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35
“멈춰.”
리안에게서 아수라의 기운이 퍼지자 테스를 괴롭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공격이 오지 않는 것이다.
“허억! 허억!”
테스가 거친 숨을 내쉬었으나 이미르는 그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심권을 가볍게 풀다니.’
그저 리안의 어깨 위로 흉악하게 넘실거리는 아수라의 기운이 궁금할 뿐이었다.
‘무신의 경지인가?’
아수라발발타(전장의 부처).
‘조금 전의 느낌은…….’
온 세상의 전투를 모두 섭렵한 끝에 내지르는 가장 완벽한 일격을 말한다.
‘재능도, 꼼수도 아니야.’
오직 노력으로 쌓아 올린 최대한의 경험치.
‘대체 몇 명을 벤 거냐?’
빨리 싸우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성장했구나. 이번에는 정신적 경지인가? 좋아. 이번에야말로 너와 내가…….”
“왜 싸우지?”
리안의 물음에 이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르, 너는 강하다. 최강이라는 수식어는 늘 네 역사를 따라다녔지.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너의 전투에는 명분도, 목적도 없다.”
“……그래서?”
“나를 이겨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원하는 게 그저 승리일 뿐이라면, 얼마든지 주마. 그러니 이제 싸움을 멈추지 않겠나?”
정적 속에서 클럼프는 생각했다.
‘저 철없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멋들어진 말도 내뱉을 줄 아는군.
‘아니, 솔직히 나보다 낫구나. 지옥에서 그만한 고행을 거쳤다는 뜻일 터.’
“무슨 헛소리야?”
이미르의 인상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너무 많은 피를 봤더니 정말로 부처라도 된 것 같냐? 아니, 너는 악귀다. 피 냄새를 쫓는 악귀. 너의 경지는 누군가를 베기에 가장 이상적이다.”
“그렇겠지.”
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기고 싶지 않아. 그것뿐이야. 승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
“멍청한 놈.”
고작 승리 따위.
“아니, 됐다.”
이미르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만들어 주지, 명분.”
끝도 없이 커져 가는 살기에 장내의 모두가 창백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피해!”
도망치는 속도는 고수와 하수가 달랐지만, 이미르의 눈에는 그저 미물일 뿐.
“늦었어.”
온 힘을 다한 일격이 허공을 강타하자 강철처럼 압축된 공기가 튀어 나갔다.
“전부 뒈져 버려라.”
리안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으나, 또다시 공간이 일그러졌다.
“응?”
에테르 파동.
왜곡의 수준을 넘어 거의 선의 형태로 공간이 구부러지면서 이미르 쪽으로 향했다.
쾅!
자신이 쏜 강철 공기를 되돌려받은 이미르의 고개가 90도로 꺾이고.
“……뭐야, 넌?”
공간의 틈새에서 진성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천의 황제다.”
목숨을 건진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그녀가 리안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세계 각지를 돌며 인원을 모을 것이다. 전투를 도와줄 수 없어.”
임무는 어디까지나 수송.
에테르 파동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르의 어금니와 싸웠을 때 깨달았다.
“그래. 부탁한다.”
어차피 거인의 부대가 오고 있으니 인류도 전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진성음이 사라지자 이미르가 투덜거렸다.
“날파리 같은 놈들 천지군. 이럴 바에야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릴까?”
“그럴 필요 없어.”
리안이 대직도를 꺼내는 순간 수천 개의 칼날 같은 살기가 밀려들었다.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크크크.”
거봐, 어쩔 수 없다니까.
‘우리 같은 놈들은…….’
쓰러질 듯 몸을 기울인 이미르가 다음 순간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이거 아니면 못 살거든!”
똑같은 속도로 돌진하는 리안의 몸에서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잔상이 꽃을 피웠다.
“크으으으!”
각기 다른 전장과 전투, 상황이 한 폭의 지옥도처럼 배경을 가득 채우고.
‘아수라…….’
그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깨달음.
‘발발타!’
가장 완전무결한 일격이 이미르의 감각을 뚫고 옆구리 쪽을 파고들었다.
‘아차!’
뒤늦게 알아차린 이미르가 팔꿈치를 내려 대직도의 칼날을 막았으나.
‘우악, 씨……!’
콰아아아아아아앙!
섬광은 이미 세상을 크게 가로지른 상태였다.
***
케르고 유적지의 지하 신전에서 시로네 일행은 다시 태어난 무명과 대치 중이었다.
“어디 있지, 그 녀석은?”
맥락이 없는 질문이었으나 망자에게 가장 강한 기억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쿠안.’
무명을 벤 검사.
시로네가 입을 다물자 무명이 걸어왔다.
“상관없지. 놈이 이 세계의 1등이라면 몇 명만 죽여도 결국 만날 테니까.”
“몇 명?”
무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 죽일 필요 없잖아. 하나를 죽이면 그 하나와 비슷한 수준은 전부 내 아래가 된다. 다음 단계를 죽이면 또 그만큼의 숫자가 밑으로 떨어지고…….”
전장의 서열이 정해지는 메커니즘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최상위에 있는 소수뿐이지. 일단 여기에서 20명 정도 죽였으니, 못해도 내 밑으로 3억 정도는 깔려 있지 않을까?”
“…….”
시로네는 케르고 부족민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마하투 씨.’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방을 지켜 주지 않았다면 간발의 차로 전멸했을 터였다.
‘무명은 아마도 백신 프로그램.’
즉, 관리자다.
‘미싱 링크가 적용되어 기억을 잃은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속이는 건지 모르지만.’
싸워 봤자 남는 게 없었다.
“크크, 처음에는 다 그렇게 생각하지.”
가올드가 나섰다.
“뭐, 1등이 어째고 저째? 솜털도 안 빠진 루키가 말이 심하군. 덤벼라. 5조 5천 등인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안 돼요.”
시로네가 손을 뻗어 말렸다.
“무명은 모든 능력을 순식간에 체득합니다. 우리의 전력을 보여 줄 필요가 없어요.”
가올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 여기서 없애 버리면 그만이잖아? 한 번은 부딪쳐야 할 놈이야.”
“천국과는 달라요. 이제 우리만 생각할 수 없다고요. 만에 하나 무명에게 전력이 흡수되면, 앞으로 전개하는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흐음.”
“신이 히트맨으로 저 녀석을 선택한 이유는, 닫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최강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율법이기 때문이에요.”
성취의 천사와 가라스의 결합이었다.
“일단 나쁜 변수를 없애죠. 무명이 저에게 도달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어요.”
가올드가 물었다.
“어째 네가 1등이라는 말로 들린다?”
“…….”
솔직히 맞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일단은 성전으로 집결해야 해요. 그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그렇다고 해도…….”
강난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벽 쪽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델타 본청의 복도가 드러났다.
“시로네.”
진성음이 마중을 나왔다.
“오호.”
일행도 비로소 시로네의 전략을 간파하고 성전의 복도 쪽으로 들어갔다.
미로는 성음을 흘끗 살폈다.
‘정확한 타이밍. 공간은 시간이기도 하다는 건가? 시로네가 구하려고 한 이유를 알겠어.’
물론 성음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옥도 불사하는 강인한 의지일 테지만.
일행이 장소를 옮길 때까지 입구를 지키던 시로네가 무명을 견제하며 말했다.
“저는 동시 사건을 해제할게요. 성음은 진리의 피라미드에서 줄루 씨를 데려와 줘.”
“그래. 조심하거라.”
가올드 일행이 사라지고 성전의 풍경이 벽으로 변하자 시로네의 표정이 변했다.
“무명.”
인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케르고인의 분노가 그의 목소리에 담겼다.
“너는 절대로 쿠안 씨를 넘을 수 없어.”
단지 뛰어나다고 최고가 될 수 있는 세계란 신의 지론일 뿐이었다.
동시 사건을 소멸시킨 시로네가 사라지자 무명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쿠안을 베는 방법.’
상식을 초월하는 무브먼트를 제압하는 방법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무명이 눈을 감자 공기가 부르르 떨리더니 풍경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
무명의 육체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 벽에서 쾅 하는 소리가 터졌다.
“…….”
벽에 정면으로 충돌한 그는 기립한 자세로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하.”
신의 지능이 부럽지 않은 통찰력이 순식간에 오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훨씬 어려운 거였구나.’
제대로 해 보기로 결심한 그는 가부좌를 하고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마스터까지 남은 시간.
38분 27초.
***
진리의 피라미드.
시로네가 바깥 세계로 떠난 이후, 줄루 일행은 여전히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는 이곳에도 찾아왔다.
“글렌!”
시로네가 우로보로스를 전개하자 마음을 잃은 글렌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살고 싶어.”
아레스는 희망을 보았으나, 초경의 아린이 바라보는 글렌의 상태는 달랐다.
“아직 바뀐 것은 없어요.”
신과 시로네의 타키온이 충돌하면서 인의 상태도 반물반인의 상태에 걸쳐 있었다.
“글, 글렌…….”
루키아가 팔을 뻗어 글렌의 손을 잡았다.
신의 오른손과 악마의 왼손이 들어간 충격으로 탈진에 빠진 그녀였으나.
‘야훼여.’
그 경험은 신의 정의를 바꾸어 놓았다.
‘글렌에게 용기를 주소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때, 신은 각자의 마음에 깃든다는 사실을.
신의 선택 (3)
***
키트라의 목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