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2
그러자 시로네가 1골드를 꺼냈다. 급해서 물어봤을 뿐 속임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아, 여기 1골드요. 먼저 물어서 죄송해요.”
궁수는 자괴감이 담긴 눈으로 금화를 바라보았다.
물론 1골드는 큰돈이지만 나름의 경력을 쌓은 용병이라면 벌벌 떨 정도의 액수는 아니었다.
“쳇! 됐어. 내가 실수한 거니까.”
“실수가 아니에요. 계약이 그런 거잖아요.”
“알아! 이건 내 자존심이야. 애들 앞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어.”
시로네는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은 서비스라고 생각할게요.”
“쳇, 말이나 못하면.”
얌체처럼 금화를 챙기는 모습에 궁수는 부아가 났다. 언제부턴가 어린놈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대신에 나도 하나 물어보자.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원주민 자치 구역은 극비인데.”
“루프는 원주민의 제사 도구니까요. 아마 특별 취급 품목일 것이고, 큰돈을 벌 만큼 마진이 엄청나다면 원주민 중에서도 권한을 가진 사람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치 구역 사람일 수밖에 없잖아요.”
“…….”
궁수는 말문이 막혔다.
돈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발견한 게 케르고 유적이었다. 밤을 새워 루프의 경로를 조사하고 정보 시장을 뒤져서 얻어 낸 결론이 시로네의 짧은 말에 전부 담겨 있었다.
“쳇!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질문은 더 없냐?”
“네. 이제 내려가서 확인해야죠.”
궁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로네가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터였다.
그로부터 20분 동안 계단을 내려갔다. 나선으로 도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깊이였다.
계단 끝에 외길의 복도가 이어졌고 10미터 앞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2명의 원주민이 지키고 있었는데 관광지와 다르게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고 신발도 신지 않았다.
‘저런 문신이구나.’
배꼽을 타고 올라온 문신이 가지를 치면서 얼굴까지 이어진 모습이 무시무시했다.
시로네는 저 문 너머가 자치 지구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몇 킬로미터는 걸어야 토아산의 정글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용병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통역을 맡은 궁수가 케르고 언어로 몇 마디 암호를 교환하자 원주민이 스위치를 내렸다. 강철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문이 좌우로 열렸다.
“우와…….”
낯선 세계에 시로네의 눈이 빛났다.
석재 벽으로 세공된 팔각형의 방이었는데, 건너편에 또 다른 철문이 보이고 3명의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외벽과 똑같은 형태의 팔각형 제단이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8개의 모서리마다 대략 직경 30센티미터의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시로네는 그 구체를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어? 저건?”
궁수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왜 그래? 뭔지 알아?”
“저거, 분명 미로의…….”
리더가 끼어들었다.
“흥!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던 놈에게 뭘 물어? 왜? 아랫도리에 달린 쌍방울이라도 생각났냐?”
술집에서부터 시로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리더가 쏘아붙였으나 원주민은 즉각 반응했다.
“미로? 미로라고 했나?”
언어를 모르는 시로네도 미로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황이 궁금해진 궁수가 통역을 더했다.
“미로를 아냐고 물어보는데?”
“네. 만난 적이 있어요.”
궁수가 그렇다고 전달하자 원주민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문신이 휘어진 모습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도깨비를 보는 듯했다.
“만났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통역을 들은 시로네가 조금 더 강하게 주장했다.
“아니에요. 정말 만났어요.”
“…….”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원주민이 이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심판하지 않는다. 오로지 천사의 눈이 너를 지켜볼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원주민은 밖에서부터 철문을 닫아 버렸다.
시로네도 아쉬움을 접고 돌아섰다. 어차피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었다.
용병이 중앙 제단으로 향하자 반대쪽 철문에서 1명의 원주민이 다가왔다.
보아하니 3명 중 2명은 문지기였고 지금 다가오는 남자만이 다른 역할인 듯했다.
문신의 색이 다르다는 것이 증거였다.
문지기의 문신이 붉은색인 반면 이 남자는 백색이었다.
“여기는 성취와 희생의 방이다. 천사의 여덟 눈동자가 너희들 판단할 것이다. 케르고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미로의 시공을 통과해야 한다.”
“어?”
미로라는 말을 들은 시로네는 궁수를 돌아보았으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예요?”
“어이, 착각하지 마라. 내가 네 통역사도 아니고 왜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는데?”
“어차피 동료에게는 말할 거잖아요. 빨리 말해 줘요.”
“싫어. 이제부터는 서로 신경 쓰지 말자고. 우리도 할 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백색 문신의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시로네와 궁수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통역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너희 중에 고대어를 익힌 자는?”
궁수가 나섰다.
“내가 조금 할 줄 알아.”
“그렇다면 통역해라.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천사의 눈동자는 미로의 시공에서 지켜보고 있다.”
의미는 여전히 몰랐지만, 그렇기에 고급 정보라는 것은 직감으로 깨달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얘들은 우리 일행이 아니야. 무슨 기회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먼저야. 이 녀석들은 따로 분리시켜 달라고.”
“아니. 성취와 희생의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희는 하나다. 성취할 것인가, 희생할 것인가. 너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그것뿐이다.”
궁수는 혀를 찼다.
“젠장! 재수 없게 걸렸군. 이런 애송이들을 데리고 뭘 어쩌라는 거야?”
대화가 길어지자 마법사가 다그쳤다.
“뭐라고 하는 거야? 빨리 말 좀 해 봐.”
할 수 없이 궁수는 여태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시로네를 포함한 모두에게 전달했다.
상황을 깨달은 용병들도 짜증을 냈다. 이렇게 얽힐 줄 알았으면 애초에 떨쳐 놓고 왔어야 했다.
마법사가 턱을 괴었다.
“흠, 검증과 증명은 다른 문명과 퍼스트 콘택트를 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야. 천사의 눈동자가 판단한다는 말은 실력을 평가한다는 뜻일 테고. 케르고는 전사의 부족이니까. 하지만 싸잡아서 애송이들하고 같이하라니, 우리에게 너무 불리한 거 아냐?”
에이미가 말했다.
“이봐요. 자꾸 애송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호호호! 아, 그러니? 무임승차도 모자라서 우리에게 빌붙을 생각은 아니고? 분명히 말해 두는데 너희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마음대로 하시죠. 우리도 어차피 당신들하고는 같이할 생각 없으니까.”
마법사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 잘 걸렸다.’
자신이 누구던가? 용병 세계에서 신진 마법사로 각광을 받고 있는 루키였다.
질 떨어지는 용병과는 아예 어울리지도 않았고, 동료들도 비슷한 또래에 급이 맞는 자들로만 꾸렸다.
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어린애들은 어디에서 검술이나 배우고 마법이나 익힌 학생인 게 분명했다.
‘학교와 실전은 천지 차이란다.’
온갖 위험한 일에 팔려 다니는 게 용병. 그 사이에서 신진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라면 공인 마법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그녀였다.
‘두고 보자, 애송이들. 여기만 넘어가면 눈물을 짜면서 빌게 해 줄 테니까.’
어쨌거나 둘의 기 싸움 덕분에 자잘한 감정들은 일단 묻어 둘 수 있었다.
8명이 감정을 담아 고개를 돌리자 백색 문신의 남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관문을 넘는 조건은 두 가지다. 능력을 입증하거나, 1명의 희생을 통해 1명을 보낼 수 있다.”
통역을 듣자마자 시로네가 물었다.
“입증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걸 입증해야 하는 건가요?”
“야! 자꾸 끼어들지 마! 통역 안 해 준다!”
“어차피 8명이 다 같이 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빨리 물어보기나 하세요.”
할 말이 없어진 궁수는 이를 뿌드득 갈며 말을 전했다. 백색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의 후예여, 심판의 제단에 올라가 8개의 구슬 중 하나에 너를 증명하라. 신의 언어가 답할 것이다. 붉은 빛이 떠오르면 불합격, 백색의 빛이 떠오르면 합격이다.”
시로네는 계속 질문을 쏟아 냈다. 궁수를 개인 통역사로 고용한 듯싶었다.
“참가 횟수에 제한이 있나요? 이를테면 한 사람이 몇 번이고 시도할 수 있는 거예요?”
“힘이 떨어질 때까지 해도 상관없다. 통과자가 나오면 모두 케르고로 갈 수 있다. 통과자가 1명도 나오지 않는다면 돌아가야 한다. 이는 미로의 의지이자 케르고인이 지켜야 하는 사명이다.”
“성취와 희생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희생은 뭐죠?”
“한 사람의 피로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다.”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거기까지 들은 시로네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고 1명만 성공해도 전원 통과가 가능하다. 단,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동료 1명의 목숨으로 1명을 통과시키는 잔혹한 룰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 잔인한 대가가 필요할 만큼 케르고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단순히 루프를 구하기 위해 동료를 죽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건데. 결국 용병들도 케르고 유적지의 진짜 비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거야.’
시로네는 통역을 원했다.
여태까지 수집한 정보들이 유용했기에 궁수도 순순히 말을 받을 준비를 했다.
“희생에 제약이 있나요? 그러니까 바깥에서 다른 사람을 데려온달지, 시체를 이용한달지.”
“이 방에 들어온 순간 너희는 하나다. 모두가 동의하기 전까지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제사장으로서 너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시로네는 이 방의 룰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만장일치라.’
다수의 의견을 통일하는 것은 1명이 다수를 지배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용병 리더의 생각은 달랐다.
“뭐야,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 그럼 이건 어때? 애송이들 넷을 희생시키고 우리가 들어가는 거야. 이런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네.”
리더가 겁을 주려는 듯 입가를 찢었으나 시로네는 그저 한심할 따름이었다.
‘이 그룹은 리더가 너무 감정적이다. 동료들은 그나마 목적을 우선시하는 편인데.’
성취 조건을 달성하면 모두 통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미리부터 희생을 운운하며 분위기를 망칠 필요가 없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미로의 시공(3)
예상대로 마법사가 말렸다.
“됐어. 시작하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꼬마야.”
백색 문신의 남자는 8개의 구체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에서 팔짱을 꼈다.
“내 설명은 끝이다. 한 사람씩 나와서 증명해라.”
시로네 일행과 용병 일행은 시선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 시작하는 게 이득인지 셈하는 것이었다.
리더가 철검으로 시로네를 겨누었다.
“어이, 너희가 먼저 해. 물론 기대도 안 하지만 우리가 감이라도 잡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그러면 혹시 모르지, 케르고로 데려가 줄지.”
“싫은데요. 왜 그걸 독단적으로 정하죠?”
“뭐가 어째? 너 말이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당장 죽여 줄까? 널 죽이고 들어가 줘?”
“당신이 자꾸 분란을 일으키잖아요. 지금부터는 의견을 통합해야 해요. 만장일치가 아니면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한 사람이라도 거부하면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거예요. 모두가 처음인 이상 신중하게 판단해서 순서를 정해야죠.”
“이, 이 건방진 애송이가……!”
리더는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것도 미워 죽겠지만,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 그를 가장 열 받게 만들었다.
“흠.”
반면 마법사는 생각이 달랐다.
시로네의 말대로 일단은 의견을 통합하는 게 중요했다.
“우리끼리 싸우는 건 어떻게든 손해야. 그럼 의견을 모아서 순서를 정하자.”
시로네는 제단에 있는 구체를 살폈다.
‘저건 미로의 시공이야.’
또한 스폿이라는 현상을 이미 경험했기에 어떤 상황인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크기는 작아도 깨기 힘들 거예요. 세계 전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화력이 높은 마법사는 일단 뒤로 빼고 전사들이 먼저 하는 게 어때요?”
마법사가 물었다.
“이견은 없지만 의문이 있어. 화력이라고 했는데, 증명의 방식이 꼭 물리력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관찰형 오브젝트가 아닐까 묻는 거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저 구체를 경계로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거예요. 외계의 행동은 인지되지 않고 경계선에 닿는 것만을 판정하는 거라면 물리력 외에는 없죠. 무엇보다 케르고는 전사의 후예니까요.”
“납득했어. 그러면 그 방식으로 순서를 정하자. 우선 검사부터 시작할까?”
그렇게 말한 마법사가 리더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나중에 할 거야. 저딴 애송이가 뭘 안다고 나불대는 거야? 이건 간단한 게임이야. 그냥 나가서 때려 부수면 되는 거라고.”
마법사의 표정이 답답해졌으나 위계를 깨트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후우, 우리 쪽 리더는 이렇다는데? 어떡할래?”
“그럼 우리 쪽 검사를 보낼게요.”
시로네는 친구들을 살폈다.
리안과 테스 모두 검사였으니 누가 먼저 나갈지는 자명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이야.’
첫 번째 시도에서 이 규칙의 대략적인 룰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만큼 막중한 임무였으니 리안이 테스를 먼저 보낼 리가 없었다.
“내가 할게. 내 차례에서 끝나 버릴 수도 있겠지만.”
테스도 순순히 양보했다.
“하여튼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무튼 조심해. 트랩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음.”
테스의 응원을 받으며 제단의 중심으로 들어간 리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에서 볼 때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팔방위의 구슬이 전부 자신을 노려보는 듯했다.
“야! 빨리해! 벌써 겁먹었냐?”
리더가 소리쳤으나 리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시로네가 넌지시 운을 띄웠을 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따지자면 선봉장이다. 내 차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어야 해.’
북쪽 구슬로 가닥을 잡은 리안은 뚜벅뚜벅 접근했다.
멀리서 봤을 때와 달리 투명하지는 않았다. 희뿌연 안개가 차 있는 느낌이었다.
“횟수 제한은 없다고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