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6
“후우.”
바깥의 공기가 텁텁했던 폐부를 닦아 냈다.
불과 몇 시간의 여정이었는데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오늘의 것이 아닌 듯했다.
시로네 일행과 용병들은 아무 말도 없이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에이미가 돌아보았을 때,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전보다 멀어져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오늘 이후로 팀을 유지하지 못할 터였다.
시로네가 물었다.
“이제 어떡할까? 예상보다는 성과가 있었는데, 오늘 일과는 이걸로 끝?”
에이미가 찬성했다.
“그러자. 간만에 힘을 썼더니 피곤하네. 일찍 들어가는 대신 전략을 세우는 게 좋겠어.”
리안이 굉장한 걸 발견한 듯 말했다.
“그 전에 국수나 한 그릇 때리는 게 어때? 아까 거기 맛있던데.”
테스가 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는 국수를 먹고 또 먹니? 아무리 못해도 막국수 정도는 나와 줘야지. 그래서 단순하다는 거야.”
“뭐? 단순? 내가 얼마나 고심했는 줄 알아?”
리안과 테스가 메뉴로 싸우고 있을 때 용병들이 다가왔다.
시로네 일행은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전사, 마법사, 궁수는 있는데 리더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용병들이 선뜻 말을 못 꺼내고 눈치를 보자 결국 마법사가 시로네에게 물었다.
“저기……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지 않을래?”
“용병단요?”
“응. 학생이라는 건 알지만, 용병도 좋은 점이 많아. 명예는 물론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특히나 너희들 실력이면 당장에 스타로 떠오를걸. 보다시피 조금 전에 리더는 탈퇴해 버려서. 아, 물론 새로운 리더는 네가 해도 괜찮아. 우리도 그걸 원하고, 지시를 내리면 무조건 따를 거고 다른 사람도 들어온다면 정말로 잘 대접할게. 어때?”
시로네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끈 다음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자 친구들도 미련 없이 시로네의 뒤를 따랐다.
리안이 말했다.
“그냥 국수 먹자니까. 솔직히 맛있었잖아?”
“싫어. 너 그냥 무조건 배부터 채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조금만 참으면 훨씬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단 말이야.”
용병들은 멀어지는 일행을 허탈하게 쳐다보았다.
마법사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하더니 시름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휴, 박복한 내 인생.”
앵무라는 이름(1)
주점 왕궁의 루프 제조장.
가장 독한 루프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팔코아는 눈의 초점이 풀려 있었다.
“개 같은 놈들. 내가 이대로 끝낼 것 같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스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뭘 하려고? 왜 나를 부른 거지?’
시로네 일행이 소란을 부린 지 하루가 지났건만 팔코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지스, 다시 갔다 와야겠다.”
“네? 어, 어디를요?”
“그 녀석들 데려와. 여기가 아닌 아지트로. 조직원을 총동원해서 짓밟아 주지.”
정말로 시로네 일행을 죽일 생각이었다.
‘미쳤어.’
지스는 다급했다.
“하, 하지만 이제는 함정이라는 걸 알 거예요. 제 말은 절대로 안 믿을 거라고요.”
“그래서 이걸 쓰라는 거야.”
팔코아가 내민 병에 가루로 조제한 루프가 담겨 있었다.
“설마…… 그녀를 중독시킬 생각이세요?”
“중독? 멍청한 자식. 그 여자는 절대 중독되지 않아. 카르미스란 그런 거야.”
“그럼 이건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절대 중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작전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팔코아는 병을 열고 루프 가루를 물에 탔다. 무색무취의 가루가 스며들었다.
보통 뿌리 하나를 2시간 정도 씹지만 지금 팔코아가 탄 양은 그 3배에 달했다. 무엇보다 수용액이기에 약효를 한 번에 받게 될 터였다.
“설마…….”
“그래. 가서 이걸 먹여. 그 여자는 분명 자신만만하게 받아 들고 마실 거라고. 이 정도 양이라면 꼼짝없이 죽을 거야. 친구의 시체를 보면 놈들도 눈이 돌아가겠지. 그리고 아지트로 오면, 내가 전부 죽인다.”
“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데요? 그 녀석들이 나중에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크크, 그러니 전부 죽여야지.”
팔코아는 제조장에 쌓여 있는 루프 가루 중에 하나를 들고 다시 내밀었다.
“…….”
유리병을 보는 지스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 인간, 정말로 죽일 생각이야.’
“뭐 해? 빨리 안 받아? 아니면 네가 마실래?”
살기를 느낀 지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의식이 흐려질 정도의 공포였다.
그는 말없이 병을 받아 들었다. 팔코아가 다시 등을 돌리며 루프를 제조했다.
“확실히 처리해. 아지트 위치 제대로 알려 주고. 개자식들, 나에게 굴욕을 줬겠다?”
지스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사이로 에이미와 시로네의 얼굴이 번갈아 교차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들처럼 맞서 싸울 수 있다면.
“……해.”
팔코아가 돌아섰다.
“응? 뭐라고?”
시선을 마주친 순간 정말로 심장이 멈추는 듯했으나 이미 결정을 내린 지스는 관성대로 내뱉었다.
“그만하라고,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팔코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프의 약효로 환청을 들은 것일까?
하지만 노려보는 지스의 눈빛과 표정까지 거짓일 리는 없을 터였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팔코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으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스는 여기서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빌고 죽기 직전까지만 맞으면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테니까.
‘에이미.’
그녀가 마차에 탄 이유는…….
‘난 양아치가 아니야.’
두 주먹을 움켜쥔 지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적당히 하라고, 지저분한 자식아. 너 같은 놈은 사람도 아니야. 약물에 찌들어서 사리 분간도 못 하는 자식!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몇 명이 죽어야 하는 거야?”
지스는 속엣말을 전부 내뱉었다. 자가 쇼크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는 건가? 죽을까?’
팔코아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동공이 풀린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지스.”
팔코아가 다가왔다.
“나, 나는 절대로…….”
그리고 지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와 얼굴을 그대로 짓이겼다.
지스는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코피를 흘리며 벽에 처박힌 그의 어지러운 시야에 팔코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니, 악귀였다.
***
유적지 탐사를 끝낸 시로네 일행은 숙소 인근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정신없이 떠들고 식당을 나섰을 때에는 어느덧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걸어갈까? 별로 안 머니까.”
달구경을 하며 30분 정도를 걷자 자연스럽게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다.
시로네와 리안이 앞서는 것을 지켜보며 에이미와 테스는 못다 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머, 군인이 된다고?”
테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화염 계열인 데다가 스나이퍼 모드를 전공으로 하고 있으니 전투 마법사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는 게 정석이지만, 여태까지 테스가 겪은 에이미라는 사람은 겉보기와 달리 여리고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응. 왜? 그렇게 안 어울려?”
“아니, 그렇지는 않아. 솔직히 너는 잘할 것 같거든. 다만 군대라는 게 좀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잖아. 너는 좀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할 줄 알았거든.”
테스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타깃형에 강해서 스나이퍼를 선택했고, 그러다 보니 전공에서 가장 유리한 직업을 고를 수밖에 없게 되더라고. 물론 군인이란 직업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긴,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있나. 나도 마찬가지야. 엘자인 가문에서 고를 수 있는 직업은 딱 두 가지거든. 외교관하고 첩보원. 물론 우리 아빠는 둘 다 되니까 짜증 나는 거지만.”
테스가 갑자기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이런 건 어때?”
“응?”
“첩보원 말이야. 사고 능력도 발군이고 장거리 타격이 특기잖아? 게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도 있으니 심심할 일도 없고 말이야.”
“그렇기는 한데…… 막상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어. 그리고 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개방적이지도 않아.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연기 같은 거 잘 못하거든.”
“호호! 괜찮아. 첩보 가문에서 자란 내 안목을 믿어. 무엇보다 너에게는 엄청난 무기가 있거든.”
“무기? 그게 뭔데?”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진 에이미를 보며 테스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쁜 얼굴. 첩보원에게는 필수 사항이거든. 미녀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얼굴이 화끈거린 에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에이, 그게 뭐야. 괜히 기대했네.”
“무슨 소리야? 엄연한 사실인데. 왕국 정보원에서는 인상도 선발 기준 중의 하나거든.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에서 에이미의 얼굴은 완전히 먹힌다는 거야. 그러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봐. 내가 가문에 적극 추천해 줄게.”
“돼, 됐어. 나는 내 마법 실력만 믿을 거야.”
테스의 웃음살이 볼록해졌다. 낯간지러운 말에 약한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아유, 귀여워. 왜 이렇게 괴롭히고 싶지?’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테스는 앞서가는 남자들을 보았다.
처음 리안에게 기사 서약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막상 시로네라는 사람을 알게 되자 조금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에이미도 시로네도, 정말 좋은 애들이야.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나중에…….’
테스는 문득 생각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졸업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응? 당연히 공인 시험을 치르고 직장을 구해야지.”
“아니, 시로네랑 너 말이야.”
“시로네랑?”
에이미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
그러다가 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채고 당황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네. 시로네가 내 졸업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잖아. 시로네는 아직 클래스 포고, 너는 졸업반이고. 게다가 네 실력이면 분명 내년에는 졸업할 수 있을 텐데. 그럼 넌 수도로 떠날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막상 테스의 입을 통해 듣자 심장이 빨리 뛰었다.
졸업을 하면 최소 1년 이상은 시로네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난 어떤 선택을 할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많은 것이 변할 수도 있었다.
에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깊게 고민하는 것 자체로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호오, 그래?”
에이미의 애써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서도 테스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에이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약속은 했어, 반드시 나를 따라잡기로. 그래서 말도 편하게 하는 거고.”
“아, 그래서 친구로 지내는 거구나.”
테스에게는 또 다른 의외였다.
아예 숙맥인 줄 알았더니 나름 분투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시로네도 대단하지. 반년 만에 클래스 포에 올라갔다니. 그래도 졸업은 좀 다른 문제잖아.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
에이미도 장담하지 못했다.
시로네가 여태까지 이룬 성과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욕심일까, 여기서 더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에이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시로네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을까? 그렇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고 있는 것일까?
‘빨리 쫓아오란 말이야. 이런 고민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 두고 가 버릴…….’
그때 테스가 말했다.
“에이미.”
심각한 목소리에 에이미가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테스는 휘파람으로 새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시로네와 리안이 눈치 빠르게 합류하자 에이미가 물었다.
“테스, 왜 그래?”
처음에는 그녀의 장난기가 발동한 줄 알았으나 표정이 정말로 심상치 않았다.
“누가 있어, 우리 숙소 주변에.”
“…….”
스키마 중에서도 감각 계열 빌드를 사용하는 테스는 기척을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 사실을 아는 리안도 심각한 표정으로 숙소를 살폈으나 어둠 속에서는 특별히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테스가 말했다.
“입구 쪽에 누군가 있어. 폐활량을 봤을 때 남자야. 평균 체형이라면 키는 170에서 175 사이. 물론 이건 통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거지만…….”
특이체질일 경우 체구보다 폐활량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리안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등 뒤에 걸린 대직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