야 할 거 아냐.”
책임지지 못한 죄.
“……그렇군.”
악의 전당에서, 커티스는 하늘을 향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다 망쳐 버렸어요.
‘그러니 신이시여.’
정말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신이 인간처럼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