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37
배니싱이 깨졌다.
“……어?”
우오린과 키도는 동시에 정신을 차렸으나 그럼에도 즉각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비츠?”
장검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전율했으나 이내 뇌리를 차지하는 의문은.
‘왜 죽이지 않았지?’
체한 듯 인상을 일그러뜨린 하비츠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 도망쳐.”
목소리는 하비츠의 것이지만 표정은 어리숙한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간도.’
“크아아아아!”
하비츠는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끊어진 발목에서 마치 피가 응고된 것처럼 불그스름한 다리가 재생되었다.
‘저것은 간도의 몸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간도가 날 살렸어.’
우오린은 본능대로 몸을 날렸다.
다시 배니싱을 발동한 하비츠의 장검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지?’
두 사람.
‘아니, 하나는 사람이 아니던가?’
우오린의 종아리가 베이고, 하비츠의 옆구리에서 핏물이 터졌다.
“응?”
하비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데?”
키도라는 이름의 고블린을, 그는 떠올리지 못했다.
신의 선택 (4)
“뭐야?”
하비츠가 두리번거리자, 우오린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물러섰다.
“흐윽.”
배니싱이 풀리자 고통이 느껴졌다.
‘다리가…….’
종아리근육이 갈라진 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흐음.”
반면에 하비츠는 자신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동질감.
같은 배니싱을 가졌기에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했다.
‘나랑 비슷한 능력이다.’
하비츠는 우오린에게 검을 겨누었다.
“나와. 죽인다.”
또 하나의 배니싱이 풀리고, 비로소 키도가 우오린의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게 인지되었다.
“헤에?”
늘 가해자의 입장이었던 하비츠였기에 피해자가 되는 기분이 흥미로웠다.
‘이런 느낌이었군, 나한테 죽은 놈들은.’
하비츠가 검을 내리고 물었다.
“어떻게 했지?”
키도는 말이 없었으나 우오린은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하며 깨달았다.
‘기억의 맛.’
지박령에 뜯어져 나간 하비츠의 발목을 먹는 것으로 그의 기억을 흡수한 것.
“크으…….”
키도의 눈은 반쯤 풀어져 있었다.
‘미친놈.’
수많은 인간의 기억을 먹었지만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자는 본 적이 없었다.
‘토할 것 같아.’
하비츠의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기분이었다.
‘이런 정신으로 어떻게 살 수 있지?’
짐승은 차라리 낫다.
‘극한의 이성이 추구하는 원초적 본능. 생존과 전혀 상관없는, 유희에 대한 욕망뿐이야.’
즉 변태였다.
키도는 우오린의 상처를 흘끗 살폈다.
‘심각하게 베였군. 자력으로 도망칠 수는 없겠어.’
하비츠가 간도에 의해 동작이 굳었을 때 키도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했다.
‘한 번의 공격에서 우오린을 지킨다고 해도, 결국 배니싱에 죽고 말 거야.’
그렇다면 우오린을 내버려 두고 바닥에 놓인 하비츠의 발목을 먹는다.
‘결국 배니싱은 흡수했다.’
나타샤처럼 노력의 산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심한 재능이었다.
‘정신병도 재능이라고 치면, 천재적이다.’
문제는 배니싱을 발동한 상태에서는 도무지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것.
키도가 말했다.
“네가 여황을 죽인다면, 나는 여황을 지킨다. 우리 둘이 동시에 배니싱을 발동하면 그때는 누가 이길지 장담할 수 없어. 주사위 게임일 뿐이야.”
확실히 그랬다.
“…….”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위기에 하비츠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생각’ 따위는 없다.
“크크크.”
쾌락을 갈구하는 욕구만 있을 뿐.
“재밌겠는데?”
***
델타의 입구에서 인의 행렬은 저마다 쓰러져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은타라가 경악하는 가운데 시로네는 깨달았다.
‘신.’
이용할 수 없다면 죽이겠다는 뜻.
‘그게 너냐?’
세상의 어떤 살인마도 몇억의 인구를 한 번에 죽이지는 못할 터.
‘정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신은 이렇게 말한다.
공空이라고.
바깥 세계에서 바라보는 이 세계는 찰나에 있다가 사라지는 거품에 불과하기에.
‘하지만 우리는…….’
그 찰나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
“미카.”
-세계 인구수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227만. 489만. 1,043만. 4,429만.
전부 자살하고 있다.
“흐으으으.”
절로 턱이 떨리는 숫자.
아직 모두 사망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절반 이상이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대체 왜?’
신은 살인자인가?
“빼! 삐삐!”
인의 파동으로 이글거리는 델타의 복도에서 키트라는 두 가지 연산을 끝냈다.
그가 수행한 알고리즘은 두 가지.
1. 현재 시스템하에서 100퍼센트가 나올 때까지 연산을 반복한다.
2. 학습을 통해 시스템을 바꾼다.
우선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결론은, 일루미나티의 권한을 대임하는 것이었다.
-사용자 62.7퍼센트가 로그아웃을 요청합니다. 시스템 종료 권한을 발동합니다.
이제 우주를 닫을 수 있다.
“삐…….”
하지만 그 순간 키트라는, 신은, 62.7퍼센트라는 수치에 대해 평가했다.
‘충분한가?’
일루미나티가 설정한 요구치는 넘었지만 남은 37.3퍼센트의 사용자는 거부.
설령 신이라도 사용자의 마스터 코드를 차단하는 것에는 합당한 논리가 필요했다.
-인과율이 떨어집니다. 확률 100.000000퍼센트. 확률 100.0000퍼센트.
같은 100퍼센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벽성이 깨지는 흐름이 감지되었다.
-확률 100.00퍼센트.
‘승인.’
더 많은 사용자의 이득을 도모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계적인 논리에 의해.
-시스템 종료.
신은 다중 우주의 무수한 세계 중의 하나에 종료 코드를 입력했다.
우주 공간.
시로네 스피어의 작업량이 98퍼센트를 돌파한 시점에서 태양풍이 밀려들었다.
“크윽!”
멀리 떨어져 있는 시로네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율법이 바뀌고 있어.’
급격히 부푼 태양은 시스템 전체를 삼킨 다음 작은 점으로 수축할 것이다.
그 점이 우주를 흡수하는 시간은 얼마일까?
1만 년? 10만 년? 1억 년?
‘아니.’
바깥 세계에서는 찰나다.
비눗방울을 터트리듯이, 작동되는 기계를 끄듯이,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
‘제발…….’
-작업량 98.356퍼센트입니다.
미카의 차가운 정보를 받아들인 시로네는 시간을 계산하고 절망했다.
‘시간에 맞출 수 없어.’
지상의 시로네가 타키온으로 원인을 바꾸고 있지만 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피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시로네는 태양의 코어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버텨 주기를.
에이미는 영혼을 쥐어짜 냈다.
“흐으으으.”
불의 화신을 극대화시켰지만 태양의 율법은 불마저 태워 버리려는 듯했다.
“에이미, 돌아가세요.”
이카엘이 말했다.
“여기가 끝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곧 세계의 율법에 녹아 없어질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천사가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일단 태양이 폭발하고 나면 설령 바깥 세계의 신이라고 해도 되돌릴 수 없다.
‘유일무이한 비가역적 사건.’
진정한 오메가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말은 막을 수 없지만 우주가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좀 있을 거예요.”
태양이 폭발하고 10분 정도는, 아니 그들이라면 10일 정도는 더 생존하지 않을까?
이카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에이미의 마음은 처참했다.
‘시로네.’
만나고 싶었다.
어차피 종말을 되돌릴 수 없다면 최소한 함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미안해, 시로네.’
불의 눈물을 흘리며 에이미가 말했다.
“아뇨. 이곳에 남을 거예요.”
“에이미.”
“설득할 생각 하지 마세요. 물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로네도 보고 싶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지막까지 싸울 겁니다.”
에이미는 준비가 끝난 듯했다.
“에이미는 죽을 거야.”
페르미의 말에 세리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곧바로 멱살잡이.
“이 미친 자식아! 그런 중요한 걸 이제 말하면 어떻게 해! 시로네는? 시로네도 알고 있어?”
“아니.”
세리엘은 더 황당했다.
“너, 진짜 미쳤어?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 했다고?”
“이해한다고 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